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 (행 24:1~9)

  • 잡초 잡초
  • 329
  • 0

첨부 1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 (행 24:1~9)


이번에 외국에 가보니까 금융 위기 속에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을 당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업하는 분들의 약 30%가 견디질 못하고 국내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마음이 무거워 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존을 위해 같은 업종끼리 상처를 주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발이 빈번해지고 이로 인해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여파로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싶지만, 나라도 신용하지 못하고 기업도 신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를 꺼려서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워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2000년 초, 우리 국민들의 고소 고발 건수가 약 60만 건에 달했습니다. 가히 고소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같은 해에 일본에서는 몇 건의 고소 고발 사건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단 1만 2천 건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인구가 우리의 3배인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고소 고발 사건이 일본보다 150배나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의 고소 고발 사건은 대게 폭행 사건이 주를 이룹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52%, 즉 60만 건 중에 30만 건 이상이 사기 사건입니다. 더욱이 그 가운데 무고 사건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남을 모함하기 위해 고소를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국민의 거짓말 수준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통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고소당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더둘로라는 이름의 변사를 고용하여 그를 고발한 것입니다. 변사란 요즘으로 말하면, 변호사까지 사서 바울을 죽일려고 작심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지금 고소인이 누구입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아닙니까? 그는 원래 성전에 있어야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기능과 본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사랴까지 와서 로마 총독 앞에 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이사랴 재판정에서의 바울에 대한 고소와 응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닷새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더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우리는 지난주에 모두가 말리는 예루살렘을 바울이 가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는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매듭짓고 그 결과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고 또한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참으로 오랜만에(사실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무고하게 고발함으로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21:30) 심문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심문을 받는 중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을 밝혀 최악의 고문을 면합니다.(22:25-29)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전23장에 보면 바울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발생합니다.(23:12-14) 로마의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보호하고자 로마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하게 되고(23:31-35) 여기서 약 2년여의 옥중 생활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고소자들이 도착한 후 가이사랴에서 진행된 바울의 재판 장면을 보도합니다. 여기 그들은 바울을 애매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이 고소 내용은 역설적으로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바울에 대한 첫째 고소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자, 우선 여기 이 구절에 사용된 ‘전염병’, ‘소요케 하는 자’라는 표현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바울을 일컬어 염병같은 자라 했습니다. 염병이 무슨 병입니까? 보통 장티프스를 염병이라 하는데 원어로 보면 염병, 로이모스(λοιμ?s)는 흑사병을 가리킵니다. 이 병에 감염되기만 하면 치명적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형편없는 사람을 욕할 때 쓰이기도 하는 말이지요. '염병 할 놈.' 더둘로가 바울에게 '염병 같은 자'라고 말한 뜻은 바울이 세상에 해로운 사상을, 위험한 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야기인데 몇 가지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 몇 가지 의미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염병 걸리면 변합니다. 염병 걸렸는데 안 걸린 사람과 같겠습니까? 아니지요. '복음은 염병과도 같다' 좀 느낌은 이상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13:33에서 '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루 속에 누룩을 넣으면 어찌됩니까? 시간이 지나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지금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나쁜 의미로 '염병 같은 자'라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아주 좋은 말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받으면 반드시 변합니다. 

예수 제대로 믿게 되면 반드시 변합니다. 안 변하는 것이 문제이지 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면 반드시 변해야 합니다. 반드시 변합니다. 성격도 변합니다. 생각도 변합니다.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지고 취미도 바뀝니다. 인간관계도 달라지고 세계관, 가치관도 변합니다.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는 사람. 말씀을 바로 듣지 않는데 믿어지겠어요?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데 변하겠어요? 말씀이 들어가면 반드시 변합니다. 병균이 들어가면 병 걸리지요. 복음은 염병 같아 했지요. 병은 변화를 반드시 일으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반드시 전파됩니다. 옛말에 “소금 먹은 녀석 물 안 먹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은혜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있나요? 내가 이렇게 즐거운데 어떻게 말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본질은 이렇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그 주변 일대가 다 전염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소금이 들어가면 주변을 변화시킵니다. 썩지 않게 만들고 맛이 회복되게 만듭니다. 

2. 본문 5절에 보면 또 하나의 고소의 제목이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나사렛이란 말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당시 예수의 제자들 및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말로서 그들을 무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표현이 나사렛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가 거짓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민심을 소란케 함으로 로마 당국의 골치를 썩이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도 21장에서 바울을 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애굽의 거짓 선지자로 오인한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면 로마에 의하여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중죄인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바울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이번에 우리나라가 선교를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때 어떻게 선교를 할지 모르던 바로 80년 초에 영적 불모지인 나라에 들어가서 이젠 30년이란 긴 세월 오직 한 우물만 판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한 신학교에서 내 인생의 참 뜨거운 보람을 느끼며 강의를 했습니다. 

