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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벅지 관절은 부러졌지만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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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 관절은 부러졌지만 (창 32:22~32)


10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해마다 시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감사에는, 3가지 차원의 감사가 있습니다. 1차원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입니다(if). “만약~”라면, 조건에 따른 감사이지요. 2차원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Because) 하는 감사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하는 감사이지요. 저 사람은 어떤데 나는 그 사람과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바리새인의 감사도). 3차원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환경과 조건, 어려움, 고통을 넘어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 창세기 32, 22이하 말씀에서 우리는, 生涯 그 어느 순간에도 맛보지 못했던 주체할 수 없는 큰 기쁨, 감사, 새로운 삶에 대한 벅찬 꿈으로 가득찬 한 주인공을 봅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입니다. 20년 전 고향을 떠나 800km나 떨어져 있는 하란(밧단아람), 외삼촌 집으로 허둥지둥 도망갔던 야곱이, 2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일어났던 ‘얍복 나루 사건’이야기입니다.

▶ 우리가 이 사건을 보면서, 유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야곱의 얍복 나루 사건 전후의 삶이 어떻게 비교가 되는지, 얼마나 대조적인 차이가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얍복 나루 사건 전, 20년 전까지의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신을 편애하는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형 ‘에서’를 속여 장자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던 인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아버지 이삭까지도 속인 인물입니다. 속여 취한 축복에 대한 결과가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의 행동을 좋게 보셨겠습니까? 그럴 리 만무하지요.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에서가 받을 장자의 복을 야곱이 속여 취하자, 아버지 이삭은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감정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심히 크게 떨었다”합니다(창 27, 33; 삼중적인 강조법으로 묘사). 이유가 뭘까요? 태중에서부터 형과 싸우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족장 계승권을 주시겠다 하신 뜻이, 장자 에서를 더 사랑하던 이삭의 의지와는 반대로,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빌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에, 이삭은, 무릎을 꿇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삭은, 비록 자신이 속아서 야곱을 축복하긴 했지만, 야곱에게 족장 계승권이 주어진다는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는 에서에게 분명하게 말하지요.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며 야곱에게 실수로 빈 자신의 축복을 거두어들이지 않습니다(창 27,33하). 그러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장자권, 족장 계승권이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비록 야곱에게 족장 계승권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야곱처럼 인간적인 방법으로 속여 취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거기서 사건이 터지고 만 것입니다. ‘에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합니다(창 27, 41). 

하나님의 뜻이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로 거기서부터, 이삭의 온 집안은 살기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머니와 아버지의 권유로, 야곱은 하란(밧단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갑니다. 그것이 20년 전 야곱의 모습입니다(결과가, 逃亡者가 된 거지요).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린 야곱, 사기꾼, 아버지와 형을 속여 취한 축복 때문에, 형 에서와 풀 수 없는 원수가 되어버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우하고 계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때, 야곱을 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깁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義로와서? 아닙니다. 모르긴 해도,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중 90% 아니, 99%는 모두 다, 야곱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며칠 전, 어느 80연세 되신, 명예 권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쌈지 돈(얼만지도 모르겠습니다) 담긴 봉투하나를 부끄럽게 내놓으시면서, “목사님, 이 돈 부끄럽지만 어려운 아이들 위해서 써 주세요” 하시기에, 이 사무엘 목사님 오시라 해서, 필리핀 톤도 쓰레기장 어려운 가정 자녀들 교육 위해서 쓰면 좋겠다며, 전해 드렸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급하게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면서 마시면서 간간이 말씀하시는 권사님의 고백이었습니다.

어릴 때, 소학교에 1년 다니시다가, 못 다니셨다고 합니다. 어른들이,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어머니를 구박하시기에, 학교를 그만 두신 분입니다. 하나님 은혜로, 국문을 깨우쳐 성경을 읽으신답니다. 권사님이 그러셔요. 결혼하여 일찍 혼자되셔서, 가정을 꾸리시느라, 안 해본 장사 없었답니다. 얼마나 고생하셨겠습니까? 먹고 살려고, 자식 키우려고, 장사하면서 “목사님, 저울 눈 많이 속였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늘 회개하며, 삽니다.” 우리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20년 전, ‘야곱’이 아버지 축복을 속여 취하여 목적은 달성했지만, 平安이 없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 인생이 더 꼬이지 않았습니까? 결국, 도망자가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대다수 인생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야곱 같은 연약한 허물 많은 우리 인생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도망자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때, 깊은 밤, 꿈 가운데 야곱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祖父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시면서 그에게 복을 언약하셨습니다(창 28, 13). 

네가 누워 있는 땅을(루스 광야, 벧엘)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 13하-15).

상상도 못할 복을 약속 받았습니다. 웬 떡, 입니까? 자격이 있어서 받은 약속이 아닙니다. 사기꾼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총입니다. 그 때, 야곱이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 17). 이것이 어찌 야곱만의 고백입니까? 우리 모두의 고백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다 하나님의 은총 위에 서 있습니다.

▶ 그런 언약의 말씀을 듣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간 야곱의 삶, 20년 처가살이가 어떠했습니까? 외삼촌의 두 딸(레아, 라헬)을 아내로 삼습니다. 그들의 두 몸종도 아내로 얻습니다. 많은 아들들과 딸을 얻습니다. 14년을 수일 같이 일했지만, 외삼촌으로부터 늘 속기만 했습니다. 외삼촌 집에서 생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외삼촌은 늘 속이고, 약속위반을 밥먹듯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엄청난 재산과 부를 얻게 하셨습니다. 巨富가 됩니다. 외삼촌이 경쟁자로 여길 만큼, 부자가 됩니다. 드디어, 외삼촌도 야곱과 동업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그래서 야곱을 계속 붙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20년 처가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가족들과 모의해서, 외삼촌 모르게 모은 모든 재산을 이끌고 야반도주합니다. 또 야비한 인간적인 방법, 쓴 거지요. 야곱이 얻은 가족들, 재물,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입니다. 야곱의 힘, 아닙니다. 능력, 아닙니다. 그의 잔꾀로 이룬 부가, 아닙니다. 야곱은, 결정적인 순간에 늘, 자신의 방식을 택합니다. 야반도주합니다. 또 도망자 신세가 된 셈이지요. 이게, 하나님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살아가는 인생의 방식이었습니다. 

