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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 그리스도 (빌 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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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에서 교인들끼리 대화하면서 한 사람이 Florida에 집 한 채 사놓고 겨울에 뉴저지에서 골프를 못 칠 때는 그곳에 내려가서 골프나 치면서 여생을 보내자고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나이 들어서 골프나 치면서 놀러 다니는 삶이 얼마나 불쌍하고 무의미한 삶이냐고 반문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살고 먹고 살고 자식들을 기르며 살아왔으니 이제는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Florida보다는 차라리 맨하탄이나 퀸즈로 이사 가면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을 것이라고, 그렇게 여생을 살자고 했다. 여러분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려고 계획하고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사람의 인생은 그가 가진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된다. 가치관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또한 무엇이 귀중하고 중요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 즉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서 말과 행동과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가치관이 바뀐 사람들이다. 예수님 때문에 살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이다. 즉 예수님 때문에 가치관이 바뀌고 예수님 때문에 삶이 바뀐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위한 일과 예수님이 맡기신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을 가장 먼저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삶이 바뀐 사람이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가치관이 바뀌고 삶의 목적이 바뀌고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자신만을 위해 살던 그가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되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 때문에 포기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그가 로마의 옥에 갇힌 것도 예수님 때문이었다. 그는 세 번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유대인들에게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소동 중에 로마군대에 잡혀간 그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로마황제에게서 재판을 받겠다고 했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오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서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나 평안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자신이 어떤 고난을 당하고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시위대병사들에까지 복음을 전했고 그렇게 복음의 진보가 나타난 것을 기뻐하고 감사했다.(12,13절)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에 그 고난에 대한 반응과 그 고난에 대처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고난에 대한 반응과 태도에 따라서 그 고난을 이길 수도 있고 그 고난 때문에 넘어지고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을 학대하고 삶을 비관한다. 그래서 절망과 낙심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버린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에 고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찾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발전시킨다. 고난의 의미를 찾고 고난을 이길 방도를 찾는다. 고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간다. 고난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고난을 이길 방법을 찾는데 더 집중한다. 그래서 고난의 때에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더 많이 한다.

더 나아가서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의 때에 사람을 보거나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자체만 생각하지 않고 고난의 의미를 찾고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고난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모든 관심의 초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고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자 빌립보 교회에 한 가지 놀라운 현상이 생겼다. 그것은 빌립보교회 성도들 중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없는 동안에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고 감사한 일인가?(14절) 그런데 각기 다른 이유로 복음을 전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15-17절) 한 종류의 사람들은 선한 뜻으로 즉 사도 바울의 전도자로서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몫을 대신 하기 위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즉 부정적인 이유에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아마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지,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든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떤 이유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만 전해진다면 괜찮다고 했다. 오히려 그렇게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기뻐하겠다고 했다.(18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의 관심이 다른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었고 복음전파에만 있었다. 그는 자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복음이 널리 전파되기만을 원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누구를 통해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복음이 전파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즉 그는 자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게 되는데 최고의 관심이 있었다. 죽고 사는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과 연관해서만 생각했다. 자신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 유익하면 살고 죽는 것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이면 죽겠다는 뜻이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님과 복음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대우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얼마 전에 한국사회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네티즌을 사이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사람이 있다. 네티즌들은 이 사람을 ‘개똥녀’라고 불렀다. 왜인가? 어느 날 지하철에 한 젊은 여성이 예쁜 강아지를 안고 탔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 개가 지하철 전동차 바닥에 설사를 했다. 그런데 이 젊은 여성은 그것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개만 챙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데 한 할아버지가 일어나서 신문지 등을 가지고 말없이 그 더러운 것을 치웠다, 

어떤 사람이 이 광경을 카메라폰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바람에 유명해졌고 사람들은 대학생 같아 보이는 이 젊은 여성이 누구인지 찾아내 혼내주자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네티즌 중의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 잘못된 행동을 한 이 여성에게 분노하기보다는 말없이 남이 저질러 놓은 일의 뒤처리를 한 할아버지께 감사를 표시하고 이 할아버지를 찾아서 표창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이 여인은 자기 개가 흘린 것을 치우려 하지 않았을까? 그의 관심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개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 할아버지는 더러운 것을 손수 나서서 처리하셨을까? 이 할아버지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개똥을 흘리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 개똥을 치우는 사람인가?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진 것을 기뻐한다고 했다. ‘진보’ 가 무엇인가? 즉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 아닌가? 다른 말로 하면 성공했다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복음이 전해진 것을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성공에 대한 생각은 일반 사람들과는 달랐다.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고난뿐이었지만 복음의 성공, 하나님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성공관이어야 한다. 나 개인의 성공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무엇으로 어떻게 평가하실까? 무엇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을 판단하시고 복과 은혜를 주실까? 사람들은 일의 결과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동기와 목적을 점검하시고 물으신다. 즉 우리가 한 일의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고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가를 따지신다. 선한 목적과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한 일이어야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을 하고 능력이 있고 희생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고 하나님도 나의 수고와 헌신과 희생을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우리가 선한 목적과 동기로 헌신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인정하신다.

저희 교회에 몽골인 사역을 도우시는 김태근 목사님이 계신다. 몽골선교사로 8년을 사역하시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귀국해서 예수전도단에서 사역하고 계신다. 한 번은 식사를 대접하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에 김목사님의 둘째 아들이 25살의 젊은 나이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목사님은 그런 엄청난 사건을 덤덤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들을 잃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몽골사람들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신다. 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에 밤에야 심방을 할 수 있는데 요청만 하면 즉시 나오셔서 심방을 해주신다. 

김 목사님의 관심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아들을 잃는 고난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 그 일로 인해서 오히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했다. 이 모습을 보고 사탄이 땅을 치며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사가 춤을 추고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셨을 것이다. 놀라운 상급을 준비해 두셨을 것이다. 

나의 최고의 관심은 무엇인가? 나의 관심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 우리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동기와 목적과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한다. 관심의 초점을 나에게서 예수님께로 옮겨야 한다. 우리의 삶의 목적을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하늘에서 놀라운 상급을 주실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이 성공한 것을 나의 성공으로 알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해도 그것 때문에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복음이 전해진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자.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게 유익이 되든지 손해가 되든지, 내게 고난이 되든지 형통이 되든지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하는 믿음으로 살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만 최고의 관심을 두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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