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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헛된 죽음 (삼상 31:4, 마 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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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죽음 (삼상 31:4, 마 26:24)


18세기 미국의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게다가 '복음적인 설교에서도 지식을 전해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반드시 어떤 모양으로든지 서로가 지식을 얻고 또 공급하여 성장되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12;27, 엡 4:12). 따라서 자살과 지옥에 관한 교리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적 지식으로 인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삶의 마지막 행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히 6:6). 

우리나라에서 하루 100명이 넘는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살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2003년 국제자살예방협회가 주관하고 세계보건기구(WHO)가 후원해 제정한 날인 ‘세계자살예방의 날’을 하루 앞둔 9일 보건복지가족부가 발표한 '우리나라 자살예방정책 수립에 있어서 고려사항'이라는 문건에 따르면 연간 우리나라 자살 시도자는 모두 3만7289명으로 추산됩니다. 복지부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국가응급의료정보망(NEDIS) 자료와 2006년부터 2008년까지의 응급실 내원환자 표본 심층조사의 자료 등을 활용해 이 같은 추산을 내놓았습니다.

‘자살하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라는 엄중한 명제를 저는 오로지 성경말씀만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 하에 논증하고자 합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과거의 유명한 신학자들의 말들을 이용하여 주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그들의 말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과 지식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롬 10:17, 고전 1:5~6, 4:20, 벧후 3:18). 

자살과 지옥에 대한 성경적 고찰을 위해 우선 저는 이 명제를 논하기 전에 두 가지의 중요한 단어들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단어들은 ‘자살’과 ‘지옥’입니다. 이 단어들에 대한 분명한 빛을 소유하게 되면 그 다음 큰 흐름의 내용들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러면 ‘자살’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루에 평균 100명 넘는 자살을 가져오는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46%가 '가족 갈등' 원인이고, 남성 40∼50대가 가장 많고 여성은 80대· 20∼30대순(順)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중 가장 심각한 여향을 주는 우울증은 사회적 편견으로 제때 치료 못 받아 자살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자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살’은 ‘자살하는 자의 삶의 종지부를 찍는 죽음’을 의미하며, ‘죽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살을 택했다면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으며 ‘더 살아야 하는 생명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신앙이 어떠했는지에 상관없이 그는 신앙적인 삶의 마지막을 자신을 죽임으로써 끝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자살은 단순한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생명이신 하나님(요 11:25, 엡 4:18, 골 3:4)을 저버리고 사망인 사단(고전 15:26, 히 2:14)을 받아들였다는 것과 그는 사후의 백 보좌 심판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계 20:11~14). 

그러면 왜 사람들은 자살을 하게 될까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자살하면 모든 것이 끝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이 땅 위에 남겨진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와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죽음 후에 자신에 대하여 해결해야 하는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알고 있더라도 무시하였을 것입니다(딤전 5:12, 히 9:27, 계 20:12~13).

여기에 사단은 자살과 미혹의 영을 이용하여(요1 4:6) 이러한 진리를 감추어왔거나(고후 4:4) 그에게 도외시하도록 미혹하였을 것입니다(마 24:4, 고전 6:9, 딤전 6:10). 사단의 이러한 유혹은 신자들의 생각을 이용함으로써 자기의 계획을 성취시키고 있습니다(요 13:2, 27). 

다시 말해서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불행이나 고통 또는 괴로움이 아니고 사단이며(불행, 고통 또는 괴로움 그 자체도 사단이 가져다주기 때문에), 자살을 행하는 원인은 자살 후의 결과에 대한 영적 진리의 무지함 또는 무시함 때문입니다.  

사단에 의한 자살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에 동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고(고전 1:17),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더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히 6:6).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을 저버리는 것임으로 어떤 경우에도 자살해서는 결단코 안 됩니다(엡 4:18). 

2. 자살과 지옥에 관한 교훈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지옥에 대한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자살자의 실례를 살펴봅시다. 

1) 아비멜렉의 자살 (삿9:54) 

아히도벨은 여인에게 죽음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자살한 예입니다. 

2) 삼손의 자살(삿16:30)

삼손은 원수를 갚기 위해 집을 무너뜨리고 자살한 예입니다. 

3) 사울 왕의 자살 (삼상31:4) 

사울 왕은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모욕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자살한 예입니다. 

4) 사울의 뒤를 따른 신하의 자살(삼상31l5) 

사울의 신하는 왕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왕에게 충성하는 의미로 자살한 예입니다. 

