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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별화한 신앙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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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한 신앙  (눅 18:9~14)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다가 미문의 앉은뱅이를 만나 일으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이슬람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정해놓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아마 하루에 5번씩 365일 기도를 하면 일생이 기도하다가 끝나겠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또 새벽기도를 전혀 안 하시는 교우님들 생각에는 평생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일은 하나도 못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기도생활, 영적인 일은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습니다. 또 그 시간이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고 살아가는 힘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의 결정과 방향에 따라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괴로움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한니발 장군은 눈이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자기 모습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 화가를 불러 자기 얼굴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화가는 그의 얼굴을 똑같이 그렸습니다. 사진 찍어 놓은 것처럼 잘 그렸습니다. 한니발은 그 그림을 보더니 한쪽 눈이 없는 그림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내가 이런 병신이란 말이냐?”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화가는 정직하게 그린 그림 한 장 때문에 죄 없이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한니발은 그림의 모습으로 자신이 역사에 남을 것을 생각하니까 화가 나서 죽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화가를 불러서 그리게 했습니다. 이번 화가는 지난 번 사건을 알기 때문에 거짓말로 그렸습니다. 아주 잘생기고 특별히 두 눈은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게 잘 그렸습니다. 

그랬더니 한니발이 그 그림을 보고 더 화를 냅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왜 딴 사람을 그려놓고 나라고 그래?” 또 죽여 버렸습니다. 세 번째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안 그려도 죽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화가는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한니발의 옆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한니발의 초상화는 역사에 옆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또 어떻게 나를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평가에 마음을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내용은 이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서 성전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데 두 사람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객관성 있게 우리가 평가를 하면 여기 등장하는 이 두 사람은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매우 거룩하다고 평가를 줄 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초월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를 드린다는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 가장 고귀한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그대로 보인다는 최고의 경건이 이 두 사람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두 사람의 신분이 확실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입니다. 이 바리새인을 좋게 평가하면 청교도적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생활이 매우 엄격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정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모든 것은 절대 지킵니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신앙 특공대 같은 존경 받는 사람들이요, 다른 사람들은 그 신앙 규범이 너무 엄격해서 그 안에 들지 못합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살아갈까?”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가는 오늘 말씀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절대로 죄 짓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극복의 극기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양심의 가책 없이 나는 죄 짓지 않고 살았습니다.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바리새인의 생활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가 하는 일은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일주일에 정확하게 두 번씩 금식하는 영성 훈련된 사람입니다. 금식기도는 일생에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일주일에 두 번씩 정확하게 이 사람은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 제일 참기 힘든 일이 배고픔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일은 매주일 하고 있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예수 믿은 지가 수십 년이 되어도 십일조 못 드리는 사람이 드리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이 어느 교회마다 똑같은 통계입니다. 

피땀 흘려서 얻은 열매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도 보통 믿음으로 힘든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 선교사 천명을 파송하고 매달 선교비를 보내는데 만약 우리 교회의 모든 교인이 십일조를 한다면 삼천 명을 보낼 수 있습니다. 십일조 헌금이 시험거리가 되어 어려움을 겪는 교인가정도 얼마든지 제가 상담했습니다. 부인은 하자고 하고 남편은 반대하고 반대로 남편은 십일조를 하자고 주장하는데 부인은 절대로 마음을 열지 못할 때 그것이 가정불화의 이유가 되는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정확하게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이 볼 때는 바리새인만 못한 겁니다. 이만큼 우리가 못합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은 매우 훌륭하다고 객관성 있는 평가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생활 열심히 하죠, 시간 정해놓고 성전에 와서 기도하죠, 죄 안 짓고 살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죠, 의무는 정확하게 하죠, 십일조 헌금 언제나 정확하게 하죠. 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또 다른 사람의 기도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세리라고 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세리 직업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문화에서 생긴 일종의 정치 희생양인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셨을 때 삭개오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장면을 상상해보면 소문난 갈릴리의 선지자가 여리고 땅에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다 나왔습니다. 삭개오도 많은 인파 속에서 예수님을 볼 수 없어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았습니다. 여리고에 오셔서 이 선지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여리고에 가셔서 하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삭개오 집에 심방하신 것 밖에 없습니다. 기대감에 부풀었던 군중들은 큰 실망을 하고 비난을 합니다. 삭개오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집에는 드나들지도 않는데 선지자가 어떻게 저런 죄인의 집에 들어 갈수 있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삭개오가 왜 죄인인가? 이 사람은 도덕적으로 문제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도 아닙니다. 선하게 살고 다 좋습니다. 직업 때문입니다. 직업이 세리이기 때문에 그런 불이익적 대우를 받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위치의 사람입니다. 오늘 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똑같이 세리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멀리 서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성전 한 쪽 귀퉁이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과 같이 죄도 안 짓고 금식기도도 하고 십일조도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 같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판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 바리새인 너 참 잘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라.’, ‘세리야 너는 어쩌면 한 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느냐? 형편없는 모습으로 나를 만나러 왔느냐?’ 이렇게 판단하셨을까요? 반대의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하고 세리를 칭찬하시지요. 하나님은 주석을 달아 설명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리라.” 이 말씀으로 결론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기도도 하고 때로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은 다 소용없는 일인가? 먼저 이 말씀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잘못 해석하면 금식기도나 십일조나 죄 안 짓고 살려는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것 같이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첫 번째에 바리새인의 마음이 나타나 있는데, 이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여러 가지 내 모습은 절대 의로운 것이며 하나님도 인정할 만한 것임을 즐겁게 발표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의 문제는 사실상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최대의 목표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기독교 진리의 중심이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 누구든지 받고 싶은 대우가 있다면 “아! 저 사람은 의롭다 불의하지 않다.” 어떤 때는 매우 속이 상해서 견디기 힘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냐 하면 나는 매우 의롭게 살고 있는데 이웃이 나를 불의하게 볼 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해 고통스러운 노력을 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그것을 증거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인간은 어떤 때 문제가 되느냐 하면 자신이 그냥 스스로 의롭게 살면 그만인데 의롭게 보이기 위해 노력할 때가 있고,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노력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종교인들에게 더욱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진리에 못지않은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하고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진실은 이미 떠나버린 사람이 됩니다. 피곤한 위선의 삶을 끝없이 가야 됩니다. 지금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기도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행복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정말 의롭게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몇 가지 자신 있는 자신의 선행을 기도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은 그나마 하는 선행의 의미도 없어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나를 의롭다고 믿어도 남은 절대로 나를 안 믿어주는 경우도 많고, 나도 인정하고 남도 나를 인정하지만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불의한 죄인이라고 믿고 있고 남들도 나에 대한 평가를 불의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인정하실 때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떳떳치 못함이 자신의 말 속에 나타났습니다. 

