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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하는 사람들의 4가지 습관 (삼상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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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는 사람들의 4가지 습관 (삼상 15:1~9)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소원합니다.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인데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죠. 실제로 성공하는 사람들을 꼽아보면 극소수에 불과한 게 현실입니다. 아이러니컬합니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하고 나름대로 애를 쓰는데 성공하는 사람이 드물다니! 그래서인지 신문, 방송, 도서 등을 보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룹니다. 

그 가운데 성공에 관한 좋은 책으로 꼽히는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김영사)입니다.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책입니다. 자기계발과 리더십 분야의 전문가인 스티븐 코비가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연구 분석한 결과 공통적인 삶의 태도 즉 습관이 있음을 제시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성공 사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해 줍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는지 모릅니다. 무려 70개국에서 출판되어 2,5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된 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판매되고 있고, 벌써 수년 전에 100만 부가 훨씬 넘게 팔렸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한 마디로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남다른 삶의 태도 즉 습관이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실패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역시 실패하는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인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양면을 살펴볼 필요가 잇습니다. 성공하는 이유도 살펴보고, 동시에 실패하는 이유도 살펴봐야 합니다. 실패의 이유를 잘 파악하고 이를 피할 수 있다면 보다 확실한 성공의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오늘은 실패한 한 인물을 통해 인생의 실패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가 누구인가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아무쪼록 사울의 실패 이야기를 반면교사로 삼아 꼭 승리하는 인생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실패한 인생의 전형입니다. 미천한 인간이 왕이 됐으면 크게 성공한 것 같은데, 결국은 실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니 얼마나 놀랍고 안타깝습니까? 아마 구약 성경에서 가장 비참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겉으로 보면 어엿한 신앙인이었지만 진실성이 결여된 명목상의 신자(Nominal Christian)였습니다. 이게 바로 사울이 철저하게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처절하게 실패한 인생이었지 사무엘상을 보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15장에 결정적인 실패의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아말렉과의 전쟁 사건의 기록입니다. 겉으로 보면 승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실패입니다. 아말렉은 대대로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였습니다. 호전적인 족속으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통과할 때도 길을 터주기는커녕 뒤에서 공격하는 등 야비한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악함을 심판하는 차원에서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사울은 그 명령을 받고 군사를 모아 출전했고, 대승을 거둡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셨고, 사울에게 폐위를 선언하십니다. 

삼상15:11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의 죄악으로 인해 심히 탄식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I am grieved)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 하나님이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후회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 미스를 하셨다는 게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는 뜻입니다. 결국 사울은 폐위되고 맙니다. 

삼상15:23 “ ...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 ” 이렇게 폐위되었던 사울은 후일 블레셋과의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삼상31:1~6) 

그러면 이와 같이 사울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에서 4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실패하는 사람들의 4가지 습관입니다. 

[1] 실패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본은 말씀을 듣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전5: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 ” 무슨 말인가요? 말씀을 듣는 것이 형식적인 예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예배에서 말씀이 중심입니다. 말씀이 없는 예배는 없습니다. 아무리 짧은 예배라도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1편을 보면,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시1:1~2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소리를 듣고 사는지!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별의 별 소리가 많습니다. 그 소리들을 다 듣다 보면 헷갈립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살아야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갈피를 못 잡고, 결국 망하고 맙니다. 

마치 이런 우화와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당나귀를 끌고 길을 가는데, 도중에 어떤 사람이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당나귀를 옆에 두고 걸어가다니 참 어리석군요!” 그 말을 들은 부자는 함께 당나귀의 등에 올라타고 유유히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두번째 사람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덩치도 크지 않은 당나귀 위에 두 사람이 올라타는 것은 아무리 짐승이라도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이 내리고 아버지만 타고 갔습니다. 

잠시 후 세번째 사람을 만났는데 아버지를 나무랍니다. “참, 너무 하십니다. 어린 아들은 걸리고 아버지 혼자 타고 가시다니!”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서 아버지가 내리고 아들이 올라탔습니다. 잠시 후 네번째 사람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아들을 나무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버지는 걷고 어린 것이 버젓이 타고 갑니까? 불효가 막심하군!” 이 말도 맞습니다. 결국은 부자가 당나귀를 짊어지고 터덜터덜 걸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인생이 갈 지(之)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환경이 달라져도 변치 않는 절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사람은 좌로 우로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결국은 승리하고 복을 얻게 됩니다. 잠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게 살 길입니다. 승리의 길입니다. 인생 승리의 지름길입니다. 개인적으로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마다 말씀에 집중해야 됩니다. 

