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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 (행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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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 (행 9:31)


‘조지 실버만’이라고 하는 분이 쓴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입소문을 만드는 100가지 방법>이란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어느 백화점에 한 중년 여인이 자동차 타이어를 낑낑 대면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곤 점원에게 이 타이어를 반품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점원은 당황했습니다. “이 타이어를 산 영수증이 있습니까? 영수증을 주시면 돈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영수증이 없다고 하면서 무조건 때를 쓰면서 이 타이어를 반품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지배인은 결정을 내립니다. 점원에게 지시합니다. 손님에게 타이어 값을 물어보고 반품해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타이어를 받고 29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 고객이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백화점은 타이어를 팔지 않았습니다. 타이어를 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때를 쓰는 손님에게 타이어를 반품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것이 잘 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백화점은 자기네가 팔지도 않은 물건도 반품해 준대.’ 이런 소문이 났습니다. ‘얼마나 좋은 백화점이냐?’ ‘얼마나 친절한 백화점이냐?’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입소문의 결과가 수백억의 광고효과를 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백화점이 그런 짓을 하나?’ 그러나 그것이 입소문을 타고 좋은 백화점으로 소문이 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백화점을 애용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고객을 어떻게 대하느냐? 또 그가 어떤 대접을 받고 나가느냐가 입소문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소문보다 더 효과적인 마케팅은 없다고 합니다. 장사하는 분들이나 사업하는 분들은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부흥도 굳이 말하자면 바로 입소문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가 어떤 소문을 내느냐?’ ‘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린 사람들이 나가서 어떤 소문을 내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안내위원도 친절해야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정말 누가보기에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친절한 모습으로, 경건한 모습으로 비춰질 때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 그 교회에 갔더니 너무 말씀도 좋고, 너무 친절하고, 그 교인들과 교제했더니 너무 행복하더라. 그 교회 나가면서 우리 가정도 행복을 되찾고, 내가 날마다 소망 가운데 산다.” 이러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 한 가지 한 가지가 바로 입소문을 타고 수많은 사람에게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성장학에서는 건강한 교회가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잘 자라는 아이들은 대게 건강합니다. 그러나 병든 아이들은 뭔가 성장에 장애를 가지게 됩니다. 키가 크지 않다거나, 밸런스를 잃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도 하나의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건강을 분석하는 학문을 교회병리학이라고 합니다. ‘피터 와그너’라는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치명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다. 9가지의 질병의 요인들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영신교회가 정말 질병을 이길 수 있는, 그리고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일반적인 특성을 보통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목회자입니다.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목회자가 있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목회자, 그 생각이 긍정적이고 교회성장의 가능성을 믿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헌신하는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그 목사의 지도력에 기꺼이 순종하는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목사가 열정적일지라도 교인들이 따라오지 않고 순종적이지 않으면 그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손바닥이 서로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철저하게 순종하는 성도들이 있을 때 성장은 가능해 집니다. 세 번째는 교회성장의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제직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때로는 더 많은 요인들이 필요합니다. 나가서 전도도 열심히 해야 하고, 양육도 열심히 해야 하고, 교회가 때로 시설이 부족해서 확장해야 할 때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헌금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가를 지불하는 제직들의 희생과 헌신이 교회성장을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창립 54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영신교회가 정말 건강한 교회, 날마다 소문나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9장 31절은 아주 짧은 구절이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의하면 성장하는 교회는 먼저 평안한 교회입니다. 바꿔 말하면 평안한 교회가 성장할 수 있습니다. 31절 말씀을 한 번 더 읽어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성장의 첫째 조건은 평안입니다. 평안을 잃어버린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는 그 성장의 에너지를 갈등하는데 소모하는데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데 진력을 다해야하는데 어떤 다른 일에 관심을 쏟아버린다면 공부에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장의 에너지를 갈등하는데 써버린다면 교회성장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많은 분쟁 가운데 휩싸인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어떤 요인 때문에 갈등하고 분열되고 마음 아파할 때 그 교인들은 전도할 틈이 없습니다. 전도해봐야 되지도 않습니다. 그저 서로 갈등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해버립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욕심이나 고집이 교회를 주장하려고 할 때 그 교회는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나 혈기나 감정이 앞장서게 될 때 그 교회는 평안을 상실하게 됩니다. 해서 교회가 평안한 길은 바로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느 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우리 한국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 가장 좋은 말이 무엇인가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가 ‘사랑’이란 말이었습니다. ‘사랑’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용납할 때 용서할 때 우린 진정한 평화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31절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그리하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그리하여’란 말은 앞의 본문을 받고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이라는 한 청년이 정말 지식이 많은 청년이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음성을 듣고 그가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바뀌어 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을 제일 미워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너무 너무 미워했습니다. 사울을 죽이고자 하고 사울을 핍박합니다.

