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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 위를 걷는 사람들 (마 14: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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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걷는 사람들 (마 14:22~32) 
 

1.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1990년대 초반, 당시 詩人이자 隨筆家로 이름을 날리던 신달자 숙명여대 교수가 <물 위를 걷는 여자>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평생 詩만 쓰며 살고 싶다”고 했던 신달자 교수가 소설을 쓴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 교수의 <백치애인, 1988>이라는 隨筆集과 그 뒤 이어 나온 <백치슬픔, 1989>이라는 詩集이 독자들로부터 아주 큰 반응을 일으켰었는데, 이 책들을 읽은 한 여자가 自殺하려고 하다가 ‘그 책을 쓴 작가라면 나의 이야기를 털어 놓고 떠날 수 있겠다’ 싶어 신 교수를 찾아가서 상담을 한 것이 소설을 쓴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이 소설은 사연 많은 한 독자의 기구한 삶을 바탕으로 써졌습니다. 

이렇게 實話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出刊되자마자, 독자들의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또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물 위를 걷는 여자>가 큰 반응을 얻은 데에는 당시의 話頭였던 “일 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고, 또 그동안 다루어지지 않던 “패션”이라고 하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송난희’는 모성애와 가족 사랑이 결핍된 가운데 너무나 가난하게 자랐고, 성공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서 유학을 다녀와서는 유명한 패션디자이너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반면에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민희’는 남부러울 것 없는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밝고 긍정적이며 화사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친구와 자신을 바라보면서 주인공 난희는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과연 일로써 성공한 여자의 삶이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능력을 포기하고 가정의 행복을 얻은 여자의 삶이 행복한 것인가?’ ‘여자의 행복은 자기 일에서 성공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잘 하는 것인가?’ 이러한 주인공의 갈등의 결론은 작가를 찾았던 실제 주인공처럼 일에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가정적인 행복도 누리지 못하여 결국 자살을 결심했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즉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물 위의 인생”이란 성공이라는 물 위에 떠 있기는 하나, 그것이 금방 물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성공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패션디자이너 송난희를 “물 위의 여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둘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했다는 점입니다. 즉 자신의 일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끊임없이 회의를 느끼면서 갈등하고, 그러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친구를 바라보면서 질투하고, 그러다가 그 친구의 남편을 유혹하려고 한 바로 그 갈등이 그녀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물”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어렵습니까? 모처럼 문학평론가 노릇을 하려니 저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 소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물 위를 걷는 사람들이 등장하고요, 그 물 위에서 갈등하고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2. 성경에서 물 위를 걸은 사람들 

1)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벳세다 광야에서 壯丁 만도 5 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이신 예수님은 서둘러서 그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날이 어두워져 밤이 깊어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대로 기적적인 능력으로 만든 빵과 생선을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요6:15). 그렇게 무리들을 서둘러 돌려보내신 후, 이번에는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갈릴리 바다 반대편, 즉 ‘게네사렛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무리들과 제자들을 보내신 후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서 혼자 가까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23). 

그런데, 예수님께서 홀로 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게네사렛을 향하여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는데요. 공교롭게도 맞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이 아직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밤 사경, 즉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날이 아직 어두워지기 전에 배를 타고 떠났는데, 그 시간까지 바다 한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0 시간 이상을 바다 한 가운데서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이 게네사렛을 향하여 노를 저을 때 만약 뒤편에서 바람이 불었다면 더 빨리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6장 48절이 “바람이 거스르므로”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면에서 바람이 불었고, 거기다가 아주 강한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아직도 바다 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죽자고 노를 저어도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풍랑은 점점 거세어져 기진맥진 지쳐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힘들어 하는 제자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바다 한 가운데, 풍랑이 거세어 노를 젓느라고 정신도 못 차리고 있던 상황, 그때 난데없이 어떤 사람들이 바다 위를 걸어서 자신들 곁에 와서 선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어느 날 창밖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자기 집이 아파트 10층이었다는 사실에 놀라 까무러친 사람의 이야기와도 같은 분위기입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죠. 그 순간 머리털이 삐쭉 일어서면서 풍랑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그들은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엄마야!”하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죠(26). 

그런데 유령처럼 바다 위를 걸어서 자신들 곁으로 다가온 이는 유령이나 귀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겁에 질린 제자들을 향하여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다 한 가운데서 고생하는 자기들에게 오셨고,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거센 맞바람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생하는 것에 대해 “안심하라”는 의미이며, 귀신인 줄 알고 놀라는 것에 대해 “안심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오늘도 삶의 풍랑을 만나 인생의 노를 어렵게 어렵게 젓고 있는 여러분들 곁으로도 우리 주님께서 다가가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노를 저어도 목표에 도달하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은 상황, 게다가 인생의 맞바람은 왜 그렇게 쉴 새 없이 불어오는지 …, 그러는 가운데 힘도 줄어들고 의욕도 식어갈 때, 바로 그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다가가셔서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상황이 성도의 특권인 줄로 믿으십니까? 삶의 바다라도 다 같은 바다가 아닙니다. 인생 항해라고 똑 같은 항해인 줄 아십니까? 

