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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 (대하 2:14, 골 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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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 (대하 2:14, 골 4:10~11)


삼손은 이스라엘의 혼란기인 사사 시대의 위대한 사사입니다. 그는 남다른 힘을 가지고 있던 나실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얼마나 힘이 셌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사자를 염소새끼 찢듯 하였다고 합니다. 30명을 혼자서 쳐 죽였습니다. 여우 300마리를 꼬리를 묶어 불을 질러 불레셋 마을을 혼란 속에 빠트렸습니다. 나귀의 턱뼈 하나로 천명을 죽였습니다. 

말년에 눈이 뽑히고 힘이 빠진 삼손은 다곤 신전에 3천 명가량이 모여 자신을 조롱할 때 기둥 양쪽을 팔로 밀어 신전을 무너뜨려 원수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신전이 파괴될 때 원수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힘이 센 사람이었지만 늘 혼자였습니다. 삼손은 조직이나 팀워크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삼손의 실패의 원인입니다. 현대는 팀워크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나홀로 시대가 아닙니다. 이 시대는 팀의 시대(time to team)라고 부릅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합은 가장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부부는 언제나 최상의 팀입니다. 서로가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이 최근에 우리가 많이 듣는 말 가운데 ‘아웃소싱’, ‘벤치마킹’ 등이 죄다 나 홀로가 아니라 함께 하는 사회상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좋은 팀의 모델들을 많이 제시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팀을 이루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갈렙과 팀을 이루어 가나안을 정탐했습니다. 엘리야는 제자인 엘리사와 팀을 이루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할 때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팀을 이루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와 팀을 이루어 로마 전도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누가와 좋은 팀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와 팀을 이루어 일하셨습니다. 바울은 동역자라고 부르는 일꾼들이 팀이었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배후의 인물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역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함께 일하는 자(fellow-worker)’입니다. 바울은 디모데, 빌레몬, 디도,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우르바노 등에게 동역자라고 합니다(롬 16:9). 글레멘드(빌 4:3)도, 아볼로(고전 3:9)도,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3)도 바울은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사역을 위대하게,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하게 하십니다. 하나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전도하고, 양육하고, 심방 관리하는 일꾼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장점과 약점을 냉정하게 판단하여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팀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팀워크는 수고를 줄이고 효과를 크게 합니다. 

역대하 2:14에는 두로왕 후람이 자기 아버지 후람에게 속했던 사람을 성전 건축을 위해함께 일하게 합니다. “금, 은, 동, 철과 돌과 나무와 자색 청색 홍색 가는 베로 일을 잘 하며 또 모든 아로새기는 일에 익숙하고 모든 기묘한 양식에 능한자니”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내어 “다윗의 재주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성전건축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건축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일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三位) 하나님께서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한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팀으로 일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는 함께 갇힌 자들입니다. 

10절에는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바울이 옥에 갇힌 기록들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로마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에는 스스로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였고”라고 증언합니다. 또 바울과 함께 갇힌 자들도 많았습니다. 
  
빌레몬서 23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라고 합니다. 24절에는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함께 갇힌 자도 있었고, 함께 일한 동역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자를 함께 역사하는 자라고 합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바울과 함께 투옥 당하였습니다(행 19:29).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항해할 때 바울과 누가와 함께 동행하였습니다(행 27:2). 이런 아리스다고에게 바울은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 중심으로 생각하는 바울과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는 바나바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고 결별한 것입니다. 바나바의 생질인 요한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에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나 밤빌리아 버가에서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바울에게 실망을 주었고 2차 전도여행 때에 다시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던 바나바와 결별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후에 바울은 다시 마가를 필요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1에는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는 바울이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합니다. 후에 마가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힌 자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경험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야당의원들의 경력입니다. 투옥된 것이 대단한 정치적 경력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신앙인이 옥에 갇힌 것은 신앙인의 경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갇힐 수 있고, 갇힌 것이 부끄럽지 않고, 갇힌 것이 신앙의 경력이고,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존 번연은 한참 영국에서 청교도에게 핍박이 한참일 때에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번연목사님의 삶이 너무 청빈하고 모범적이었기에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목사님이 무슨 감옥에 갇힐만한 죄를 지었겠습니까? 집에 가서 식구들을 보고 오세요” 하면서 목사님을 감옥에서 내 보내 주었습니다. 번연목사님은 감옥을 나와서 가족을 보러 가다가 얼마쯤 가서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목사님에게 간수는 왜 돌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허락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돌아왔습니다.” 번연목사님이 감옥 방에 들어가 있는데 잠시 후에 왕이 보낸 감찰사가 번연목사님이 잘 있나 보려고 왔습니다. 정작 놀란 것은 간수였습니다. 만일 번연목사님이 가고 없는 사이에 왔다면 목이 달아날 뻔 했습니다. 감찰사가 돌아간 다음에 간수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이제부터는 제가 다녀오라 말라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녀오라고 하시면 언제든지 다녀오세요.” 갇힌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갇힌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함께 갇힐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루터는 “갇힌 자만이 자유롭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옥중서신을 보면 얼마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자유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문자적으로 지나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함께 일하지 못합니다. 너무 문자적이고 지나치게 율법적인 이런 자들은 함께 일하기 힘듭니다. 항상 율법적으로 계산하고, 따지고, 시비하는 사람은 비판은 잘 하지만 정작 어려움을 당하면 다 흩어질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절대로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1상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저자로서 바울의 마지막 여정 끝까지 함께 고생하며, 고소당하고, 파선하고, 순교할 때 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하고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함께 일하는 자를 하나님은 남겨 두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는 위로가 되는 자들입니다. 

