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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완성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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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완성 (요일 4:7~12)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 하나님에 대한 소송

신문에서 본 사진 한 장이 이번 주 내내 제 마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사진 왼편에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를 덮친 지진으로 인해 폐허로 변한 건물의 잔해가 널려 있었고, 오른편에는 기도 방석을 깔고 엎드려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한 사내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신에게 대체 어떤 기도를 올리고 있던 것일까요? 견딜 수 없는 재난을 겪은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마련입니다. 그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신의 사랑은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고루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지만,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재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십니다. 

폐허 앞에 엎드린 그 사내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 세계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는 단연 ‘인샬라’입니다. ‘신이 원한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라 해도 그게 신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은 또 ‘마 알라이쉬’라는 말도 자주 사용합니다. ‘괜찮아, 무얼 그러느냐’는 뜻입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 데도 그들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긴박한 현실 가운데서도 정신적으로 쪼들리지 않는 여유가 느껴집니다.

네브라스카 주의 상원의원인 어니 체임버스가 제기한 하나님에 대한 고소 사건이 기각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는 고소장에서 “하나님은 지구상의 수백만 인류에 대한 수백만 건의 파괴, 테러, 죽음의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법적으로 규탄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의 담당판사인 팔론 포크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고소 통지서 집행을 할 수 없다”면서 “소장에 명시된 피고인에 대한 효과적인 법 집행이 불가능하므로 이 고소를 기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참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오죽 답답하면 그랬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현실의 밑바닥에는 ‘고통’이 있다면서, 그 고통의 원인은 ‘無明’ 즉 어리석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천 길 사람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인간은 스스로 문제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동물이라면 닥쳐오는 현실을 그저 수용하거나 회피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이기에 우리는 어떤 사건의 뜻을 묻게 됩니다. 

그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예기치 않았던 재난이 고통스러운 것은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보응을 받는다는 길흉화복의 인과관계가 깨질 때 우리는 아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신가?”를 묻게 됩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신가?

이 물음은 매우 도발적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입니다. 이 확신이 제거된다면 우리의 믿음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믿고 싶어 하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현실이 암담하고 어두울수록 우리는 믿음과 회의의 경계선을 넘나듭니다. 인생이 화창한 날에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의 여지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고통의 극한에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처해 있던 상황이 그에게 그런 확신을 줄만큼 여유로웠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이 서신이 기록될 당시 기독교인들의 상황은 매우 힘겨웠습니다. 로마 제국 도처에서 기독교인들은 의혹어린 눈길을 받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도 점차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신으로 숭상되던 로마 제국 안에서 제국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이 편안했을 리 만무입니다. 박해를 받아 추방당하는 이들도 생기고, 죽임을 당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는 와해될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어찌 그렇게 침묵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국어사전은 ‘사랑’을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 ‘남녀가 서로 애틋이 그리는 일’, ‘동정하여 친절히 대하고 너그럽게 베푸는 마음’, ‘육정적이거나 감각적이 아닌 동정․긍휼․구원․행복의 실현을 지향하는 정념’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아낌, 그리움, 친절함, 행복을 지향하는 마음 등이 속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끼시고, 그리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친절하게 대하시고, 우리의 복지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고백은 참담한 현실 앞에서 늘 그 뜻을 잃고 맙니다. 과연 우리가 참담한 고통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요한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모든 고통이나 불편을 없애주는 사랑이 아니라, 그 고통이나 불편 속에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 이웃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사랑입니다. 오랫동안 굶주렸으면서도 모처럼 얻은 음식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이들을 봅니다. 홍수와 지진으로 자기 집도 엉망이 되었는데, 더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을 돌보는 이들을 봅니다.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 속에 뛰어드는 이들을 봅니다. 

어느 과학자(로처드 도킨스)는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자기 보존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타적인 행위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자기를 희생시켜서라도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유전자의 작동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과학자는 생명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개체들과 협력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가족이 아닌 전혀 낯모르는 이들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사람들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인간을 영적인 존재,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위기의 순간에도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자기 안전과 보존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우리의 본능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 속에 사랑의 숨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위기 속에서도 그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아멘, 아멘입니다. 

• 자기희생적 사랑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야말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궁극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우리에게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넌지시 일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하나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은 다 풍성한 생명을 누렸습니다. 