“내가 혹시나 남에게서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갖겠나이다.”라고 말한 그 자체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아니하셨는데 자신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사람들도 삭개오는 죄인이라고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의 의를 인정하셔서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직업은 창녀로 나타납니다. 그런 사람이 ‘아! 나는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믿겠습니까? 또 이웃 사람들이 막달라 마리아를 보고 아! 저 여자 마리아는 의롭게 살아가는 여자다. 이렇게 인정을 하겠습니까? 누구도 안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죄를 가리워주고 그를 인정하셔서 예수님의 여제자 가운데 가장 가까운 여제자로 인정하고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은 삭개오도 마리아도 예수님에게 자신을 알아달라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를 방문하시는 예수께서 자기 집을 심방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고자 “예수님! 사실은 내가 나쁜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본래는 내가 죄를 모르는 착한 여자였는데 이렇게 됐습니다. 알아주십시오.” 이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자신을 경멸스럽게 생각하고 체념적 삶을 살아가고 이웃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이 판단하셔서 의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은혜사건인데 이 바리새인은 조그만 업적과 공로가 있는 것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만들려고 하나님을 설득해서 깨우치려는 기도를 지금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불필요한 인정을 받으려고 마음을 쓰면 실망과 피곤함이 찾아옵니다. 나중에는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내 모습 이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유명하게 되고 싶다든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싶다든지 그런데 목적을 두고 행동을 하다보면 위선이 됩니다. 좀 안 좋은 모습이 나타나더라도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평가를 어떻게 하던지 내 모습 이대로 내 마음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 다음 이 바리새인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철저한 차별화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전 안에 사람이라고는 지금 두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 조용한 공간에서는 소곤소곤 기도를 해도 다른 사람의 귀에 넉넉히 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새벽예배에서는 소리를 내지 말자고 피차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한 사람이 중얼중얼 자기 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은 기도를 하다가 그 사람 기도만 듣다 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큰 소리로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는데도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를 하니까 세리도 다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세리는 자기 같은 사람과는 비교급이 안 된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는 기도합니다.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런 기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옆에 있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해버리는 차별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신앙적 교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그렇게 많은 마찰을 가져온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면 신앙이 좋다고 자정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기 함정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리를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하러 성전에 왔다가 이상한 사람한테 인격 무시를 당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을 만났습니다. 아무리 성격이 온순하여도 이유 없이 자존심을 짓밟는 말을 들으면 누구도 참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진짜로 죄가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어느 날 성전 안에 들어와 기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보더니 보자마자 “아! 하나님 나는 저사람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금방 대들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바리새인과 같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다. 기도하러 예배당에 들어와서 상관도 없는 다른 사람이나 멸시하고 하나님 앞에 나는 이것도 잘했고 저것도 잘했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살아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의 기도가 더 의롭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리는 바리새인을 만나러 예배당에 오지 않았고 하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을 만나러 여기 온 것이니까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것은 그와 하나님의 문제이지 절대 내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흥분해서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릴 수 있는데 흥분하지 아니하고 자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기도문은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늘 말씀에 그가 무슨 죄가 있는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무언가는 떳떳치 못하고 세금 걷어서 로마에게 이익을 많이 주고 로마 정부가 주는 혜택을 받고 살아가니까 자국민에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또 많은 사람이 자기를 보고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바리새인이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을 들으면서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죄인이고 남이 보아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필요한 불쌍한 죄인이로소이다.’

