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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을 살리는 말씀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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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리는 말씀 (마 5:13~16)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는데 그만큼 말에는 위력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에도 위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위력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여성은 누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남자는 누가 자기를 얼마나 인정하는가를 말해줄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왜 아버지의 축복에 왜 그렇게 목을 맸느냐. 이 세상에 자기를 축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축복의 말에 효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의 형 에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갈구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에서의 불행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더라도 자식에게 아버지의 역할은 중요한 것이고 특별히 아버지의 축복의 말의 위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의 대표적인 무실론 자였던 니체, 신이 죽었다는 말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니체의 아버지가 루터교의 목사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었는데 아들이 다섯 살 때 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아들 니체에게 아버지의 죽음과 하나님의 죽음은 같은 것으로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죽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자식을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인간이 겉으로는 심오한 이론과 원리와 진리를 말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 그의 동기는 굉장히 일상적이고 본래적이고 가까운 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게 뭐냐. 결국은 사랑 ․ 소속감 ․ 유대관계 ․ 가정 ․ 자신의 존재가치 그리고 신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가정교육을 중요시하고 가능한 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도록 노력을 하느냐. 

그것이 이다음에 바른 인생, 바른 사람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그게 반드시 결손가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지만 부모에게도 흠이 있고 결함이 있고 우리 모두가 다 결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의 가정, 얼마나 명문 가정입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그 축복을 받은 믿음의 가정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후에 민족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가정입니까. 그러나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미움과 시기가 있었어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해서 그를 애굽에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옷을 아버지에게 가져다가 들짐승이 그를 헤쳤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명문가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믿음의 가정에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그런 일이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도 이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완전한 현실, 불완전한 인간 나도 불완전하고 부모님도 자식도 배우자도 모든 것이 불완전한 환경에서 그럼에도 완전한 것을 바라고 꿈꾸고 그것을 지향하고 믿고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불완전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를 믿을 수 있도록 하고 믿음이 흠이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또 우리 연약한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질 것이냐 안 가질 것이냐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면 사랑할 필요도 없고 용서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돼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사랑의 중요함과 사랑의 소중함을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뭔가 인간의 삶을 그럼에도 온전하게 만드는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믿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에 그런 것이 없다면 사랑처럼 무의미하고 허무한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짐승들은 서로를 생존을 위해서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사랑은 본능보다도 위에 있는 것이고 생존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의 됨됨이를 냉철하게 깨달았을 때 사랑처럼 불가사의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그렇게 사랑을 필요로 하고 왜 그렇게 사랑을 말할까. 인간의 현실만을 봤을 때는 사랑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인간보다 더 위에 있는 어떤 존재를 전제해야 사랑이라는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나이가 중년이고-보기와는 달리- 제 앞모습을 봤을 때는 젊다고 생각하는데 뒷모습을 거울로 보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뒤를 안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중년이 되고 아버님은 벌써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님은 연로하시고 또 주변에 제 스승이 되 줄 수 있는 분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어리고 부족한데 내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해 줄 수 있는 분이 과연 누가 있을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저를 불러주시는 이름이 그것이 저의 정체성이고 아이덴티티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종이라고 불러주시면 저는 주의 종이고 예수님이 저를 양이라고 부르시면 저는 주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의롭다고 하시면 저는 의로운 것이고 만일 예수님이 저를 불의하다고 하시면 저는 불의한 것입니다. 주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 그것이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제 자신이 뭐라고 느끼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저를 뭐라고 불러주시느냐 그것이 저의 아이덴티티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또 바른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것이 습관이 돼버리고 왜 그 일을 시작했는지 잊어버립니다. 왜 그 일을 하는지 잊어버립니다. 이제는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되는지,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로 가는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늘 깨달아야 되는데 그것은 거울이 있어야 내 자신을 보는 것처럼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말해줄 수 있는 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 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위에 있는 분이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그 역할을 하셨지만 나이가 들면 니고데모의 질문처럼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이제는 그의 인생을 새롭게 할 만한 원동력, 가능성, 이런 것을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없고 세상에서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결국은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 그것을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의도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하면 짠맛을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짠맛을 잃어버릴 위험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라는 말에는 익숙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 훌륭한 학생이 되라, 좋은 아버지가 되라, 좋은 목사가 되라, 이런 식으로 무엇이 되라는 말에는 익숙합니다. 무엇이 되라는 말은 아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지향하라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희망사항이고 명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서술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수년전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니까 그분이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느냐면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 중에는 믿음이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성령 충만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별의별 사람, 죄인, 별의별 사람이 다 섞여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포하셨다.’ 이렇게 지적하던데 이건 그야말로 긍정적인 사고에 부합하는 해석이고 맞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청중에게 ‘너희는 죄인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알고 계셨지요. 그러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실지언정 너는 죄인이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낮추지 않으셨고 좋은 말씀으로 늘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엿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해 주셨어요.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저는 아직 자격이 없구만요. 저는 아직 거기 해당되지 않는구만요. 남들은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아직 아니군요.’ 이렇게 말씀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는 것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고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 아니고, 나는 자격이 없고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건 겸손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진실도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겸손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냐? 예수님이 우리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주님의 말씀이 옳소이다. ‘아멘’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아멘은 그저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중간에 집어넣는 말이 아니에요. 아멘이라는 말은 ‘옳소’라는 말입니다. ‘옳소, 옳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건 긍정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반대하고 저항하고 불평하고 시위하고 대적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그런 사람들 천지입니다. 모든 곳에 머리에 띠를 띠고 플래카드를 들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아니요, 반대, 결사반대, 결사반대할 게 따로 있지 모든 일에 골프장 건설 결사반대, 아파트 건설 결사반대, 결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말하는 것인지. 

