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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히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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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히 11:1)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의 장에서 1절의 믿음의 정의를 이렇게들 말합니다.
"더 완전하고 더 일반적으로 적절한 믿음의 정의는 여기에 제시된 것 말고는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역사적인 묘약의 시초로부터 포괄적이요 일반적인 믿음 자체의 정의가 제시되는 것은 가장 적절한 정의이다"(델리취)말합니다.  이 말을 빌려"진정한 종교적 신앙의 본질, 성경이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르는 바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겠다"(렌스키는)고 하기도 합니다.  

1) 믿음은 소망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목적과 믿음의 목적은 같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구원, 의, 영광, 미래의 삶, 부활, 최종적인 보상 및 은혜, 재림 영생 등 다앙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것을 믿고 또한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강할 때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맛보고 가지게 됩니다.
  
바람(소망)의 방향을 (1) 이 세상 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 (2) 감각보다 성령을 바라는 것 (3) 현재 보다 미래를 바라는 것이라 합니다.(모펫) 그러므로 믿음은 소망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사람의 지각운동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을 사실로 마음에 인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바라보는 방법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그것을 바라보는 방법과 상상력, 의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꿈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아인슈타인(Einste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나폴레옹(Napoleon)은 “상상력은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꿈에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바로 그 창의력, 상상력, 꿈을 만들어 내는 힘이 믿음에 근거하며 믿음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 정치인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물다섯 살 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는 주님,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영국에 잡혀 온 노예들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그들의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고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월버포스는 스물일곱 살 때 노예 폐지 운동을 일으키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 하나님께서 부담과 관심으로 주신 일을 깨닫고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그것에 집중합니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노예 해방을 위해 헌신한지 56년 만에 영국 의회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56년 간 반대도 많았고 암살 위협도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싸워서 이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소망과 함께 함을 확신 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2)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상(휘포스타시스(u`postasijs)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받쳐 주는 것(prop)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소망을 염두에 두고서 그것을 따라 살도록 받쳐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받쳐 주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성경과 신자의 마음이 서로 화합 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히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 아무리 믿기 어려워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게 되어 집니다.

(시 19: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양에 대한 목자의 음성 같이 반가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요 1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니 그 관계는 심히 뜨거워 생활 전부를 지배하는 것이니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한 것입니다

[아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러한 관계로 믿음은 온 인격을 받쳐 주는 실상입니다
  
어느 한 남자와 자기 자신의 자녀와 동네 놀이터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놀이터가 너무 다듬어지지 않았고 누추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면서 좀 더 근사한 놀이터가 왜 없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에 꿈을 꿉니다. 

과학과 자연이 어우러지고 새로운 꿈이 펼쳐질 수 있는 그러한 공원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믿음으로 일구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러한 공원이 로스엔젤레스 교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디즈니랜드(Disneyland)입니다. 이 꿈을 꾸었던 사람이 월트 디즈니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다른 꿈을 꿉니다. 온 세계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원을 만들자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디즈니월드(Disneyworld)를 구상합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는 실천에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올랜도라는 곳에 디즈니월드가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월드가 완성되기 전에 죽고 맙니다. 

드디어 디즈니월드가 완공되고 이제 오픈을 합니다. 그리고 각계인사가 와서 축하 의식(ceremony)를 갖습니다. 그때 한 인사가 나와 축사를 하면서 월트 디즈니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월트 디즈니의 미망인인 디즈니 여사가 단 위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회중들을 향해 이야기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까 하신 분의 말씀을 정정해야 하겠습니다. 제 남편은 이미 디즈니월드를 보았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디즈니월드가 있었고 그 디즈니월드를 보며 살았습니다.” 

(2) 실체(substance)입니다

신앙은 실체를 바라보는 실체를 붙잡는 것과 같은 가치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실체는 믿음이 바라보는 대상인데 이 대상은 직접 대상이 있으며 긍극적인 대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두루 돌 때 그 믿음의 바라보는 직접 대상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바라보는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믿는 자는 그 믿음에 의해서 얻어 지는 직접 대상에 머물지 말고 그 궁극적인 대상인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바라는 직접대상을 얻지 못해도 그 궁극적인 대상인 하나님을 믿음에 의해서 모신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병이 낫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믿음의 실상을 얻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환자가 궁극적 믿음의 실상인 하나님을 더욱 믿게 되었을 때 이 믿음도 역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바라보는 것들의 참 실상은 하나님이심을 믿어야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그러하지 아니하실 지라도의 신앙이 이 신앙이요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신앙입니다 

(3) 확신(assurance)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실하고 확고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에 속하지 않고 미래에 속하며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아직 갖지 못한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사를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미래에 산 민족이었는가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힘은 갈바를 알지 모했으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본토 찬척 아비집을 떠납니다
요셉은 꿈꾸는 사람으로서 그 꿈을 간직하며 살다가 마침내 그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산지를 달라고 해서 정복합니다
초대 교회의 불가항력적 생명력도 미래에서의 기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에 대한 소망과 기대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아직 얻지 못한 사물을 이미 소유 한 것처럼 확신하는 것입니다.
확신하는 자에게는 바라는 것이 곧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종달새의 알에서 종달새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에머슨-Emerson)하기도 합니다.

