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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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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합 3:16~19)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기도로 캄보디아 선교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헌금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요즘 계절이 너무나 좋은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풍성한 계절입니다. 
나무에는 온갖 과일들이 탐스럽게 열렸고, 
들에는 누런 곡식들이 익어 수확하는 그야말로 추수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추수하는 자의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여름날 수고하고 애썼던 모든 땀 흘림에 대한 보상이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이 있기에 농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농부만이겠습니까?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누구든지 
뭔가를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 대가를 얻게 되면 
그 동안 겪었던 온갖 수모와 고생은 다 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만큼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수고는 적게 하고 
거두는 것은 수고한 것보다 더 많이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수고해 놓고도 그 수고한 만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돕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수고한 만큼 거두었다면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란 수학공식처럼 입력한대로 결과를 내지는 않습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고, 선하게 살았고, 또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는데도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거나 삶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누구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억울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무했다는 겁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단 말인가? 하나님이 어쩌면 그럴 수 있는가?”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박국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항의했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의로운 사람이 고난 받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왜 하필이면 저 악한 바빌로니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노하십니까?’
이러한 질문의 배경에는 다분히 하나님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최소한도 자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난 하박국의 생각은 이제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악에 대해서 진노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도, 바빌로니아의 죄악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음만 잡수시면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부당하다는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자체가 교만의 소치였음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옳은 것입니다. 
죄악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것이지, 의인을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이제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잠잠할 것을 명령합니다. 
합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더 이상 부질없는 교만한 말을 중단하라고 다그칩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높은 뜻을 분별하고 순종해야 할뿐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하박국의 태도는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을 중단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하시더라도 자비를 잊지 말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이지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새롭게 해 주십시오. 부흥케 해 주십시오’

진노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진노하시더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입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고 
사람관계를 잘 맺는답니다.

그냥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더랍니다. 
주로 그 사람 이름을 불러 가면서 ‘하나님 그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어느 날 목사님이 집에 들어서는데 아내가 기도하고 있더랍니다. 
그날도 누군가를 위해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더랍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나 들어보니까 ‘하나님 내 남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지금 하박국이 처해 있는 상황은 바빌로니아라는 적군이 쳐들어와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리고 나라가 망하고 말 상황입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합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은 닥쳐오는 환난의 소식을 들으며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립니다. 
뼈가 썩는 것 같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게다가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런 것들은 모두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무엇에 쓰겠습니까? 
소출을 내지 못하는 감람나무와 밭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양이 없는 우리, 소가 없는 외양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하박국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절망스런 상황 가운데 놓여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사업도 망하고, 가진 것도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가정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부부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자녀들도 비뚤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야단을 쳐보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절망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희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이 처해 있는 상황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합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모든 것을 다 잃었으나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박국은 이제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과일이나 식물, 양이나 소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입니다. 

이것들 없어져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만 있으면 난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야말로 성숙한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도에 대해서 하신 말씀 가운데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19:29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를 고민에 빠지게 만듭니다. 

‘과연 내가 주님을 따를 수가 있을까?’
이 말씀을 아무런 고민도 없이 잘 믿는 사람들은 정말로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을 정도로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이 말씀은 이 모든 것들보다 이 선물을 주신 분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이삭의 살과 피를 제물로 원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100세에 낳은 아들을 키우면서 점점 아들 키우는 재미에 빠집니다.
너무 집착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버리고 그러면 사람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위대한 결단을 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은 stop을 명하십니다. 
‘내가 원한 것은 바로 너야. 네 아들이 아니야. 네 우선순위를 알고 싶었어.’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빠져서 그 선물을 즐기다가 하나님을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악에 빠졌고, 그래서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주님을 발견할 때 회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을 잊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잃었어도 하나님을 찾았으면 아무 것도 잃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졌어도 하나님을 잃었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하박국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은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찾았다면 행복은 시작됩니다. 할렐루야!
진정한 부흥과 회복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감사한 일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고, 
육신적으로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상황은 비록 절망적일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어렵더라도 미래는 희망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선교사역자인 코리 텐 붐 여사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나치의 수용소에 잡혀간 코리는 언니 베스와 함께
벼룩이 들끓는 방에 수감이 되었답니다. 
언니 베스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벼룩이 있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기도를 드렸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기도에 ‘아멘’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그 방에서 사랑을 베풀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씩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 방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코리는 벼룩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감사하게 되었답니다. 
왜냐하면 그 감방에는 벼룩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간수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수들은 그 방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고,
그래서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된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지난 주간 저희 캄보디아 선교팀은 은혜로운 시간들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부어교회 건축이 완공되어 봉헌예배를 드리겠다고 갔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가 보니 아무 것도 된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졸도할 뻔 했습니다. 

제 일생에 이런 황당한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4단계를 거쳐 일이 넘어가면서 중간에서 막혀 진행이 안 된 겁니다. 
우리는 선교사님에게 맡겼고, 번띠미언제이교회 목사에게, 
뻥뜨로교회 전도사에게 그리고 업자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선교사님에게만 진행상황을 사진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한 번도 사진을 보내주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봉헌예배를 드리러 간다고 했고, 오라고 해서 간 겁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된 것이 없었습니다. 
업자는 자녀가 장티푸스에 걸려 치료하느라 프놈펜에 가 있었고, 
그곳에 건축하는 일이 있어, 그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자녀가 치료도 다 되었고
자기 집문서라도 잡히고 책임 있게 완성하겠다고 결심을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감사해야 하는지 ….
우리는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외에 교회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은 돈만 가지고 성전을 지으려고 했느냐?’
‘기공예배도 없이 성전이 잘 지어질 줄 알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로 지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했습니다. 
해외선교도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주심에 감사했습니다. 

일단은 모든 돈이 다 날라 간 것이 아니고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업자에게 일부 주었던 돈을 돌려받고, 
공사 진척에 따라 단계적으로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가 보니 땅의 크기가 달라서, 설계도대로 하기보다 조정을 했습니다. 

더 잘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기 전에, 6일 동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논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고, 길이 막히기도 했고, 건물도 물에 잠겼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교회 건물을 좀 더 높이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교하는 동안에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좋은 날씨를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감사하기로 하니까 감사한 일들을 많이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저는 장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혀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아내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상을 당한 사람으로서 빈소를 계속 지키지 못하는 것도 부끄럽습니다. 
예정된 결혼식 주례를 해야 하고, 주일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일을 찾았습니다. 

제가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후에 돌아가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장모님이 예수님 안에서 돌아가신 것을 감사합니다. 
천국 가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상 중에도 제가 해야 할 소중한 사역을 맡겨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의 가족을 위로해 주는 여러분들이 계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감사하는 자입니까? 불평하는 자입니까? 
여러분의 입술의 말은 감사의 말이 많이 있습니까? 
불평의 말이 많이 있습니까? 

비록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또 그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바라보며 
기뻐하며 감사하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시고 
우리를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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