그들은 전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한 48명의 학생이 2년 동안 방학도 없이 아침 5시에 일어나 새벽 예배를 드리고 6시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그리고 이어서 공장에서 6시간 일하고 다시 식사 후에 6시 30분부터 우리 시간으로 10시30분까지 그렇게 신학 훈련을 남의 눈을 피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학사 일정도 엄격해서 졸업할 때까지 성경을 40독을 해야하고 최소한 암송구절 200개 이상 되야 하며 새벽을 몇 번 빠지면 퇴학을 시키는 살인적인 스케줄로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했어요. 저 정도로 강하게 하는데 과연 남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몇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을 한답니다. 그러나 거의가 이를 악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수업시간에 물어봅니다. 뭐, 이 길은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지 주님 앞에 내가 쓰임을 받는 그 기쁨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공항까지 바래다주는 선배의 모습 속에서 자기의 나라도 아닌 이방 땅에 한 생명, 한 생명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그 모습 앞에 작은 거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는 실상은 어떠한지요? 정말 우리는 우리의 대화, 우리의 교제,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그리스도 그 분을 높이고 그 분을 자랑하고 그 분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사실 우리가 행전 11장에서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안디옥에서 처음 성도들은 불신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임을 불신자들조차 알아 본 것입니다.그런데 왜 우리는 오늘 이런 증거를 남기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실은 우리는 대부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뿐 우리의 실제 대화와 교제의 중심은 여전히 <나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그것이 오늘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닌지요?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선배 바울이 추구한 삶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모습이 아닌지요. 

바울의 유명한 갈2:20의 신앙 고백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3. 바울 사도에 대한 세 번째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였습니다. 

바울이 이런 고소를 당한 연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비난의 배경을 바울이 체포되던 행22:28-30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바울)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이 곧 닫히더라” 진실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출신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아마도 이방인의 뜰을 거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 나온 것으로 넘겨 집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 법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가거나 이들의 출입을 도와주는 유대인들은 돌에 맞아 죽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실수를 범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가까이서 서성거린 것은 위험한 일이었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물론 여기서부터 조금은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에베소에서 자신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에 까지 동행한 에베소 출신의 이방인 신자 드로비모에게 바울은 가능한 한 이 거룩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의 사건을 잘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런데 이렇게 이방인과 나란히 성내를 다정히 걷는 바울의 모습이 유대인들의 레이다 망에 포착되는 순간 갑작스런 예기치 않은 사태로 발전해 간 것입니다. 결국 진실은 한 영혼에 대한 바울의 애틋한 사랑과 친절이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바울은 가아사랴 감옥에서 2년, 다시 로마의 감옥에서 2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 사건을 후회한 흔적은 없습니다. 왜냐구요? 그의 존재의 목적, 생존의 이유가 영혼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혼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람-그것이 바로 바울이었고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드로비모를 언급한 기사를 그의 마지막 서신 디모데 후서4:20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그것은 드로비모에 대한 바울 사도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기후 좋은 항구도시 밀레도에서 병든 그가 요양을 하도록 선처한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바울의 도전은 그가 만난 한 영혼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마음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터치 153 새생명 축제를 위해 이제 우리 교회는 프로그램이 아닌, 전략도 아닌 정말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여기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오늘, 저는 거룩한 전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으셨다면, 우리 역시 한 영혼을 구하는 일에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영혼구원은 구령의 열정과 기도의 눈물과 찾아가는 섬김의 수액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이번 터치 153 새생명 축제는 우리가 기도하는 태신자들에게도 큰 축복이 되겠지만 이미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더 큰 도전과 생명력을 선사하는 집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과 영혼에 복음의 불을 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거듭나고 구원받은 자라면, 다른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이 불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곧 복음 전파로 발산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님들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영혼 구원사역을 위해서 애쓰는 분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그 속에 복음 전파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모습이 뜨겁고 감격에 차 있을 때 불신자들의 마음도 뜨겁게 달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믿지 않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생명 얻는 일이 체질화 되는 축복을 입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가장 원하시는 체질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얻고, 구원받은 자가 다시 한 생명을 찾는 이러한 은혜의 역사는 우리교회가 이 땅에 존속하는 한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지상(至上)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그토록 바라시는 소원은 죄인 된 우리가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 6:40).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예수님과 만나야 하고, 터치 153 새생명 축제도 바로 이러한 거룩한 만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촉점이 있는 곳에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접촉이 없는 곳에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접촉이 있어야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태신자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도 그 일을 위해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새벽을 열어야합니다. 누가복음 21:38에는 아주 감동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early each morning"이란 말은 "날마다 아침 일찍이"라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은 날마다 이른 새벽에 성전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습관을 알고 이른 새벽에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선교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집니다." 

우리 역시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볼 줄 믿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장벽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개인에게 말씀하시기보다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새벽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새벽은 응답의 현장입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여리고가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홍해 역시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절망과 한숨과 탄식으로 버무려졌던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가을에 기도합시다! 지난 여름 영적으로 나태해졌다면 다시 영적인 허리띠를 졸라매고 깨어 기도합시다! 이제 내일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라는 주제로 영적 진군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 모두 주 앞에 나와 엎드리십시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고, 기도는 무한한 하나님의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것이고, 기도는 세상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새벽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맛보는 축복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