늘 무심하게 보아오던 들꽃 한 송이, 새 한 마리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들고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병에 시달리는 이들은 회복되었고, 악한 영에게 짓눌렸던 이들은 해방되었고, 자기 모멸감에 떨던 이들조차 자기 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과 조롱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비폭력적 사랑,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초석적 사랑으로 인해 인류는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랑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시인 최승호는 <오징어3>라는 시에서 “그 오징어 부부는/사랑한다고 말하면서/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런 게 아닌지요? 자식을, 연인을, 성도들을 사랑한다면서 사실은 그들의 목을 조르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자녀들에게 자기의 욕망을 투사하는 부모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욕구를 상대에게 투사하면 할수록 생명은 위축되거나 일그러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님의 사랑도 강제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위축시키는 것들을 조용히 제거해주는 사랑입니다.

호주의 북부 퀸즈랜드 지역을 흐르는 강물은 염분이 많다고 합니다. 밀물 때마다 바닷물이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강의 양안에는 맹그로브 나무가 우거져 있는 데, 두툼한 초록빛 잎들이 무성한 이 나무에는 오렌지색 잎들도 더러 눈에 띕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을 낙엽이 아닙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사실 맹그로브 나무는 민물에서 자라는 수종입니다. 이 나무는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염분이 많은 물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뭔가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맹그로브 나무가 개발한 생존 전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두껍고 촘촘한 머리칼 모양의 뿌리입니다. 그 뿌리는 일종의 정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물이 수관으로 유입되기 전에 대부분의 염분을 제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는 염분을 제거하기 위해 맹그로브 나무가 발전시킨 두 번째 생존 전략은 유입된 소금기를 받아들이도록 예비된 나뭇잎입니다. 

그 잎들은 오래지 않아 오렌지색으로 바뀌고, 결국은 나무에서 강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잎들은 자기를 희생시킴으로 나무 전체를 살게 합니다. 물론 의식적으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자연의 적응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오렌지 빛 잎사귀들을 ‘희생엽’(sacrificial leaves)이라고 부릅니다.(John Shelby Spong, <>, HarperOne, 2009, pp.68-9) 

전체 생명을 풍성하기 위해 희생되는 나뭇잎과 같은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감동적인 이야기도 자칫 하면 악용될 소지도 있습니다. 힘 있는 이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미화시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 이야기가 인간 세상에도 적용되려면 누군가를 희생시키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희생하는 사랑을 가르치셨지, 희생시키는 사랑을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이를 오렌지빛 나뭇잎으로 만드는 것은 폭력입니다. 하지만 힘을 가진 사람 자신이 오렌지빛 나뭇잎이 되려 할 때 역사는 진보합니다. 

• 사랑의 확장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쿵’에 대해 인간의 ‘더쿵’이 더해질 때 ‘쿵-더쿵’ 하는 생명의 리듬이 생기는 법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진부해진 시대이지만 이 말처럼 가슴 뛰게 하는 말도 없습니다. 세상은 약자들을 넘어뜨려 ‘아무 것도 아닌 자nothing’처럼 물화시키고, 버젓이 존재하는 사람들을 ‘비존재non-being’의 범주에 떠밀고 있습니다(구미정). 

하지만 여전히 사랑이 가능함을 몸으로 증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낯모르는 이의 고통을 보고 자기 장기의 일부를 나눠주는 이들을 봅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인 데도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기쁨에 사는 이들을 봅니다. 그들은 어쩌면 바늘귀를 통과한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착한 노래가 착한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 가객 홍순관 씨의 말이 떠오릅니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봅니다.
좁을 줄 알았던 바늘구멍은 좁은 곳이 아니라
보지 못하였던 신비였습니다.
너무 넓어, 보이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봅니다.
바늘구멍은 좁은 곳이 아니라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닫힌 문이었습니다.
들어가려는 사람에겐 
낙타 수천 마리가 쉽게 드나드는 자유의 문이었습니다.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에 나오는 <낙타를 따라> 중에서

돈이나 선물이 아니라 자기를 주는 진정한 사랑은 우리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줍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욕심 때문에 사랑을 포기한 이들에게 하늘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바늘귀가 됩니다.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요일3:17)

주님은 당신 자신을 잊었기에 모든 사람을 품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싹트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성품의 씨앗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가을에 우리 마음이 사랑을 향해 열리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이들은 세상에 가득 찬 고통과 재난의 이유를 잘 해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재난당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을 북돋기 위해 일어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이들 말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일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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