  사울이 이제는 유대인들과 어울릴 수 없어서 기독교인들 쪽으로 넘어왔습니다. 교회를 나오려고 하니까 교회에서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사울이라는 친구가 얼마 전까지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인데 갑자기 저렇게 회심했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여기도 저기도 갈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 바로 교회에는 위대한 바나바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상담자’, ‘위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사울을 데려다가 교회의 사도들에게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이 사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말을 듣고 교회가 사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나바는 포용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로자였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교회에 많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어떤 분쟁이나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바나바가 가서 그 모든 것을 보증해 주고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이 바나바 같은 인물의 활약에 따라서 초대교회는 평안해졌고, 든든히 서 갔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나바를 가리켜서 오늘날의 ‘멘토’라고 말합니다. 새신자가 등록하면 그 사람을 잘 돌보아주고 그가 정착할 때까지 이런 ‘바나바’, ‘멘토’가 우리교회에도 많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 때 교회는 평안한 교회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가정이 늘 어두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가정에 들어오면 늘 화평이 없습니다. 이제 그는 큰 집에 살고, 돈도 많고, 좋은 차도 타고 있는데 집에만 들어오면 식구들끼리 서로 싸웁니다. 자식들도 서로 만나면 싸웁니다. 그러니 기쁨이 없습니다. 가정은 한탄했습니다. ‘자 우리가정은 무엇이 잘못되어서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는가?’ 그런데 자기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가난한 옆집을 보니 이 집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늘 웃음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고, 얼굴이 늘 밝습니다. ‘저 집과 우리 집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 어느 날 집주인을 만나서 물어봤습니다. “당신네하고 우리하고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기에 우리는 늘 만나면 싸움이 있고, 당신 집은 만나면 웃음이 있고 늘 행복합니까?”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댁에는 선한 사람들만 살고, 우리 집에는 죄인만 살아서 그렇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을 좀 해 주세요.” 그랬더니 다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선생님 댁에는 전부 똑똑한 사람들만 살아서 뭐 하나 잘못되면 누구 책임이냐를 놓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뭐 하나 잘못되더라도 다 내 잘못입니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화분을 내 놓았는데 막내아이가 뛰어가다가 그 화분을 차서 깨뜨렸습니다. 그럼 막내아이가 “제가 발로 찼어요. 죄송해요.”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와서 “아니야 내가 화분을 거기 놓은 게 잘못이지.” 그러면 아버지가 와서 “아니야 내가 어제 그걸 보고 치우려고 했는데 안 치웠어. 내 잘못이야.” 그러면 할아버지가 와서 “내가 애초에 시장가서 그 화분을 사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면서 다 자기 잘못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화평의 비결입니다.

  여러분!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의인처럼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비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짓는 것 중에 가장 큰 죄가 남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남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저 사람은 저래서 어떻고, 저 사람은 이래서 어떻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평화를 깨는 것입니다. 오리겐이라는 유명한 초대교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병원이다.” 병원에는 건강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 환자들이 오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병원에는 병자가 필요하듯이 아버지 집에는 영적환자들이 필요합니다. 죄인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았지만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입었지만 역시 우리는 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나쁜 일을 많이 하는 욕심쟁이가 죽어서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웬 시계가 그렇게 많습니다. 벽에 시계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 시계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저건 사람들이 세상에서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 판단하는 시계입니다.” 그래서 각 시계마다 사람의 이름이 달려있는데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시계 바늘이 아주 빨리 돌아갑니다. 죄를 조금 지은 사람은 시계 바늘이 천천히 돌아갑니다. 보니 정말 시계 바늘이 빨리 돌아가는 것도 있고, 서서히 돌아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죄 많은 부자가 궁금해졌습니다. ‘내 시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그래서 찾아보았지만 자기 시계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당신의 시계는 너무 빨리 돌아가서 지금 저 뒤에서 선풍기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중에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 죄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남에 잘못을 보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영신교회는 이렇게 평안하고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서 날마다 성장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장하는 교회는 말씀 안에 든든히 서 가는 교회입니다. 무엇에 교회가 든든히 서 가야 할까요? 말씀의 기초 안에 든든히 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집을 짓는데 어떤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어떤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모래 위에 짓는 집은 짓기는 쉽지만 대풍이 나고, 창수가 나니 금방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태풍이 불어도 견고하고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 반석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인생의 기초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교회가 세워져있으면 그 교회가 견고해지고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가 어떤 전통위에 세워져있고, 사람 위에 세워져 있다면 그 전통은 언젠가 고물이 되어버리고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쉬이 허물어져버립니다. 저는 우리 영신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든든하게, 견고하게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결정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푯대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전통은 물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이 교회의 기준은 되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보니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젖을 먹고 잘 자라듯이 우리도 생명의 젖인 말씀을 먹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고, 교회는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19장 20절에 보니까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배우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내 삶에 적용할 때 거기에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성령의 검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 삶에, 우리 교회에 기준이 되고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2장 42절에 보니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한 후에 초대교회는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배웠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들을 통해서 말씀이 가르쳐지고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그 말씀을 잘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닫혀져서 ‘나는 다 아는데 배울 게 뭐가 있나.’ 이런 마음이면 그는 영적으로 서서히 퇴보해 가게 됩니다. 

