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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중의 뿌리는 사랑이다 (요 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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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의 뿌리는 사랑이다 (요 13:1~15)


요1장-12장은 예수님의 생애 3년 반의 기록이다. 13장-19장은 하룻밤의 기록이다. 
그 중에 요13-17장은 십자가의 죽음을 하루 앞두고 하신 예수님의 고별설교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은 아셨다. 내일이 그날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유언 설교를 하셨다. 행동으로 설교 하셨다. 
죽음을 하루 앞에 두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 

1. 주님은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하신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자기 사람들은 누구인가?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다(3절). 17:6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사람들도 자기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한다. 이왕이면 능력있는 사람,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삼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이 좋다. 사랑스럽다. 

예수님의 자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3년 반을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밤까지 예수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룟 유다는 돈 받고 예수님을 배신하는 일을 저지를 사람이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다음 날 세 번이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할 사람이다. 나머지는 그날 밤 예수님이 잡히실 때 다 도망칠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다. 

사랑스러운 사람들인가?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그냥 사랑하신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언제까지 사랑하시는가? 끝까지 사랑하신다. “끝까지”라는 계속해서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영원토록 사랑한다는 말이다. 최대한으로 full로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자기 사람 중에 우리가 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이 예수님의 자기 사람이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그냥 사랑하신다. 끝까지 그냥 사랑하신다. 
사랑에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아픔도 감내해야 한다. 사랑스런 사람을 사랑할 때는 사랑의 기쁨이 있다. 그러나 사랑스럽지 않은 사랑할 때는 사랑의 아픔이 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사람이란다. 그래서 나는 너를 그냥 사랑해. 아무리 아파도 나는 그냥 끝까지 너를 사랑해’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또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끝까지 사랑해 주면 안되겠냐고. 너를 배신하는 사람이라도 그냥 끝까지 사랑해주면 안되겠냐고. 이왕에 사랑한 거 끝까지 사랑해 주면 안되겠냐고. 

2. 마귀는 끝까지 시험한다. 

태초부터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했다. 원수 마귀는 제자 중에 가룟 유다에게 시험을 걸어왔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어주었다. 유다가 생각을 거부하지 않고 품어 버렸다. 그 생각이 유다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 
유다의 생각이 어두움에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더라.” 가룟 유다는 사탄이 넣어준 생각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은 30에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긴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자살하여 죽고 말았다. 그의 인생 전체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고 만 것이다. 

욕심에서 나오는 숨은 동기를 속히 버리라. 위험하다. 암세포처럼 위험하다. 숨은 동기를 
그럴듯한 명분을 찾아 포장하지 말라. 그러면 더 위험하다. 
욕심에서 나온 숨은 동기는 마귀의 공격루트이다. 마귀는 거짓을 좋아한다. 
우리의 생각 속에 무엇을 담아두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성령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마귀가 역사할 것이다. 그 생각을 끝까지 품고 있으면 마귀는 끝까지 역사할 것이다. 그러면 가룟 유다 같은 어두운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 이제는 올무에서 발을 빼라. 이제는 미끼에서 입을 떼자.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 

3. 존중의 뿌리는 사랑이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신 자리에서 하신 일이다. 그 날 저녁 분위기가 아주 이상했다. 예수님은 그 날 밤 체포되실 것을 알고 계셨다. 내일이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내다보고 계신다. 그 심정이 어떠셨을까?!!!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누가 더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눅22:24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제자들의 자리다툼은 처음이 아니다. 전에도 이 문제로 다툰 적이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실거라는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에도 제자들은 자리 문제로 다투었다. 누가 예수님 좌우편에 앉을거냐로 다투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예수님 우편에 베드로가 앉았을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이니까? 

제자 3인방 중에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이다. 좌편에는 누가 앉을까? 형제지만 갈등하고 있었을 것 같다. 그 자리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있었다. 형제의 어머니까지 나섰다. 
마20:21절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나머지 열 제자가 두 형제에게 분을 내었다. 

그날 저녁 최후의 만찬 자리 분위기가 그랬다. 보통 식사 전에 손과 발을 씻는데, 그날 저녁에 제자들 중 아무도 예수님의 발 씻을 물을 가져온 사람이 없었다. 손발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릴 생각을 않았다. 자기가 높아지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임종을 하는 자리에서 재산 싸움을 하는 자식들과 같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예수님이 식사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시면서 말씀하신다. 눅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겉옷을 벗으셨다. 겉옷은 신분의 상징이다. 주와 선생이신 신분을 제자들 앞에서 내려놓고 계신 것이다.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동이셨다. 겸손함으로 낮아지신 것이다. 종처럼 낮아지신 것이다. 
베드로는 나중에 허리에 수건을 동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벧전5:5)"고 권고했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표현을 악수로 하지 않으셨다. 허깅으로 하지 않으셨다. 안수기도로 하지 않으셨다. 사랑으로 발을 씻어주셨다. 
종이 주인을 존중히 여기는 것처럼 제자들을 존중히 여겨 주신다. 겸손하심으로 섬기신다. 
사랑이 없으면 존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섬기지 못한다. 도와줄 수는 있다. 
사랑이 없으면 고자세로 도와준다. 교만한 자세로 무시하면서 도와준다. 

사랑없는 도움을 받으면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다. 모욕감을 느낀다. 도움을 받기 했는데 상처를 더 크게 받는다. 그러나 사랑하면 존중히 여긴다. 그래서 겸손해진다. 겸손으로 섬기게 된다. 도움보다 사랑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하신다. 최고로 존중히 여겨 발을 씻겨 주신 것이다. 사랑하면 존중하게 된다. 존중하면 섬기게 된다. 사랑은 존중의 뿌리이다. 섬김의 뿌리이다. 

내가 아프면 남 생각 잘 못한다. 내 몸만 생각한다. 그래서 간병하는 사람이 힘들다. 
급하면 남 생각 잘 못한다. 내 일만 눈에 보인다. 생각난다. 그래서 남의 일 신경 못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실 일만 생각한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생각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부터 씻으셨을까? 베드로는 아니다. 베드로의 발은 맨 나중에 씻어주신 것 같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아닐까? 이제 곧 배신하고 떠날 가룟 유다이지 않았을까? 
베드로가 자기 차례가 되자 거절한다. 8절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리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8절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면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요구한다. 범사에 적극적인 베드로다운 행동이다. 
10절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그들의 죄를 씻어주실 십자가의 피를 생각하신 것이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은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깨끗함을 받았다. 영원토록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은 십자가이다. 최고의 섬김은 우리 죄를 영원히 씻어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또 죄를 짓는다. 발에 먼지가 묻는 것처럼, 그래서 회개함으로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한다. 요일1: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은 서로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신다.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주와 선생이 모범을 보인 것처럼, 종인 너희가, 제자인 너희가 본을 받으라고 하신다. 
교회들이 성찬식은 다 한다. 그러나 세족식은 안한다. 예수님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 하셨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발을 씻어주는 교회가 되기를 힘써야 하겠다. 

*집에 가셔서 가족끼리 세족식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아내의 발을, 남편의 발을 서로 씻어드리면 좋겠다. 자녀의 발도 함께 씻어주자. 
추석 명절 때 고스돕 대신 세족식을 해보면 근사할 것 같다. 그래서 가족끼리 사랑의 마음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존중히 여겨주는 마음이 서로 통했으면 더 좋겠다. 
셀 예배 때도 1년에 두세 번은 세족식을 했으면 좋을 것 같다.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면 서로 섬기는 셀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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