외삼촌 집, 도망에는 성공했지만 도무지 평안은 없습니다. 미래의 안전보장도 없습니다. 20년 전, 형 ‘에서’의 분노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야곱의 나이는, 이미 90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형님과의 갈등이 나이 90이 넘도록, 자기 인생을 발목 잡는 위기요인이 될 줄 알았겠습니까?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연약한 인생, 그것이 야곱 인생의 현주소였던 거지요. 우리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형 에서가, 400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 야곱은 “심히 두려워하고 떱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그 인생의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 거지요. 400인의 병사는, 대단한 군사력입니다(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보낸, 병사가 318명이지 않았습니까?). 위기에 직면하자, 야곱은 두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하나는, 가족들과 수하의 종들과 가산을 양분해서 피해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큰 위기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께 평생 처음으로, 진솔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주께서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비천하다, 보잘 것 없다, 무가치하다),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자신의 처량하던 인생을 진솔하게 스스로도 평가합니다),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 에서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 32, 10-12). 하나님께서 야곱의 그 기도 들으셨을까요? 안 들으셨을까요? 안 들으실 리가 없지요.

기도를 마친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하여 예물(민하)를 준비합니다. 암염소가 이백, 숫염소가 이십, 암양이 이백, 숫양이 이십, 젖 나는 낙타 삼십, 그 새끼들, 암소가 사십, 황소가 열, 암나귀 이십, 그 새끼 나귀 열이었습니다(550마리가 넘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선물을 줄 정도면, 야곱의 재산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러고는, 밤에 모두 얍복 나루를 건넌 후에, 야곱은 홀로 뒤쳐져 남습니다. 그 많은 재물,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수많은 종들이, 지금 자기 앞에 닥친 인생의 위기 앞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 때,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방법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형 에서의 손으로부터 건져주심 뿐입니다. 야곱은,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붙잡고 떼쓰다시피 간구합니다.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당한 이 절체절명의 위기사건을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처리방식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보십시오.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야곱, 결코 실패한 사람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성공이 자기 인생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위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沙上樓閣이 될 형편입니다. 

▶ 그 때,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이었을까요? 야곱이 걱정하던 처자식과 그가 모은, 많은 재산의 보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 앞에서의 야곱의 존재변화입니다.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언약의 말씀의 계승자가 되고, 그 말씀을 성취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데 있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야곱을 향하신 뜻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을까요? 그것은, 90평생 살아오면서, 여태껏 그가 버리지 못했던 못된 기질, 잔꾀, 거짓됨, 도둑질 심보, 20년 전 형 ‘에서’를 속여서라도 축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던 그 인간적인 方式, 그것을 깨끗하게 포기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온전하게 믿고 응답하는 그 삶, 그 믿음 아니겠습니까?

▶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거짓됨이 있어도 참아 주십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큰 복도 주십니다. 경제적으로 꽤 괜찮게 살게도 해 주십니다. 적당한 名聲도 주십니다. 신실치 못한 우리를 향하신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시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때가 되면, 우리를 얍복 나루 씨름판으로 불러들이셔서, 우리의 못된 기질을 꺾어 놓으시고 맙니다. 문제는, 너무 늦으면 안 좋다는 겁니다. 

야곱은, 그의 인생 90이 넘어서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아 있을 때, 자기 정체를 숨긴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다가와 격렬한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걸지 않고는 싸울 수 없는 싸움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숨기신 체,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다는 것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영문도 모르는 싸움에 휘말린 겁니다. 지금 그러고 있을 형편도 아닌데 말입니다. 싸움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그러나 바로 거기에, 우리 인생의 答이 있습니다. 

▶ 야곱과 밤새 씨름하던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할 것 같자, 그만 그의 환도뼈를 내리쳐버렸습니다(위골되었습니다). 그래도 동틀 녘까지 놓지 않고 축복하여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 때 야곱에게, 중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몰라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야곱, 네가 진정 너의 정체성을 알고 있느냐?”는 거지요. “야곱이니이다.”(발꿈치 잡았다, 뒷북치는 사람, 사기꾼, 불의로 남의 뒤를 치는 사람). 우리가 예수 믿지만, 내 인생의 환도뼈, 야곱의 기질이, 부러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중, 10%나 될까요?

자기 이름을 야곱이라 하는 대답하는 그에게, 말씀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 사실은,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면서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한 것이지요. 

그 밤에 야곱은, 하나님께 맞아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하나님 만난 痕迹). 환도뼈가 부러지는 장애인은 되었지만 새로운 존재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代를 잇는 족장의 반열에 오르면서, 언약의 계승자가 됩니다. 내 인생의 환도뼈는 부러졌습니까? …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은, 기뻤습니다. 형님을 만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님 앞에서, 일곱 번 절하면서 나아갈 만큼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90평생 첨, 참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기쁨 가득했습니다. 감사, 감격뿐이었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진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내 환도뼈도 부러지면 복이 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 사람에게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아멘.

[기도]
허물 많고 신실치 못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살았습니다. 도망자의 인생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큰 복을 주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직도 풀지 못한 인생의 무거운 짐, 주님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의 환도뼈도 부러트려 주셔서, 언약의 계승자로, 축복의 통로로 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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