11절에는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함께 일하는 자는 헬라어로 ‘쉬네르고이’로서 교회를 위해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람을 위로하는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위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신 보혜사는 상담자, 조언자, 대변자, 중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위로자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위로자입니다. 보혜사를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 합니다. 위로를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라 합니다. ‘파라클레토스’는 ‘파라칼레오’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있기만 해도 든든하고 위로가 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역사하는 자 즉 동역자는 위로하는 자입니다. 동역자는 반드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든든합니까?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얼마나 평안합니까? 보기만 해도 좋고,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곁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되시는 위로가 되는 분이십니다. 

피터 와그너교수는 그룹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동일시의 기능이 있습니다. 둘째는 기여의 기능이 있습니다. 셋째는 위로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룹이며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위로의 기능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시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이 기능을 해야 합니다. 

*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위로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모습이며 주님의 일입니다. 

수잔 폴리스 슈츠는 ‘친구란’이란 글에서 “친구는 네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주는 사람, 친구는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사람, 친구는 즐거울 때 찾아오는 사람, 친구는 괴로울 때 찾아오는 사람, 친구는 항상 너를 격려해주는 사람, 친구는 너와 경쟁하지 않는 사람, 친구는 너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위로해 주는 사람, 친구는 그가 없이는 자기 자신이 완전할 수 없는 또 다른 너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나 외로울 때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유대인의 이야기에 ‘세 친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어느 사람을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이 사람은 혼자 왕궁에 가기가 두려워서 세 친구와 함께 갔습니다. 한 친구는 출발하자마자 조금 후에 무서워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친구는 멀리서 왕궁이 보이자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하며 떠났습니다. 마지막 한 친구는 왕궁 안에까지 같이 들어가 주었습니다. 첫째 친구는 돈이라는 친구입니다. 돈은 언제나 제일 먼저 떠나갑니다. 둘째 친구는 가족이라는 친구입니다. 얼마는 함께 가지만 영원히 함께 가지는 못합니다. 셋째 친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가십니다. 영원한 위로자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8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설명한 다음에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를 알고 서로 위로하라고 합니다. 위로하다는 말은 ‘파라칼레이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곁에 불러 놓는다는 뜻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내 옆에 앉아 있어”라는 말만 해도 위로가 될 것입니다. 가장 위로가 되고 든든할 것입니다. 영어로 위로하다는 말은 ‘comfort’라고 합니다. ‘com’이란 말은 함께 라는 뜻입니다. ‘fort’는 힘이란 뜻입니다. 위로란 함께 힘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힘을 나누어주니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베토벤은 참 사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년에는 귀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습니다. 한 번은 친구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슬픔과 충격 속에서 친구를 방문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친구에게는 도저히 말로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토벤은 방에 있는 피아노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30분간 감동적인 연주를 하였습니다. 베토벤의 연주는 어떤 사람의 방문보다 더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로 위로하라, 말을 할 수 없을 때는 눈물로 하라, 눈물로 할 수 없을 때는 마음으로 하라.” 사람들은 마음으로 알아듣고 위로를 받습니다. 

결론 

독일의 헬메 하이네의 ‘세 친구’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수탉 프란츠와 생쥐 조니와 돼지 발데마르는 어려운 일을 늘 함께 하는 진짜 친구입니다. 언제나 셋은 함께 있습니다. 어디든 셋은 함께 갑니다. 무엇이든 셋은 함께 합니다. 밤이 되자 헤어지기 싫어서 잠을 함께 자기로 하지만, 서로의 다른 습관 때문에 너무 불편하였습니다. 결국 각자 자기 잠자리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 친구는 꿈속에서 다시 만납니다. 꿈속에서도 만나는 친구가 진짜 친구랍니다. 그런데 꿈에까지 나타나서 가위 누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는 함께 갇힐 수 있는 자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갈 수 있는 자입니다. 힘을 나누어주는 자입니다. 이런 친구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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