5) 아히도벨의 자살(삼하17:23) 

다윗왕의 모사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채택되지 앉자 패배를 직감하고 자살한 예입니다. 

6) 시므리의 자살(왕상16:18) 

시므리는 왕권 쟁탈전에서 패배하여 집에 불을 놓고 자살한 예입니다. 

7) 가룟 유다의 자살(마27:5)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죄책감에 못이겨 자살한 예입니다. 

이제 두 번째 단어인 ‘지옥’에 관한 교훈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의 존재에 대하여 자유함과 구원받았음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요? 성경에 의하면 지옥은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마 25:41, 계 20:10).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을 포함하여 사단을 따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도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요2 1:7~11, 계 19:20, 계 21:8). 이 지옥 불은 또한 둘째 사망으로 표현된 불 못 안에 있는 불이며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 즉 바다 가운데 죽은 자들, 사망과 음부 가운데서 죽은 자들이 백 보좌 심판을 받은 후 고통 중에 영원히 거하는 장소로 표현되어 있습니다(계 20:12~15, 계 21:8). 

지옥에 해서 성경적인 지식은 우리에게 <사단과 그의 타락한 천사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사단을 추종하며 따르는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는 장소로 지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러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한 답을 여러 곳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마 5:21~22, 마 5:27~30, 마 23:29~33, 롬 1:24~32, 고전 6:9~10, 갈 5:19~21, 엡 5:3~7, 계 19:20, 계 20:12~15, 계 21:8). 다만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자살하는 자는 모두 지옥 불에 떨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자살과 지옥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자살하는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면 그가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 받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살하는 경우를 고찰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살하는 자가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의 하나의 장소에만 가도록 정해졌는지 아니면 제3의 장소에 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이 죽음 후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인 제3의 장소, ‘낙원’(파라데이소스)이라는 곳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3:43, 고후 12:4, 계 2:7). 여기서 저는 자살하는 자의 최종적인 종착지로서 장소를 논하고자 하기 때문에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의 하나의 장소를 택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3. 자살하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성경적인 이유 

어떤 이유로도 자살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자실은 6계명을 범하는 죄악입니다. (출20:13) 살인하지 말지니라. 타인을 살해하는 것도 죄요 자신을 죽이는 것도 살인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자요 모든 생명에 대한 주권자 입니다. (창1:26-27)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사람의 장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자살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불신하는 것입니다.(시31:15) 자살은 하나님의 계획을 불신하는 것입니다.(요3:16, 14:1) (요3:16)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독생자를 주셔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계획시고 역사하십니다. 자살은 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불신하고 도전하는 죄악입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역하는 것입니다.(고후12:8-9)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족한 은혜입니다. 생명 자체가 은혜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은혜입니다. 시인은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실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정면으로 반역하는 것입니다. 

자살은 범죄 한 인간의 최종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사람은 막다른 길에 이르면 죽음을 택하려 합니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초종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생존법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낳아 주시고 길러주시고 교육시켜주신 부모님께 대한 최악의 불효입니다. 많은 스승과 수많은 친분과 가족과 동기들에게 씻지 못할 욕을 끼치는 범죄행위입니다. 자살은 결코 자유의지에 의한 문제해결의 방법이 아닙니다. 자살은 결코 용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비겁한 문제해결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문제해결의 방법은 자살이 아닙니다. 믿음과 회개와 기도입니다. (요14:1,시50:15, 약5:13, 계3:19) 

그러면 저는 지금부터 본 글의 주제인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성경을 사용함으로써 논증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검인 말씀을 가지고(엡 6:17, 계1:16, 계 2:16) 자살과 미혹의 영에 대항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근거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이유 - 성경적인 실례들 때문에 

저는 어떤 신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진의를 살펴봄으로써 본 논증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자살이 죄는 되지만 지옥 심판을 받는다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자살은 죽음을 의미하므로 자살 후 그는 반드시 지옥 아니면 천국에 가도록 정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신학자의 말대로 자살 후 그에 대한 지옥 심판의 성경적 근거가 없다면, 반대로 천국으로부터의 환영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있을까요? 

