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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존엄성 (창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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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존엄성 (창 1:26~31)


창세기 1:26-31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는 다른 피조물을 만드실 때와는 달랐습니다. 빛으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도 되니라”의 반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은 그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만드실 때는 빠른 템포로 진행되던 창조의 과정이 갑자기 느려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회의가 시작됩니다. 26절에 나온 복수형의 ‘우리’를 기독교 전통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을 합니다. 다른 설을 주장하시던 분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사숙고 가운데 인간은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어떤 일을 진행하다가 정말 중요한 공정이나 순서를 앞두고 있을 때는 잠시 일을 멈추고 회의에 들어가는 법입니다. 우주 창조의 하이라이트는 인간의 창조입니다. 거침없이 달려오던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이 대작업을 앞두고 잠시 깊은 숙고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만드시되 아무 생각 없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자녀를 낳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깊은 숙고 끝에 어느 때, 어떤 방법으로, 무슨 일을 하도록 다 계획하셔서 만드셨습니다. 최초의 인류를 만드실 때의 하나님의 모습은 그 이후 모든 인간을 어떻게 대하실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예정”(엡1:4-5) 하셨다고 찬양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마치 연극무대에 올려진 인물이나 소품들과 같다할 것입니다. 무대 위에 올려진 것이라면 그가 주인공이 되었던 엑스트라가 되었던 심지어 소소한 무대 소품이 되었던 다 연출자의 의도와 계획에 의해서 그 자리에 놓여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사치스러울 정도로 넘치거나 주목한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쓸모없는 것들은 없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수천 억 수조 개가 넘는 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별들 하나하나는 소중하고 다 하나님의 계획 하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멀리서 보면 수많은 집단 중에 하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별 하나 하나는 그 크기가 엄청나 태양의 수백 수만 배에 이르는 것들이 있고, 그 안에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과 신비들을 담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수 있는 별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별처럼 크고 위대하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탄생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가볍게 보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가 고아로 태어났다 해도, 내가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해도, 내가 어린 나이에 생명을 다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색 가운데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별과 같이 위대한 존재들입니다. 자신의 빛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창조를 앞두고 깊이 숙고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망설임입니다. 사람의 창조가 창조의 하이라이트라고 하였지만 실제 인간의 탄생이 창조의 면류관이 될지 창조의 십자가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젊은 부부의 모습과 같습니다. 출산을 앞둔 엄마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기쁨도 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기쁨이 될지 아니면 평생 짐이 될지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민 끝에 우리 인생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런 고민은 정당했습니까? 네 정당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아름다운 우주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고 악의 길로만 갔습니다. 오죽 했으면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탄식을 하셨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 표준새번역에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고 번역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자녀들을 낳고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고 어긋난 길로만 가서 속상해 하는 부모의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독일의 목회자 헬무트 틸리케는 이 구절을 강해하며 그 제목을 “하나님의 모험”이라고 붙였습니다. 인간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에게도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모험을 감행하여 스스로를 인간에게 얽매여 놓고, 또한 자신이 인간에 의해 멸시당하고, 거부당하고, 무시당하고, 욕을 당할 것을 각오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성숙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런 희생이 없이 어떻게 한 존재의 탄생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불안한 미래에 대한 답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돌아오게 할 것이고 사랑이 그 존재를 바꿀 것이고 사랑이 그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가게 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의 확신이 있었기에 잠깐의 사색 후에 망설임 없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는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첫출발에 대한 이야기에우리가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안에 인간을 향한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숙고 끝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기로 계획하고 창조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에서 언뜻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우상숭배가 떠올랐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두 번째 계명이 하나님을 우상이나 아무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스라엘의 주된 싸움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세력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지금도 극단적인 종파에서는 예배당에 십자가도 세우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우상이 될까 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자기 형상화를 그렇게 싫어하셨던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허락하신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4-5) 하나님이 우상 숭배를 금지하신 이유 중에는 너희가 우상보다 더 대단한 존재인데 나무나 돌로 만든 것에 절하느냐는 책망의 의미도 있다 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일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살아 계실 때 법학자들 모임에 가서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법률가들은 모든 법 앞에 인간은 존엄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인간이 존엄하다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존엄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진화론자들은 기꺼해야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에 가장 진화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보다 더 우수한 종이, 그것이 만약 외계인이라면 그날로 인간의 존엄성은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까? 휴머니스트들은 단지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동어 반복만 되풀이 할 뿐입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도 천사들도 인간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안에 신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등하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어린 아이라고 해서 또 무언가 부족한 인간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흑인이라고 해서 차별하고 백인이라고 해서 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민족은 더 위대 하다하고 가난한 민족은 멸시해도 된다 할 수 없습니다. 부자니까 더 법과 권력의 존중을 받아야 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보면 왕의 대사나 왕의 칙사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모독하는 것은 왕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위치에 있던지 왕의 칙사 앞에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인간 평등권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누가 누구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살인을 금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9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살인은 곧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고 신성모독입니다.

