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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롬 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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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롬 10:9~15)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5)

인생의 삶의 모습은 발걸음과 같습니다. 나의 삶의 발걸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나는 어떤 발걸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발걸음을 아름다운 발걸음과 그렇지 못한 발걸음이 있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발걸음은 죄악을 따라가고 그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입니다. 성경은 이런 발걸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6:16-19)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사59:7)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잠5:6)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헛된 삶의 발걸음을 바꾸어서 값진 발걸음이 되게 하십니다. 
  
모세는 살인자로 애굽의 왕실에서 도망쳐 미디안 광야에서 제사장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나타나셔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신을 벗게 하셨습니다.(출3:4)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살아왔던 더럽고 때 묻고 지치고 피곤하며 무의미성 속에 허무한 삶을 걸어온 발걸음의 신을 벗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발걸음의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학정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의 발걸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값진 발걸음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52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아름다운 발걸음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아주시는 발걸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값지게 여기시는 발걸음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임을 말씀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특별한 인물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이라고 칭합니다. 복된 소식의 인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을 하나님은 아름다운 발걸음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고 나누는 발걸음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발이 값진 발걸음의 아름다운 발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발걸음이 하나님께서 아름답다고 하시는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은 왜 아름다운 발걸음입니까? 가장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 왜 아름다운 발걸음입니까? 

사람을 구원하는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 분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먼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다시사신 부활과 승천하심과 다시 오심에 대하여 전한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이 가능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중에서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유대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마음으로 믿고 인격을 가진 말로 고백할 때에)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새 번역 9-13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믿음을 가지고 게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인격적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에 해당되는 헬라어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시는 분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주’는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이라는 것과 그분이 우리의 죽음과 생명을 결정하시는 분으로 믿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그러므로 예수님을 전해야 하고 믿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에 관한 소식복된 소식을 듣도록 전해야 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구원의 발걸음이고 이 발걸음은 하나님께서 귀하고 아름답게 보아주시고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천국 문 입구에서 천국에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이 주어진답니다. 그 두 질문은 매우 당혹스러운 질문이기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어떻게 여기 올 수 있었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그런데 혼자만 오셨습니까?’ 첫 번째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게 되겠지요. ‘누구누구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에 당혹해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혼자만 오셨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아니, 제가 전도한 사람이 있어요. 곧 뒤따라 올 거예요.’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전해주는 발걸음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존귀하고 아름다운  발걸음의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친절과 관심과 애정과 물질을 나누어 주는 그 이상입니다.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 되어야 참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은 특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생명을 나누어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은 생명을 나누어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속죄를 위하여 흘려주신 그 생명의 피가 우리를 살렸습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 사랑의 생명이 있습니다. 
  
제 친구 목사님이 보내준 시집 가운데서 ‘사랑의 씨앗’이란 시를 읽어드립니다.
 
그대 사는 지구에 날라 온/ 작은 씨 하나/ 그것은 사랑의 씨앗입니다./ 까맣고 단단한 씨는/ 우리들의 미래입니다./ 부디 파종을 잊지 마시고/ 그 대 마음에 심으십시오./ 싹이 나리이다./ 자라 나리이다./ 그리고 그대는 어느 날/ 다 자란 나무의 수관과/ 가득 달린 황금의 열매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리이다./ 
  
사랑을 허락해 주신 불멸의 신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리이다./ 사랑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 운명을 이해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그대여/ 사랑의 씨를 받으십시오./ 사랑의 씨를 심으십시오./ 사랑의 씨를 가구십시오./      
  
주님의 사랑은 생명과 능력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이 해야 할 사랑의 방법이고 사랑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전파는 생명을 전해주는 참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소식인 복음을 전해주는 발걸음은 존귀하고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이 사랑을 나누어 주는 발걸음으로 복음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온전함을 이루어 가는 곳에 있는 성장과 완성의 용어입니다. 서로 감사하는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관계는 성장하는 관계성과 완벽한 관계성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사하는 관계성은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성숙해져가는 믿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성숙한 믿음으로 완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감사는 성숙함자체이기도 합니다. 감사를 깨닫고 있다는 것은 성숙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일곱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 권사님 댁에 놀러 갔답니다. 이웃집 권사님은 아이에게 사과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나 인사도 없이 덥석 받았습니다. 집사님이신 어머니는 책망하듯이 엄하게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아! 어른이 사과를 줄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이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다가 눈을 깜빡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껍질을 벗겨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좋은 소식이신 예수님을 알고 깨닫고 믿게 해주셔서 구원받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돌보아주시고 추수된 곡식으로 일용한 양식을 삼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크게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부족함 없이 살아가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감사하는 신앙은 우리로 하나님의 풍요의 세계 속에서 뛰어놀도록 하게 해 줍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절) 그런데 사람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은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확신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감사할 수 있는 데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 되심을 감격하며 감사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감사를 표현할 뿐 아니라, 그 감사를 행위로 들어냅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인류구원의 좋은 소식이신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감사하는 발걸음입니다.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구원해주신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아름다운 발걸음으로 감사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발걸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내가 걸어가는 발걸음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값지게 여기시는 발걸음의 인생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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