나르시시즘이란 말이 있습니다. 항상 자기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문에 나타난 의로움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웬만하면 그런 것은 다 안 하고 살아갑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교회 다니는 교인 30퍼센트 정도는 십일조를 합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하나이다.’ 이것은 이틀이 아니고 두 번입니다. 일주일에 두 끼 안 먹는 것입니다. 

이레에 6번 금식 하는 교우님들 우리 교회도 그득합니다. 아침 금식하는 교인들 얼마든지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은 누구든지 바리새인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하나님을 설득하고 아마 그런 것은 세리가 더 잘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차별화 선언을 해서 세리는 비천하고 자신은 고귀하다는 기도문을 남기고 있는지 신기한 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확실한 진리!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시고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똑같은 선언을 예수님이 다시 한 번 하고 계십니다. 

결국 오늘 두 사람의 성전기도는 바리새인은 실패요, 세리는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예수님이 결론지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기도와 선행을 아무리 많이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들으시고 받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같이 ‘내 모습이 왜 이래? 죽여 버려. 이건 내가 아니야! 또 죽여 버려.’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평가에 신경을 쓰다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것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그 많은 사람을 살펴보시면 사회적 평가가 없는 소시민이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12 제자는 한 사람도 엘리트가 없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잡고기를 잡아 팔아 가난한 생계를 구차스럽게 마련해가던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고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을 가진 세관에 앉은 마태요. 다른 제자들은 그나마도 내놓을만한 것이 없어서 밝혀지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 바울이 크리스찬의 모습을 조명할 때 어떻게 말했습니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과시가 목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잘난 척을 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함부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죄인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도 선진국이 되가니까 이런 문화가 생기는데 선진국에서 제일 영웅스럽게 성공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스포츠 선수들입니다. 젊은이들이 다 그 쪽으로 마음을 씁니다. 그래서 부와 명성을 모두 갖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아침 6시에 애국가 나오면서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박지성 선수라든가 박태환이라든가 김연아라든가 스포츠에서 국위선양을 한 선수들이 자랑스럽게 나오지 않습니까? 외국은 더합니다. 

미국 역사상 훌륭한 농구 코치 중에 존 우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UCLA 농구팀을 10년 동안 계속 챔피언의 자리에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학이 유명해졌고 존 우든은 우상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누구든지 농구선수로 UCLA에 들어가고 싶어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분의 숨은 기술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75년 은퇴하면서 비로소 그는 자기의 코치 철학을 발표했습니다. 수백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가장 짧은 인터뷰였습니다. 

10년 동안 UCLA를 가장 우수한 자리에 올려놓은 당신의 코치 기술 핵심이 무엇입니까? “Selflessness!” 이 한 단어로 끝났습니다.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것!” 아무리 우수한 선수가 있을지라도 혼자 잘난 체 하지 말 것! 자기를 숨기고 팀을 드러내야 성공합니다. 히딩크 코치도 이 철학으로 한국 축구를 4강에 올려놓았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만나러 성전에 와서 온갖 복잡한 신경을 쓰면서 복잡하게 중얼거리다가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만약 이 때 이 바리새인이 그렇게 기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 불쌍한 세리를 도와주십시오. 저 사람은 문 밖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저 마음에 평화를 주시고 더 좋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할 수밖에 나보다는 저 사람을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기도만은 절대 정직하고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나의 ‘의’는 이미 하나님이 결정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인정받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오셨습니다. 누구를 보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신경을 쓰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야 기도요, 하나님을 만나야 예배입니다. 지나가고 마는 이웃사람의 인정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저는 지난 주간에도 뉴욕에 가서 목사가 되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왔습니다. “아무 신경도 쓰지마세요. 

이제부터 되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데 하나님만 신경 써야 합니다. 누가 뭐라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이 하나만 가지고 평생 목회하면 훌륭하게 목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왔습니다. 이웃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신경 쓰지 마세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오고 싶고 그래야 예배가 드리고 싶은 것이지요. 불필요한 신경을 쓰다가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여러분 교회오실 때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하물며 의로움을 인정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시여!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 오늘 두 사람의 모습에서 확실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무 신경 쓰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만나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응답을 받고 ‘네가 오늘 의롭다함을 얻었느니라.’ 이 약속을 가지고 이 성전을 나가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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