그가 말하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저는 자살자의 지옥 심판에 대한 성경적인 예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천국 상급에 대한 예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살자가 지옥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우를 구약과 신약성경으로부터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에서는 사울 왕의 경우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31:1~6).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니 병기 가진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칼에 엎드러져 죽으니라.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대상 10:4~14) 

사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자기의 칼끝을 세우고 그 위에 엎드러져 자살하였으며 이로써 그는 분명히 지옥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죽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사울을 죽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천국에서 그를 환영하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행 1:24~25) 

위의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는 가룟 유다는 자살하였으며 분명히 지옥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마 26:24)은 유다의 지옥 심판에 대한 확신을 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기도문을 보면 유다는 제 곳으로 갔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자살하는 자가 자살 후에 마땅히 가는 곳 즉 지옥으로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문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살 경험을 해보지도 않았으며 자살 후 어느 곳에 가게 될 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영적 지식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이러한 진리의 기도를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그러면 이제 우리는 유다가 지옥에 간 이유를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숙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죄를 지었기 때문에(이 경우는 예수님을 판 죄를 가리킵니다) (2)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3)자살했기 때문에. 

(1) 첫째로, 유다의 죄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유다는 자기의 직무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도록 했기 때문에 죽어야 하고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유다는 제 갈 곳으로 간 것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유다는 예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지 자살하였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라면 모든 제자들(마 26:56), 베드로(마 26:69~75), 바울(행 8:1~3) 등도 모두 지옥 불에 떨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유사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으며 저주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입니다(마 26:74~75). 

하지만 이들과 유다와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점이고 사단에게 점유당한 유다는 일시적으로 양심에 죄책감은 느꼈지만(마 27:3~5)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자살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유다가 단순히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논리는 희박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2) 둘째로, 유다의 회개하지 않은 것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유다가 지옥에 간 것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자살 때문이 아니라고 반문하실 지도 모릅니다. 이 회개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반복적인 죄와 연결하여 탐구함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더 엄격하게 근본적으로 말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회개 여부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는가와 그것의 지속성의 문제입니다(물론 맨 처음 거듭나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그 자녀가 죄를 범했고 일시적으로 회개의 기회를 놓쳤어도 지옥에 가질 않고 아버지의 나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5:1~5).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죄를 생각나게 해주시고 회개를 하도록 깨우쳐주시고 권면하고 계십니다(요 14:26, 고후 7:1, 딛 3:5). 

그럼에도 성경은 어떤 죄를 회개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지옥에 가는 경우에 대한 경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은 후 회개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우리의 마음과 터가 굳어지게 되고 뿌리가 박혀서(엡 3:17) 같은 죄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 죄에 익숙하게 되고(렘 13:23)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결국은 극한 상황에 가서는 자살까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죄든지 우선적으로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회개를 하지 않고 반복적인 죄를 지음으로 지옥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나오는 두려워하는 자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처음에 한두 번 이런 종류의 죄를 지은 후 회개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계속 죄를 짓게 되면 그들의 마음은 굳어지게 됩니다. 이제는 그들의 삶과 생활 자체가 두려워하는 것이고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별명 또는 이름이 '두려워하는 자(the fearful)'와 '거짓말 하는 자(liars)'가 되고 그들의 종말은 '둘째 사망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와 반복적인 죄의 연속성과의 상관관계로 비추어볼 때 유다의 경우를 회개의 문제로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3) 셋째로, 유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에 갔느냐의 경우입니다. 

이제 제자들과 유다와의 남아있는 차이점으로는, 제자들은 자살을 하지 않았으나 유다는 자살을 했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차이점은 제자들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으나 유다는 지옥에 떨어졌다는 결론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렇듯 제자들과 유다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적인 진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자살하게 되면 자살 후 가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자살하는 자가 가는 곳, 즉 ‘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의 세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결론을 만들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은 최악의 상황에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회개의 여부는 자살 행위의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죄를 짓지 않았을 경우에도 삶의 고통 등으로 인하여 자살한다면(이 경우는 삶의 고통이 자살로 이끄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살 후 마땅히 가는 곳이 제 곳 즉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자살로 인하여 지옥에 던져졌다는 진리를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의 기도 중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마음까지도 아시고 자살 후의 가야하는 장소에 대한 영적 지식도 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기도를 통하여 알았을 것입니다(요 16:30~31, 21:17, 요1 3:20).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베드로의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하지만 어떤 분들은 ‘사울 왕과 가룟 유다의 경우가 거듭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와는 다르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자 합니다. 우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비신자들의 경우는 그들의 죽음의 종류에 상관없이 지옥에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따라서 사울 왕과 가룟 유다를 이러한 그룹 속에 넣고 생각한다면 저의 논증은 헛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살에 의한 죽음 사건을 가볍게 보시지 않고 성경에 자세히 기록하셨습니다. 

