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 (롬 6:3~11)

  • 잡초 잡초
  • 317
  • 0

첨부 1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 (롬 6:3~11)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입교와 세례>예식을 거행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일 년에 두 차례 입교, 세례예식을 거행합니다. 따라서 최근 여섯 달 사이에 처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신 분들은 대부분 처음 입교,세례예식에 참석하시리라 생각해서 오늘은 본문 말씀을 따라 세례예식에 관한 설명을 설교의 주된 내용으로 삼고자 합니다. 

세례예식과 다음 주일에 거행할 성찬예식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의 두 가지 거룩한 예식입니다. 입교는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 옛날 부모님이 하셨던 신앙고백을 자기의 것으로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세례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기에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다시 세례를 베풀지 않고 문답을 거쳐 입교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첫 절 제일 앞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 했듯이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세례는 하나님의 아들과 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다 얻는 것이나 같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소유하는 일입니다. 영생을 누리는 일입니다. 영원히 복된 삶을 사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은 너무나 좋은 선택과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을 하신 겁니다. 진학할 학교를 선택하고 몸담을 직장을 선택하며 일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선택하신 그 어느 결정보다도 더 중요한 최고의 선택, 최선의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런데 본문 3절과 4절 앞부분을 다시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씌어있습니다. 얼핏 보면 좋다 말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합한다고 해서 좋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그와 같이 죽어 장사된다는 뜻인가? 

이게 웬 말인가?” 하는 의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좋은 죽음이고 꼭 죽어야 할 죽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살기 위한 죽음이고 아무나 자기 뜻대로 죽을 수 있는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 4-5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아멘.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은 곧 그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영광스러운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됨을 뜻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구원과 영원히 복된 삶에로 선택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례 받기로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시기로 만세 전부터 결정하셔서 오늘 세례 받기에 이르신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고 영광된 일입니까? 그래서 축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세례 받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합하여 구원을 받고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무슨 믿음의 고백입니까? 본문 6절 첫머리에 “우리가 알거니와” 했고 8절 끝에 “믿노니” 했으며 9절 끝에 다시 “앎이로라” 했습니다. 이 6-9절 사이의 내용을 분명히 알고 믿으며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6-9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자 이제 세례를 받기 위해 우리가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래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그 죄 값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하지 않고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시고 또 그를 다시 살려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세례예식은 잠간이지만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물속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 수장되어 사라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다른 죽음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죄의 빚을 청산하는 죽음이며, 정죄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죽음입니다. 여러분 빚지고 빚쟁이에게 시달려본 적 있으십니까? 그 고통과 공포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돈을 빌릴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제 돈 없이도 일단 갖고 싶은 것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빚 갚을 날이 가까워올수록 초조, 불안, 근심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빚 독촉이 시작되면 밥맛도 없고 잠도 잘 안 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보는 빚쟁이들은 무시무시합니다. 빚 제때 못 갚으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순식간에 죽어도 못 갚을 빚으로 변합니다. 집이나 갖고 있는 재산까지 다 빼앗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장기까지 내놓으라고 압박을 받습니다. 

폭력배들에게 끌려가서 얻어맞고 무서운 공갈협박과 고문을 받아야 합니다. 신체에 상해까지 당합니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아내나 딸까지 잡혀가 험한 일을 당하거나 빼앗기게도 됩니다. 못 할 짓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견딜 수가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빚을 많이 진 사람이라도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빚은 소멸됩니다. 죽은 사람에게 빚을 갚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빚 말고 다른 빚이 있습니다. 죄 값입니다. 

죄는 지을 때는 달콤하고 짜릿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죄의 값은 오직 사망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죄 값으로 죽는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를 않습니다. 영원한 형벌과 고통이라는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단번에 완전히 해방시키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만이 죽을 수 있는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그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와 합함으로써 그 죄와 죽음에 대해 영원히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는 죽음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0-11절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본문 마지막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한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임을 확신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입은 이답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세례 받는 것은 세례 받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죄가 지배하는 세상의 삶을 향해 죽어 수장되었음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상징적 행위인 동시에 죄와 죄가 지배하는 세상의 삶을 향해 죽은 사람답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골로새서 3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세례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땅의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의 것을 향해서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위의 것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주와 함께 누릴 영광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