여러분! 말씀의 밭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우리 인간의 마음을 네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때로는 자갈밭과 같습니다. 때로는 가시밭과 같습니다. 때로는 길가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면 자갈밭에서는 자랄 수가 없습니다. 가시덤불밭에서는 햇빛을 보지 못해 곧 죽어버립니다. 길가에는 씨앗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새가 와서 쪼아 먹고 단단해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옥토와 같은 밭에 떨어질 때 거기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우리 마음의 밭이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밭이 옥토와 같은 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밭을 자꾸 갈아엎어야 합니다. 기경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갈아엎어야 합니다. 오래되면 그 마음 밭이 굳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역사가 오래 될수록 그 마음 밭을 옥토로 바꾸는 일을 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흥회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우침 받지 않으면 내 자신이 늘 의인인줄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에 겸손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열리지가 않습니다.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깨우침 가운데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 큰 축복인 것입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말씀 안에 든든히 서 가는 교회입니다.

  세 번째,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은 주님을 경외하는 교회입니다. 본문 31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경외라는 말은 첫 번째 뜻은 ‘두렵다’는 말입니다. 다음 뜻은 ‘존경하다’, ‘사랑하다’ 라는 뜻입니다. 주를 경외한다는 뜻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높여드리고 사랑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원래 유대민족들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못 부릅니다. 그 이름이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도나이’, ‘주’라고 불렀습니다. 주를 경외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나님을 때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의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주님은 “내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교회입니다. 어느 인간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오직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만이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를 경외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성령의 위로라는 말은 성령의 후원가운데, 성령의 권면, 성령의 격려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태동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 보면 120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나가서 병도 고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면서 놀라운 전도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성령이 강림한 이후에 바로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성령강림 이전에는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교회의 출발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장하려면 성령이 늘 임재해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높여드리고, 성령을 환영하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성장의 원동력은 바로 성령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성령의 뜻 앞에 온전히 낮출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 의지나, 내 고집이 아니라 성령의 뜻 앞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불량한 아들이었습니다. 제대로 제사장 구실을 못 했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이들이 전쟁을 제대로 했겠습니까? 전쟁도 못 하고 다 죽임을 당하고 법궤만 빼앗기고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맙니다. 그 소식을 엘리 제사장이 듣고 너무 놀라 의자에 앉아 있다가 떨어졌는데 목이 부러져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애를 낳다가 산고 가운데 죽게 됩니다. 그러면서 유언을 남깁니다. “이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불러 달라.”고 합니다. 이가봇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 하나님의 성령이 떠난 교회는 인간의 집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가운데 진행되어지는 공동체인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님만이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탄식하게 하면 안 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목사의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 모든 제직, 온 성도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소문이 좋은 교회, 소문이 잘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로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를 경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교회는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에 영감이 있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가 충분한 기도 가운데 예배에 참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더더욱 우리가 늘 오고 싶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너무 너무 교회에 오고 싶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유머입니다만 어느 주일날 아들과 어머니가 실랑이를 벌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깨웁니다. “빨리 너 일어나서 세수하고 교회 가야지.” 아들은 안 간답니다. 가기 싫다고 합니다. “왜 교회 안 가?” “교회 가면 안내위원들이 불친절해서 교회 가기 싫어. 성가대가 찬양하는데 화음이 안 맞고 불협화음이 나니까 그것도 듣기 싫고, 어느 날은 장로님이 기도도 길게 해서 졸다가 오고. 하여튼 교회 가기 싫어.” 그러나 어머니가 이 아들을 설득하다가 마지막 한 마디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교회에 갈 이유가 한 가지 있다. 바로 네가 그 교회의 담임목사이기 때문이야.” 우스갯소리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는 우리 모두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를 위해 헌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할 때,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성령님은 이 교회를 축복하시고 영신교회를 통해서 이 지역사회를 구원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창립 54주년을 감사하면서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영신교회 미래까지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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