인생에 부는 바람이라고 다 같은 바람이 아닙니다. 다 같이 나이 들어가고 힘도 빠지지만, 그들과 성도 여러분들은 분명하고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주님께서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시간이 언제이든지 여러분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그 누구라도 도저히 올 수 없는 바다 한 가운데, 안전한 육지나 뭍의 마을조차도 인적이 모두 끊어진 시간, 그런 장소와 시간에도 주님이 제자들을 찾으셨듯이 오늘 여러분의 삶의 현장으로 주님이 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물 위를 걸은 베드로

오늘 본문은 여기서 끝이 나도 정말 은혜롭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 베드로의 요청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28절, “베드로가 …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풍랑이 이는 밤바다를 걸어오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안 베드로는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드로는 독특하고 충동적입니다. 이미 정신 줄이 빠질 대로 빠진 상황에서 뜬금없이 “예수님, 저도 바다 위를 걷고 싶어요”라고 아이처럼 말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말 한 마디로 인해 죽을 것 같던 사망의 바다는 갑자기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 이런 베드로 때문에 오늘 본문이 제게는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은 고생의 현장도 우리 주님이 오시면 즐겁게 장난칠 수 있는 은혜와 사랑의 놀이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멘” 아닙니까? 

베드로의 이 당황스러운 요청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 자신에게로 “오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야 베드로의 말이 너무나 돌발적이고 마치 잠에 취한 듯 꿈을 꾸는 듯 불가능해 보여도, 예수님께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오라” 하신 것입니다. 이 “오라”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벌떡 일어서서 바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순간, 그대로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야 할 베드로는 마치 마른 땅 위에 내려 선 것처럼 물 위에 그대로 섰습니다. 

그러고서는 바람과 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부분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 걸을 수 없습니다. 왜요? 여러분 스스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글이 인터넷에 올라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동물원에를 갔었습니다. 그곳에 한 거대한 코끼리가 높이가 1미터도 채 안 되는 울타리 안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코끼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한쪽 다리가 아주 가는 쇠사슬로 묶여져 있었고, 그 쇠사슬은 작은 말뚝에 매여져 있었습니다. 코끼리를 지키는 사람이 그토록 약한 쇠사슬로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를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스꽝스럽고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실로 묶어서 성냥개비와 같은 말뚝에 매어 놓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코끼리가 약간만 힘을 써도 가는 쇠사슬을 쉽게 끊을 수 있었을 것이고, 또 말뚝도 쉽게 뽑혔을 것이며, 1 미터도 안 되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코끼리 사육사에게 이처럼 작은 쇠사슬과 말뚝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코끼리가 쇠사슬과 말뚝과 울타리를 넘어서서 얼마든지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힘없는 아기처럼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이유는, 코끼리 스스로 결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쇠사슬을 끊고 말뚝을 뽑아버리고 도망갈 수 있지만, 코끼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그런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코끼리는 쇠사슬과 말뚝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끼리는 자신이 할 수 없다고 하는 스스로의 믿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적고 연약한 쇠사슬과 말뚝이 코끼리의 자유를 빼앗은 것처럼, 성도들 역시 半信半疑 하는 적고 연약한 믿음으로 인하여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인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주님이 걸으신 것처럼,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처럼, 여러분들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걷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요? 여러분이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의 다음 모습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순종함으로서 바다 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믿음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끝이 났습니다.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가던 베드로는 강한 바람이 자신의 머리와 옷자락을 날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키만큼이나 높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큰 파도로 일렁이는 바다를 보았습니다. “오라” 하신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바로 그 순간, 그는 그만 바다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 물 위, 바람과 파도, 그리고 자신이 인간에 불과하다는 생각 …. 베드로의 마음과 생각이 이러한 것들로 향하자 그는 물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바다에 빠지고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처럼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세상과 사람과 권세와 돈과,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하여 변치 않는 사랑과 믿음을 가진 성도는 물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 건져주셨습니다(31).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더 의식하자, 그는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약속과 증거보다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더 신뢰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 일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약하고 병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걷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그럴 기대나 소망마저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아예 배까지 포기하고 떠나려고 합니다. 자살을 결심한 <물 위를 걷는 여자>처럼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에게 믿고 의지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나 여건이 갖추어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과 그의 능력에 대한 완전한 확신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오늘날에도 물 위를 걷는 성도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아들” 때문에 걸을 수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베드로를 건져주신 주님은 베드로와 함께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처음 보았을 때는 유령이라며 두려워 떨었던 그들이었지만,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좇아 물 위를 걷다가 물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런 그를 주님께서 건져주시는 것을 보면서 주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시자 기쁨으로 영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토록 강하게 몰아치던 바람과 파도가 즉시 잠잠해졌습니다(32).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연을 주관하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걸어서 건너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로 막는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3). 이것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이 이 능력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곁에 계신 이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3. 그가 걸으시면 나도 걸으리!

말씀을 맺겠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물 위를 걷는 여자>라는 소설을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주인공은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다가 결국 물속으로 빠져들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자신과 자신의 현실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고 갈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믿음 없음이 그녀를 물속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인간 최초로 물 위를 걷다가 물속에 빠져 들었던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그가 물에 빠진 이유도 믿음 없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➊ 첫째, 어느 누구도 감히 손 쓸 수 없는 바다 한 가운데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바람에 끌려가는 상황일지라도, 주님은 그곳으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오실 수 없는, 주님이 접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수 없는 장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주님이 오실 수 없는 시간도 없습니다. 

➋ 둘째로, 주님이 오시면, 여러분을 제 마음대로 가지고 놀던 삶의 현실이 도리어 여러분의 신앙 놀이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주님으로 인하여 風浪이는 밤바다는 기적의 현장이 되고, 성도의 놀이터가 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축제의 자리가 됩니다. 

➌ 마지막으로, 주님이 오시면, 인생의 바다만 잔잔해 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그 바다 위를 걷는 창조주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예수님과 그 말씀과 그 능력을 믿는 바로 그 믿음 위에 서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와, 그리고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면서 능력을 베푸시는 것을 의심하면, 바로 그것 때문에 여러분도 베드로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 세상과 삶의 물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주님과 그 능력을 믿으면 물 위가 기적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살아계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든지 기적의 현장으로 이끄실 수 있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역사가 있는 성도, 기적이 있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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