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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리다굼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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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굼 (막 5:35~43)


‘달리다굼’이란 말은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다. 오늘 말씀은 유대교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예수님께서 살리신 내용이다. 

유대교의 회당장이라면 그 지역의 유력한 인사로서 회당을 관리하고 회당 예배를 주관하는 지도자를 가리킨다. 또한 당시에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하고 경계하는 적대적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살 난 자기 딸이 갑작스런 병으로 인해 위독해졌을 때 그는 신분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 도움을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컷기에 용기를 내어 예수께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간절히 부탁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들으시고 함께 동행하셨다. 그 길에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주셨다. 

오늘 본문은 그 여인과의 대화 중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그 집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소식은 아버지인 야이로의 마음을 크게 실망시키는 것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가셔서 그의 딸을 살려 주셨다.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 그 집은 완전히 초상집이 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소란을 그치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39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속으로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막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혈루증 여인을 고치실 정도의 능력은 있는 분으로 알았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킨 기적이 복음서에 3번 기록되어 있다. 눅7장에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 요11장에서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신 것,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사건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향하여 말씀으로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는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하셨고, 나사로에게는 ‘나오라!’하셨고, 이 소녀에게는 ‘일어나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고, 크게 놀라고 놀랐고 소문은 일순간에 그 주변 지역에 전파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 인생과 신앙여정에 3가지 중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1.우리 인생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된다.

막 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 말은 당신의 딸이 죽었기 때문에 어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장례만 치루면 되지 예수님을 더 이상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부고를 전해준 사람들은 예수님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았기에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연약함과 한계,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 이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눈물 흘리고 통곡하는 것이다. ‘죽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대왕도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억만장자라 할지라도 죽음을 돈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늘 곁에 함께 지내던 가족이나 친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큰 슬픔에 빠지게 된다. 

나이든 어른이 돌아가시면 곡소리가 조용한 걸 보게 된다. 오랫 동안 정을 나누며 살았기에 그 슬픔이 덜한 것이다. 그러나 어린 딸이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해보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두고 두고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러나 어느날 갑작스럽게 닥아온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붙잡히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에게 내어주고 슬픔에 잠기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미리 유서를 써 놓기도 하고, 보험도 들어 놓고, 남은 식구들의 생계 대책을 세워 놓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에 대한 대책은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연약함이다.

2.두려움 없는 믿음만이 환난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딸의 부고를 들은 회당장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실망, 낙심, 원망의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즉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막 5: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환난의 날에 큰 도움이 되심을 믿기 바란다. 약한 믿음으로는 이 험난한 세상의 여정을 감당할 수 없다. 재앙이 예수 믿는 사람을 피해가지 않는다. 그래서 성도들이 매일 같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기도의 제목은, ‘주여 내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사 26:3-4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부정적인 생각은 버려야 한다. 회당장의 집 사람들은 딸의 죽음을 알리면서 예수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을 위하는 말 같지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무지요 모독이다. 안된다는 생각은 자기 생각이다. 

또한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죽은 아이를 향하여 ‘잔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집 식구들은 비웃었다. 그들 역시 무지요 믿음 없는 말이었다. 믿음의 역사는 믿는 만큼 나타난다.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믿음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다. 

마귀는 성도에게 3가지 마음을 주는데, 의심, 근심, 낙심의 마음을 준다. 항상 회의적 상태에 머물게 하면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여러분! 악한 세상에 사는 동안 겪을 수 많은 일들을 극복하고 안전하게 여행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믿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의심 없는 믿음,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초기 교회 성도들 -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믿었다.

렘 17: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렘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17:8, Will be strong like a tree planter near water.)

3.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 온통 통곡소리로 아수라장과 같았다. 그때 예수께서 진정시키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러자 그 집안 사람들이 속으로 예수님을 비웃었다. 비웃는 사람들은 예수님 함께 못한다.

그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시고 시신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며, ‘달리다굼’하고 외치셨다. 그러자 그 아이가 벌떡 일어나 이리 저리 걷기 시작했다. 

막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전능자의 음성이 들리자 죽었던 아이가 생명을 얻어 살아난 것이다.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살리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 나오면 살아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살아난다. 야이로 가정의 슬픔을 거두시고 기쁨을 부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죽음보다 더 강하신 분, 사망의 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분이신 것이다.

요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마르다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내셨다. 그 가정에도 기쁨을 부어 주셨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 놀라운 사건은 그 사건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재림 때 성도의 부활을 알리는 예표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천지진동하는 날, 주의 성도들을 불러모으시고, 그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며, 기쁘고 행복한 만남이 이뤄질 것이다.

성도의 인생 여정이 항상 순탄하지는 않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때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느 날엔가 죽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주, 부활의 주를 믿는 성도들에겐 죽음이 우리를 위협할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성도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 5: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세상의 장례식장에 곡소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서 위협하며 우리를 슬픔과 절망 속에 머물게 하려 한다. 그러나 성도는 죽음에 매여 있지 않다. 이 땅에 살지만 또한 하늘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의 소리, 세상의 소리를 들으면 낙심하게 될 것이다. 주의 음성을 들으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가 위기적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확실한 믿음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참된 믿음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죽어 있는 나의 모습을 잘 살피라. 예배, 기도, 말씀, 봉사, 섬김이 죽어 있지는 않는가? 그것을 살리라. 나의 강건한 믿음을 위해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계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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