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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다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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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다 (마 5:7) 


팔복은 4개씩 4개씩, 쌍을 이루고 있다. 1-4까지 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세이다. 5-8까지 행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핍박을 받는 자는, 사람을 향하는 자세이다. 

앞의 4가지는 내적인 태도를 의미하고, 뒤의 4가지는 태도가 나타내는 결과다. 즉 행동을 말한다. 여기서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먼저 속이 채워지고, 외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바리새인들의 종교는 피상적이고, 외적이고, 의식적인 종교였다. 한 마디로 껍데기에만, 관심을 갖는 접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본질은, 겉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면서, 바리새인 종교를 크게 비난하셨다. (마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내면이 중요하다. 이는 행위를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거지임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영적 거지를 사랑할 수 있다. 내가 먼저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일을 행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 안에서 의로운 자다. 행동이 변화되면 존재가 변함이 아니라, 존재가 변하면 행동이 변하게 되어있다. 성도가 되었다는 말은, 의로운 일을 해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의로운 일을 행하게 된다. 

주일을 지키기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주일을 지킨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 청결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가, 사람들 사이의 화해자요, 

하나님 앞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이 긍휼을 말씀을 하셨던 시대는, 로마가 강력한 정치적인 세력을 행사할 때이다. 로마는 힘을 숭배하는 철학을 근거하여 세운 나라다. 그들은 무력과 용기를 존중하고, 긍휼과 자비는 경멸하였다. 

로마의 철학자들은, 긍휼이나 자비를 “영혼의 질병”이라고 했다. 그 당시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될 수 있었다. 여인과 아이들은 인권은 무시된 채, 노리개 감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아들은 원했는데, 딸을 낳으면, 그 아버지는 얼마든지 그 딸을 죽일 수 있었다. 

또 많은 남자들은, 자기의 기개를 과시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회와 시대를 배경으로, 긍휼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긍휼을 영혼의 질병이라고 이해하는 사회에서 “긍휼은 영혼의 축복이며, 건강”이라고 선포하셨다. 

긍휼은 연약한 사람들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참된 강함의 상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긍휼을, 연약한 모습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긍휼은 의를 전제로 한다. 의가 없는 긍휼은, 감상적 자선에 지나지 않고, 긍휼히 없는 의는, 냉혹한 기계적 의에 불과하다. 

그래서 “의만 있고 긍휼히 없는 하나님의 모습은, 폭군이며, 또한 긍휼만 있고 의가 없는 하나님의 모습은, 역사의 방관자다.”라고 말할 수 있다. 

1. 그러면 진정한 긍휼은 무엇인가? 

(1) 뜻 : 긍휼은 矜恤(불쌍히 여길 긍, 구휼(건져내다)할 휼이다. 헬라어(엘레오스) 히브리어도(레헴)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도와줌을 말한다.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그를 돕는 행동을 말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동정심 + 행동이 긍휼이다. 

토마스 왓슨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 자매다.”라고 했다. 그러면 사랑과 은혜와 긍휼은, 어떻게 다른가?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은혜는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주는 호의다. 긍휼은 당연히 주어야 하는데, 주지 않는 것이다. 저주받아 마땅한데 죄인을,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불쌍히 여겨, 저주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긍휼이다. 

토마스 왓슨은 말한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다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다. 또한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애정이라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놓여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 

사랑은 그 대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우리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존경으로 나타난다.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친절과 우정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우리보다 못한 불행한 사람에 대해서는 긍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긍휼한 마음이다.” 

(2) 긍휼은 주님의 성품이다(출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예수님은 땅에 계시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다. 당시 유대 땅에 다닐 때, 굶주린 자들이 허기진 모습으로 주님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다. 주님의 모든 이적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 했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고, 여기 살아 있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며 기도했다. (애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 하나님의 긍휼히 제일 잘 나타난 곳이 ‘십자가’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야유와 조소와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긍휼에 가득 찬,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눅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들이고, 진노의 자식이다. 그래서 주님의 긍휼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다. 그래서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것이 사는 길이요, 은혜 받는 길이다. 

(3) 예수님을 믿을 때, 주님의 긍휼한 성품이, 성도들에게 나타난다.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긍휼이 여기시는 주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첫 번째 옷은 ‘긍휼의 옷’이다. 

(엡2:4-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 받은 줄 믿는다면, 이제 긍휼의 마음을 품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긍휼은, 성도가 완성하여야 할, 인격의 덕목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죄를 범하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시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이렇게 우리는, 날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처럼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만 한다. 긍휼을 베푸는 인격으로 성숙해야 한다. 우리 예수님은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은, 긍휼을 베푼 자라 하셨다. 

