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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생의 본질 (겔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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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본질 (겔 36:26)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I. 본문해설 

본문 말씀은 중생의 본질에 대해서 훌륭하게 제시해주고 있는 성경구절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죄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상태로 태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인간관입니다. 악을 행함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그 영혼의 기능들 역시 모두 부패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도 알 수도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의 조치 없이 방치될 때에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으로 인하여 숙명적으로 불행과 죄악을 향하여 굴러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죽은 영혼의 상태에서 겨우 동물적인 기능, 거기에다 조금 보태어진 이성의 기능 정도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을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이라고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다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고 본래의 인간을 창조하신 계획으로 돌아가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첫 번째 세상은 창조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이 죄로 인하여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재창조하시는 행위로서 이 세상을 고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본질입니다. 


II. 중생의 본질 

A. 영을 주심 

오늘 본문은 중생의 본질을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새 영을 주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본질입니다. 즉 인간은 허물과 죄로 철저히 죽어있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무엇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새 영을 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없이 그저 살아가던 짐승과 같던 인간을 주님이 성령을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이 중생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을 결합시키는 본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인간은 이제 영혼 자체가 죽어 있던 상태에서 살아 있는 상태로 아주 놀랍게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영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가장 위대하는 증거는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입니다. 그 성령님이 중생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새 영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면서 중생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이라는 사실을 다른 표현들로 보여줌으로서 중생의 다양한 다이아몬드 같은 국면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그것이 성령님 자신입니다. 은혜라고 할 때 하나는 중생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서의 은혜가 있고 또 하나는 중생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셔서 역사하시고 감화시키는 영향력을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의, 즉 은혜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를 행하게 하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라는 이 정의는 두 번째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것은 성령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저를 아는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은 성령과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성령과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솟아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 주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비유는 씨입니다. ‘너희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생과 함께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너희 안에 있나니, 이 생명이 곧 중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중생을 통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때, 성령이 죽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실 때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살리는 영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말과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말, 그리고 하나님의 씨가 내 안에 있다는 말과 내가 중생했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새 영을 받게 되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제일 먼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고등한 기능은 지성과 의지이고, 하등한 기능은 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영혼이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두 기능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에는 “영혼이 죽었다면,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 모두 작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육체가 죽었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영혼은 죽어 있어도 부지런히 자기 할 일을 합니다. 이것이 영혼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하등한 기능이 살아 있어도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죽어 있으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본래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곰이 네 발로 뛰어다니면 곰이고 그것을 그랜져 승용차 뒤에 태우면 인간이 됩니까? 본질에는 하나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킵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본질보다는 양상에 더 마음을 많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여 학자가 되는 것,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은 양상일 뿐입니다. 중생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오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판단이라는 기능입니다. 이성은 원인과 결과를 엮으면서 추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상상력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중생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성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 중생을 통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판단하는 기능인 오성이 신령한 것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신령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올바로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생하시는 역사를 통해 성령을 그에게 주시면 제일 먼저 그의 영혼에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조명이라고 합니다. 이 조명은 중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빛이 들어옴으로써 판단력이 생겨서 놀랍게 진리를 알아보고 선하고 좋은 것을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놀라운 판단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물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선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리가 주어졌습니다. 진리를 봤을 때 이것이 진리구나라고 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기했던 질문이 이것입니다. 어떻게 진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이 진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진리라고 깨달을 수 있을까.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진리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중생을 하면 진리와 선에 대해서 감각이 생기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B. 새 마음을 주심 

고등한 영혼의 기능 중 또 하나는 의지입니다. 중생은 의지를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레브 레바브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어떤 때는 이 레브라는 단어가 지성을 가리키기도 하고 감각을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의지를 가리키기도 하고 이것 모두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의지를 가리킵니다. 새 마음을 주시는데 새 마음을 주시는 방식을 성경은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1. 굳은 마음을 제함 

첫째는 굳은 마음을 제거해주시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굳은 마음은 레브 하 에벤이라 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레브 핫 바 샤르라고 합니다. 에벤이라고 하는 것은 돌맹이입니다. 돌맹이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코기의 마음을 줄 것이며 라는 뜻입니다. 

굳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돌 같이 굳어진 의지를 뜻합니다. 비중생자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생각으로 마음이 휘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하셔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완고함입니다. 


2. 부드러운 마음을 주심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자들은 마음이 부드럽게 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잘 설명하면 그 감화를 받아서 마음이 저절로 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런 정도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면 구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죄를 위해서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속죄와 중생의 교리는 문을 움직이는 힌지(hinge:돌쩌귀 또는 경첩)와 같습니다. 이 힌지 두 개를 붙들고 기독교 신앙 전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C. 율례를 행하게 하심 

새 영을 통해 의지를 바꾸어 주시는 것은 율례를 행하게 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신앙으로 판단해 봅시다. 다음 세대에는 지금 보다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을 너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심으로 세상이 아무리 요동칠지라도 그를 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III. 결론: 회심을 위해 기도하라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중생한 자의 영혼 안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생명은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생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보탤 수 없으니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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