그 말은 죽음을 각오했다는 말인데 무슨 아파트 짓는 것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말고 합니까. 그럴만한 대상을 가지고 결사라는 말을 써야지요. 우리 민족은 툭하면 결사반대, 자폭하라, 아니 도대체 자폭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나 알고 아무개 사장은 자폭하라 이런 식으로 얼마나 우리의 언어가 과격하고 감정이 과격한지 모릅니다. 도대체 ‘옳습니다!’라고 긍정하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아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학생들 마음속에는 그건 당신 뜻이고. 당신 생각이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떤 것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 자기의 의견, 이런 것을 먼저 주장하고 마치 그것이 이 창의력인 것처럼, 마치 그것이 어떤 창의적인 교육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육은 먼저 받아들이고 배우고 흉내 내면서 시작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처음부터 무슨 창의적입니까. 

처음에는 다 모방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미술관에 가 보세요. 미술 전공하는 학생들이 명화들을 그대로 베껴서 그립니다.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미술도 그렇다면 정신적인 것은 오죽하겠습니까. 일단 배워야죠.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배워야죠. 흉내라도 내야 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흉내라도 내야 됩니다. 아니면 그 말투라도 흉내 내야 됩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언어를 배우든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든 영력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습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지만 나의 반응, 나의 입장,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가장 선한 반응이 바로 아멘입니다. 옳습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대로 이루어 지리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아멘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마리아가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그게 참으로 믿음의 사람의 바른 응답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말씀이 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시면 나는 의로운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시면 나는 주의 종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면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빛을 더 잘 비출까를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우리의 어두움에 대하여 염려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자기 생각에 충만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때 아직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었어요. 자식이 없는 남자에게 열국의 아버지라는 이름부터 먼저 지어주셨어요. 그리고 그대로 됐습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이 진짜 열국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시면 그 사람은 정말로 열국의 아버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제가 인터넷 교양프로에서 다음과 같은 프로를 봤어요. 그리스 아테네에 가면 나이지리아에서 끌려온 윤락 여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국제 인신매매의 희생자들입니다.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팔려온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더 이상 이 짓 안해도 되니 나가라고 말해도 나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향 나이지리아에서 누군가가 이들을 저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풀려나려면 고향에서 누군가가 와서 그 저주를 풀어주면 그때 이들이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뭔가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언어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이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 우리가 누구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라고 축복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야, 이 못난 놈아, 이런 말 하지 말고 ‘너는 정말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 너는 정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너는 정말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다.’ 이렇게 축복해주는 것이 그냥 말이 아니고 그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명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가장 파워가 있는 축복은 예수님의 축복입니다. 모든 저주를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은 예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든 자들에게도 죄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축복하신 것입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고통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그 말씀대로 됩니다. 인생을 바꾸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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