긍휼의 정을 갖지 못하면, 동물처럼 된다.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형제를 외면하고, 부모에게 불효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긍휼의 마음이 있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다. 이런 긍휼의 마음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대답은 “모든 사람들에게”이다. 긍휼의 대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특별히, 3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것을 요구하신다. 

(1) 불신자들이다. 
주님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멸망해가고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긍휼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나? 

학자는 사람을 만날 때, 무식과 유식으로 사람을 나눌지 모른다. 상인은 사람을 대할 때, 돈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정치인은 사람을 표로, 군인은 사람을 적과 동지로 나눌지 모른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영혼인가? 구원받은 영혼인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푼, 최고의 긍휼은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이 여기신 이유는,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긍휼은, 우리의 이웃에게 전도로 나타난다. 전도가 없는 긍휼은, 인간적인 동정일 뿐이다. 아무리 인간적인 인정이 많아도, 이생으로 끝나게 된다. 

진짜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 가난하고 병든 자가 불쌍한가? 아니다. 병들어도 죽어서 천당 가면 된다. 냉정히 생각하면 너무 슬퍼할 게 없다. 모두 다 가는 세상, 조금 먼저 가나, 늦게 가나, 주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간다. 먼저 가도 천당하면 축복이고, 나중에 가도 지옥가면 망한 것이다. 

(2)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스테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행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기도는 누구한테 배웠는가? 주님에게 배웠다. 주님의 기도다. “(눅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나요? 

(3) 약자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성경은 강자가 약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긍휼함을 갖지 못하면, 동물처럼 된다. 이것이 강자의 미덕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살다보니 갈등이 생겨서, 갈라서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강자이기에, 온유한 마음으로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해, 노예로 팔렸다. 그래서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팔려들어 갔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물리쳤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지만, 끝내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이제 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디발 장군과 그의 아내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구절이 없다. 

자기를 팔아버린 형제들이 애굽에 왔을 때, 형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어려웠을 때, 민족을 위하여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다. 사울을 위기에서 건져냈다. 사울은 너무 고마워서,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다. 

그런데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사울을 피해 숨어 다닌다. 사울은 다윗을 계속 죽이려고 다윗을 추적한다. 다윗이 동굴에 피신하여 숨어있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추적하다가, 피곤해지자 동굴에서 잠을 잤다. 

다윗은 사울의 목을 벨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다윗은 칼을 빼서, 사울의 옷자락만 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게,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였다. 만일 예수님께서 혼내주시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긍휼을 강자의 미덕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긍휼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한 보상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했다. 사람들에게 긍휼이 여김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은, 하나님에게 긍휼이 여김을 받는 복이다. 

긍휼은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축복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세상에서 실수하기 마련이다. 최후의 심판 때, 긍휼 없이 천국에 들어갈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긍휼은 이 세상이나 저 천국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긍휼의 축복을, 3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1) 긍휼은 베풀면, 자기에게 유익이다. 
사도 바울은 인사할 때마다, 사용하는 전형적인 틀이 있다. (딤전1:2)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 

‘첫째로 은혜와, 둘째로 긍휼과, 셋째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의 순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깨달은 사람들에게 긍휼히 있다. 그들은 비로소, 주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이 긍휼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평강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강을 원하시면, 긍휼을 베푸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감옥은, 용서하지 못하는 증오의 마음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 자신이 가장 비참해진다. 정신은 피곤해지며, 영혼도 어두워진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푸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하다. 

(2)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만든다. 
(갈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한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원하신다면, 긍휼을 베풀라. 

다른 사람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다. 스탠턴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거냐?”라며 나가버렸다. 이렇게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고릴라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갈 필요가 없다.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나면 된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세월이 흘러서,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 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다. 

왜냐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하다.”라고 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이니 없애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이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자,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 결국 링컨은 자기를 미워했던 원수까지, 긍휼을 베풀어 사랑한 진정한 승리자였다. 

(3)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심판의 날에,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기억하라.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길은,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다. (마25:31-46)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내가 주리고, 병들고, 갇혔을 때, 돌아보았다는 말씀이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을 베푼 것으로, 곧 주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을 주는 것이, 최상의 긍휼이다. 이 긍휼의 복음을 주지 않는 것이 심판이다. (마18:21-35)을 보면,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이야기가 나온다.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니, 

(32-33)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빛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하나님께 긍휼이 여김을 받고, 긍휼이 여기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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