여러분, 한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까? 그러면 됐습니다. 그런데 집중이 안 되고 때로는 졸음이 옵니까? 그러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누구 책임인가요? 재우는 목사 책임이요? 자는 교인 책임이요? 둘 다 책임입니다. 피차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인 크리스천 유머집에 보면 이런 조크가 나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예배 시간에 설교하는데 앞자리에 앉는 어르신이 매번 좁니다. 어떤 때 보면 아예 자세를 취하고 주무십니다. 하도 눈에 거슬려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어르신 옆에 손자가 항상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꼬마를 따로 불러서 한 주일에 1불씩 줄 테니까 설교 시간에 할아버지가 주무시면 깨워달라고 부탁합니다. 몇 주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보니까 꼬마가 가만히 있는 겁니다. 화가 나서 왜 깨우지 않았는지 따졌습니다. 그러자 꼬마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깨우지 않으면 2불씩 준댔어요. 그래서 이제 바꿨어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말씀을 경청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소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어요. 말씀을 들어도 집중해서 잘 듣지 않으면 이미 실패는 시작된 겁니다. 아담과 여자(하와)를 보세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신 후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창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뱀(마귀)이 여자에게 접근해서 미혹합니다. 거짓말로 헷갈리게 만듭니다. 동산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하고 하더냐고 묻습니다. 그때 여자가 뱀에게 뭐라고 대답하죠? 창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전혀 다릅니다. 비슷한 것 같은데 아주 다른 겁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도 않았고,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마귀는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여자를 미혹해서 넘어뜨린 겁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비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말씀에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실패하는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안 듣는 것과 잘못 듣는 것도 문제지만,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분명히 아멜렉 족속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남녀, 소아, 젖먹는 아이, 우양, 낙타, 나귀 등을 모두 죽이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아말렉 사람들과 우상숭배에 물든 모든 물건을 없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했나요? 8절~9절. “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이 말씀을 취사선택한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했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게 아닙니다. 부분 순종? 거의 순종? 절반 순종? 모두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인생에서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이 됩니다. 신11:26~28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이것은 신명기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순종하되 온전한 순종을 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이 나옵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을 뭐라고 기록합니까? 순종입니다. 예수님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할 때 하인들이 순종한 게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때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요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아귀까지 물을 부었습니다. 시늉만 한 게 아니라, 온전히 순종한 겁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 장군 나아만이 문둥병 걸려서 고생하다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고침 받은 기적이 나옵니다. 나아만 장군이 먼 길을 찾아왔건만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7번 몸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난 나아만이 돌아가려고 하다가 신하들의 만류로 생각을 고쳐먹고 순종합니다. 왕하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그런데, 왜 많은 성도들이 순종하지 못하나요? 그 잘난 이성 때문에, 알량한 지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사울을 보세요!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물질욕과 명예욕 때문에 고의로 불순종합니다. 아각을 살려두고 과시하려는 명예욕, 좋은 것들을 갖고 싶어 하는 물질욕이 작용한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사울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소탐대실이죠! 부디 저와 여러분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실패하는 사람들은 핑계를 잘 댑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질책합니다. 그때 사울이 뭐라고 핑계 댑니까? 삼상15:20~21. “20 ...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 ” 사울은 좋은 말은 다 골라서 합니다. 핑계의 명수입니다. 

이게 바로 죄인의 특성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그래요!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왜 그랬냐고 지적하시자 아담이 뭐라고 하죠? 또 여자는요? 

창3:12~13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인류의 시조 때부터 핑계를 대고 책임을 전가하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의 특성은 남의 탓을 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겁니다. “누구 누구 때문에” “무엇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로 바뀌어야 합니다. 핑계를 대는 습관을 고쳐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당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인생의 성패는 모두 ‘내 탓’입니다. 스스로 책임지는 습관을 가져야 비로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늘 원망하고 불평하거나 남의 탓을 하고 환경 탓만 하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지지리도 가난했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올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결국 승리합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아버지는 좋은 분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가난한 것도 축복이었습니다.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당했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함으로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4] 실패하는 사람들은 늘 후회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 살다 보면 실패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사실 실패해도 다음번에 승리하면 됩니다. 더 큰 승리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실패하고도 계속 핑계만 대고 늘 후회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은 후회하지 말고 회개해야 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돌이킴과 결단을 포함합니다. 방향 전환입니다. 반면에 후회는 그냥 있는 자리에서 아쉬워하고 마는 겁니다.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후회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회개하는 데 발전이 있습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항상 후회만 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자주 그랬는지 모릅니다. 다윗을 핍박할 때도 얼마나 자주 후회합니까? 다윗이 사울을 결정적으로 죽일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살려주죠. 그때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후회합니다. 그러나 그때뿐입니다. 그의 악행에서 돌이키질 않습니다. 변화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삼상15:24~25. “24 ...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 ” 뒤늦게 후회하고 호들갑을 떨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겁니다. 게다가 그의 마음속에서는 철저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들통 나니까 할 수 없이 하는 사탕발림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데 속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 보세요! 인간적인 능력의 차이입니까? 아닙니다. 어쩌면 사울이 인간적으로 더 잘났는지도 몰라요.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회개와 후회의 차이입니다. 다윗도 실수했지만 철저히 회개합니다. 밧세바를 범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질책합니다. 그때 어떻게 하죠?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 ” 그는 절대 왕권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나단 선지자를 처치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철저히 회개합니다. 이게 바로 다윗이 성군이 된 이유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배반한 것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나 회개와 후회의 차이가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든 겁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후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를 보세요. 

마27:4~5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그는 후회하지만 돌이켜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멸망 길로 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설사 실패했더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철저히 회개하면 연전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울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마음 속 깊이 새기시고 반면교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실패의 습관에 빠지지 말고 꼭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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