사울 왕의 자살 사건은 구약 성경에 두 번이나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선지자 나단이 쓴 사무엘상 31장에 나와 있으며 두 번째는 제사장 에스라가 쓴 역대하 10장에 적혀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고 기록되어 왔습니다(시 69:25, 시 109:8, 슥 11:12~13). 더구나 유다의 죽음은 그가 죽었을 때의 정황과 그 후에 된 일에 대하여도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7:3~10, 행 1:18~19).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자살로 인한 죽음을 이토록 세밀하게 기록하셨을까요? 이것은 후대에 사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그러면 저는 지금부터 사울 왕과 가룟 유다의 상태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기스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기름을 붓도록 하셨던 인물이었습니다(삼상 10:17~24, 11:14~15).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세 종류의 사람들 즉 왕, 선지자,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이었던 사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만난 이후 한 번도 주님을 ‘주’라고 부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랍비’ 즉 ‘선생님’으로 불렀지만 여전히 맡은바 직임인 회계 직을 주님의 12제자들 중의 하나로서 수행해 왔습니다(요 13:29). 허나 돈에 대한 욕심이 그에게 주님께서 주신 직임을 버리고 주님을 배반하고 사망을 선택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는 말씀대로 욕심에 의해 자신을 죽였던 것입니다. 

5. 자살에 대해 성경말씀으로 알려주신 교훈

사울 왕과 가룟 유다의 사건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님의 강림하심 전의 이야기이므로 이들은 분명히 오늘날의 우리들의 신자들과는 다른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름 부으심과 제자 삼으심으로 인하여 그들을 현재의 우리 신자들을 향한 과거의 대표자로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본다면, 구약과 신약 시대에서 이들의 자살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의 영적인 교훈으로서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위에서 살펴본 성경적인 예들을 통하여 우리는 자살하는 자가 지옥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가 자살하는 경우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어디에도 자살하는 자가 천국의 상급을 받는다거나 천국으로 인도된다는 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살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인 예들이 바로 자살을 하면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살의 유혹과 충동을 이겨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살의 유혹을 받습니다. 야곱(창37:34-35) 모세(민11:14-15) 엘리야(왕상19:4) 욥(욥3:20-21) 솔로몬도 (전2:17) 요나(욘4.3,8-9)가 죽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살의 충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럼으로 자살의 유혹과 충동을 물리쳐 이겨야 합니다. 그 방법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창1:26-27, 2:7) 

2)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합니다.(고후12:9, 신7:8) 

3) 자살은 살인이요 자살 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출20:13, 히9:27) 

13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은 타살보다 죄가 더 크다'고 했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자살자가 지옥에서 받는 형벌을 살인자 못지않게 가혹하다'고 했습니다.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자살미수자는 교수형에 처했고, 자살한자는 그 시체를 말이 끌고 만인에게 공개시키고 그 재산을 몰수하고 그 시체는 교회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현대 상선 정몽헌 회장의 자살 때에 빈소에 쓰이는 공간이 1000평이 되고 조문객이 1만명이 되고 5일장에 하루에 공기 밥만 1500그릇이 소비되었고 안내위원이 매일 300명씩 수고하고 각계각층에서 조화가 350개 이상이 들어왔고 한 송에 1000원 하는 국화꽃 매일 평균 1,000송이가 넘었고 장례식 행렬에는 2,000명이 따랐으며, 장례비용은 자살자의 아버지 정주영씨의 장례비용 8억원 보다는 검소하게 치루었다고 합니다. 또한 최근에 이슈가 된 전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는데 그 비용은 어마어마하게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살자가 누구이든지 그의 장례가 어떻게 치루어 지든지 세상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자살은 살인이요. 그 후에는 지옥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참아야 합니다(시31:15, 약5:7). 그리고 궁극적인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딤전6: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생명경시와 자살증후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부터 자살자가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를 추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2005년 '자살예방 5개년 계획'을 세우고 2004년도의 10만명당 자살사망률 22.8명을 2010년 18.2명으로 줄인다는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입니다. 하지만 자살률은 2007년 24.8명, 2008년도 26명으로 오히려 늘었습니다. 

교육과 예방대책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창조자와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죽은 뒤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신앙과 시련과 위기를 극복해는 믿음과 하난님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참된 믿음으로 나에게 허락해 주신 삶의 기간인 생애를 하난의 선한 도구로 헌신하여 고귀한 삶을 누려야합니다. 자살은 무서운 심판받을 죄악임을 알고 자살의 유혹과 충동을 믿음과 기도와 회개로 물리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며 나의 육체의 남은 기간을 충성하며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모두 다 이러한 구원을 상실하지 않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모든 사람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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