안젤라는 열한 살에 신경계통을 포함한 신체무력증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걸을 수도 없었고 몸의 움직임도 한정된 부분만 가능했습니다. 의사들도 그녀에게 별로 희망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평생 휠체어에서 보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한  살의 소녀는 의지를 잃지 않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걷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는 시각화 요법을 실시했습니다. 자신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머리속으로 그려보고 상상해 보는 방법입니다. 치료에 도움이 된다기 보다는 적어도 상상하는 그 시간 동안만큼은 그녀에게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상상 속에서 걷고 걷고 또 달리는 꿈을 매일 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젤라가 침대에 누워 최선을 다해 자신의 두발을 움직이고 있는 생각을 하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침대가 이리저리 그 방을 움직여 다녔습니다. 안젤라는 소리쳤습니다. "이것 좀 봐요. 드디어 해냈어요. 난 해냈다구요. 내 몸이 움직였어요." 그런데 이 순간 병원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대피소로 갔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장비들은 바닥에 굴러다니고, 유리제품들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바로 그 날이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로 이 사실을 안젤라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해내고야 말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난 다음에 그녀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서, 목발이나 휠체어 따위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후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라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일대의 대지를 뒤흔들 만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하찮은 병 따위를 정복할 수 없겠는가?” 
  
미국인 해리(Harry)라는 사람은 방광암에 걸려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처음 좌절감에 사로잡혀 자포자기 했는데 말씀에서 새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을 붙잡고 마음에 영상을 뚜렷하게 그렸습니다. 백혈구가 폭포 같은 힘찬 위력으로 암세포를 파괴시키고 있다는 영상으로 하루에도 수백번 그렸는데 몇 달 후에 그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4) 부동산 권리증서(title-deed)입니다

희랍의 여러 문헌에는 부동산 권리 증서를 제안하며 파피루스에 사용된 이 단어는 재산목록(inventory)과 같은 의미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비천한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저주아래 있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주님이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저주대신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두 불안해서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합니다. 왜 ‘8자’라고 하는가? 아라비아 숫자 1, 2, 3, 4, 5, 6, 7, 8, 9, 10 가운데 8이라는 숫자는 고치지 못하기 때문에 팔자소관이라고 한답니다. 1부터 다른 것은 다 고칠 수 있습니다. 1을 7로도 고칠 수 있고 2는 3으로도 고칠 수 있고 잘하면 5로도 고칠 수가 있습니다. 3도 8로 고칠 수가 있고 9로도 고칠 수 있고 다 가능하다는 거예요. 9도 8로 고칠 수 있고 다 되는 겁니다. 그러나 8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팔자소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안 된다는 팔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주팔자에 유명한 어느 점쟁이가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보니까 완전히 망해가지고 죽을 사람이 너무 잘 있고 좋은 옷 입고 그렇게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가 막혀가지고 ‘참! 내가 평생 배워 본 바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벌써 비참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그래가지고 그 사람 가는대로 가방 들고 가는대로 뒤 따라 가보니까 큰 좋은 집, 으리으리한 문으로 들어가는데 문 입구에 교회 명표가 딱 붙었더래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를 못 만나도 낙심을 안 합니다. 어떤 불행한 조건을 가져도 그것 때문에 불행 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주님을 믿으면 불행은 없습니다. 저주는 없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5) 근거(ground)입니다

칼빈이나 슈티어 같은 사람은 이 말을 근거라는 옛날의 개념과 연결시켜 생각한다. 다시 말해 각자 나름대로의 바라는 것들을 근거로서의 신앙과 연결시킵니다.

1903년 미국의 한 형제는 하늘을 날겠다는 꿈을 바라보았었습니다. 그들은 자동차 자전거를 만드는 고치는 점포를 가지고 있으면서 라이트 삼형제가 항상 그들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꿈인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는 하늘로 날지 못한다는 물리학의 정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사람 무식하기 짝이 없다. 공부를 안해서 물리학의 법칙도 모른다. 공기보다 무거운 것은 날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이트 삼형제는 열심으로 열심으로 꿈을 꾸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나는 비행틀을 만들었고 그것이 오늘날 보잉 747이 되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수백명을 태우고 날라갔다가 날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꿈을 꾸는 세 형제 때문에 그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꿈을 꾸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헨리 포드라는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는 학교 수업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가 바라볼 때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말이 끌지 않고 자기 힘으로 가는 수레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꿈꾸었습니다. 그가 직장에서 돌아오면 집 뒤뜰에서 뚱땅 거리고 망치를 때리고 야단법석을 해서 부인이 항상 걱정을 했습니다. 그는 자동차. 자기 스스로 달리는 차를 만들겠다고 애를 쓴 결과 그 꿈이 이루어져서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원조인 티포드를 만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임을 확신하며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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