기독교가 자살을 금지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생명이니까 내가 아무렇게 해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죽이는 것도 신성모독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머리카락도 함부로 자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생명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문화명령과 다스림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떤 분들은 인간의 신체적 외양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합니다. 인간이 가진 이성적인 능력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선미를 추구하는 영적인 능력이 하나님이 형상이라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신체적인 외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하나님을 마치 인간처럼 묘사하는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신 이유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은 다스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그 다스리는 직분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고 그 표시로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고대의 풍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이 먼 땅을 정복하면 그 곳에 신하를 파견하여 다스립니다. 신하는 파견될 때 왕의 형상을 가지고 갑니다. 왕이 그 지역을 다스린다는 상징입니다. 지금도 지역 관청에 가면 대통령의 사진을 걸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상징을 인간 안에 새겨 넣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28절에서도 이 축복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다른 생물들에게도 주신 축복이지만 인간에게는 여기에 더하여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지구라는 포도원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그 관리를 맡기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문화명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단어는 마치 포도주 틀에서 포도를 짓이기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던 당시는 기원전 1000년이 넘었던 때입니다. 그때는 인간의 존재가 자연에 비하여 미약하던 시기였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신처럼 섬기며 살았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야 했으며, 크고 오래된 나무를 살아 있는 정령처럼 모셨습니다. 바다에는 바다 괴물이 살며 폭풍우를 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세계상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1장 28절의 문화명령은 무지와 미신으로부터의 인간해방 선언이었습니다.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다스려야 될 대상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축복입니다. 우리 안에는 정복자의 DNA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다스림이라는 왕의 피가 흐릅니다. 본질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고방식과 자기 삶을 바라보는 스케일이 달라집니다. 왕에게는 왕이 기품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라 말씀합니다. 왕의 기품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도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사60:22). 우리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우리는 이 사실도 모른 채 영향력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스림의 의미에 대해서 좀더 묵상을 해보아야 합니다. 서구 문명의 기원은 실상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문화의 발달은 자연에 대한 미신으로부터 탈피할 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친 문명의 발달로 자연에 대한 난개발과 환경오염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1967년 <사이언스> 지에 발표한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라는 논문에서 생태학의 위기를 기독교의 책임이라고 몰아세웠던 바가 있습니다.

다스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내세우고 폭력으로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것이 다스림입니까? 다스림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2-45절입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성경에서 다스리는 것은 섬기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라고 인간들에게 문화명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본질은 섬김입니다. 자연과 그 안에 거하는 생물들이 잘 살도록 보살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10:11)고 말씀하십니다. 자연과 인간의 차이가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보다 더 큽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조차도 한낱 먼지만도 못한 인간을 위하여 낮아지시고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셨는데 인간이 자연을 위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지난 번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천성산의 환경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지율 스님이란 분이 천성산에 서식하고 있는 도룡뇽을 보호하기 위해 100일 가까이 단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로 말미암은 공사 지연이 수조원이라고 비판하며 도룡뇽이 무어가 중요하다고 그런 극한 투쟁을 하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반드시 비난 받을 일입니까? 

인간이 도룡뇽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이 꼭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와 인간과 도룡뇽의 차이가 무엇이 더 큽니까? 구지 경중을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자연에 대한 관리자로서의 우리 마음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발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그 개발로 인하여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과 생태계에 혼란이 온다면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이상으로 지구촌이 시끄럽습니다. 아마존과 같은 밀림이 개발로 인해 매년 남한 땅만큼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빙산이 녹아 내려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태평양의 투발루라는 국가는 3분의 1 이상이 잠겼고 얼마 가지 않아 온 국토가 물에 다 잠기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 주범은 자동차와 공장에서 내뿜는 이산화탄소 때문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지구 온도가 3-5도 상승할 것이고 지구 생물의 50%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이라면 자연을 다스려야 하는 청지기로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의 탐욕이 자연을 망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다스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산업화와 경제개발이라는 이유로 환경문제에는 등한시 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석유소비량은 전세계 4위입니다. 지구 평균온도가 0.7도 상승할 때 한반도 주변 온도는 1.5도나 상승했습니다. 

잦은 물난리와 또 반대로 가뭄으로 인한 대형 산불의 피해는 이제는 흔한 소식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는 대형 태풍(모라꼿)이 대만을 강타하더니(700여명), 이번에는 필리핀을 강타했습니다(사망 288명, 이재민 300만명). 그 원인인 지구온난화로 추정하는데 이는 잘못 다스리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반발이라 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4대강 개발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냥 물이 잘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연과 인간에게 이로운 것인지 아니면 콘크리트로 막고 강바닥을 파헤쳐야 자연과 인간을 위한 것인지 심각히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경제 논리로 4대강을 개발하는 것은 무모합니다. 자연은 한번 파괴되면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 걸립니다. 이 자연은 우리만이 사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들의 몫이기도 합니다. 저는 사실 청계천도 마음에 안 듭니다. 

물론 고가도로가 있던 때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강바닥을 콘크리트로 덮어 놓아 마치 인공 하천처럼 보입니다. 또 그 물을 흘러 보내기 위해 한강 물을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해서 매일 10만 톤 씩 끌어오려 탄소소비량만 늘리고 있을 뿐입니다. 에어콘처럼 도심은 시원하지만 바깥으로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여 지구 온도를 높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제는 경제와 개발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질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살 것이 없어 걱정입니까? 오히려 탐욕이 문제이고 나누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환경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 삶의 질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간이 무분별한 탐욕을 그치고 자연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이컵을 마음대로 쓰면 편리합니다. 그러나 그 종이컵 때문에 매년 수만 그루의 나무가 죽어가야 합니다. 우리나라 연간 종이컵 소비량이 120억 개라고 합니다. 

이것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흡수하기 위해서는 4700만 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일전에 제가 존경하는 은사님이 “쓸데없이 자동차를 끌고 다는 것은 죄야!”했을 때 뜨끔했습니다. 나의 편리함 때문에 지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죄를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림의 권리를 받은 인간들이 이 자연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고후4:4).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존귀함을 회복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다스림과 권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지구라는 생명체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의 책임 있는 다스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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