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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다시 사셨네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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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28: 1~10
제목 : 예수 다시 사셨네

   
기독교의 신앙의 근거는 부활입니다.
 
성경학자 리치만이는 말하기를 ‘십자가로 세상의 모든 삶을 결정짓고 부활로 새 삶을 시작하셨다. 인류의 모든 역사를 십자가 위에서 청산하시고 새로운 삶을 부활가운데 시작하셨다’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는 신앙의 기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죽음과 십자가의 헌신만이 아니요 새롭게 사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능력의 종교입니다. 
 
  먼저 부활 사건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부활 그것은 바로 성경에 예고하신 그 말씀대로 응하셨던 사건입니다. 주님이 수난을 예고하면서 ‘내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다시 3일 만에 부활하여 내가 갈릴리로 갈 것인데 거기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천사가 그렇게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생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 뿐만아니라 심지어 그의 옷을 제비뽑는 것과 십자가상의 칠언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이었고 그 말씀의 예언의 응답이었습니다. 부활의 사건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권위와 예언의 응하심을 통하여, 역사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큰 뜻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이,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그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활을 거부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를 속이려고 한 자가 죽고 3일만에 부활한다고 하였으니 이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해달라 그래서 빌라도에게 가서 군사를 얻어다가 무덤을 봉을 하고 거기에 군사를 세우고 지켰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가서 예수 부활했다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소위 시체도적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자체가 모순을 드러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거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거늘 어찌 오늘 그가 살아계심을 거부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마 예수님이 너무 큰 고통을 받아서 기절했다가 살아나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무덤안에 있어서 돌문을 밀고 나왔다고 하지만 그 모두도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또한 환상설입니다. 여자들은 원래 감수성이 많아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꿈에 예수의 환상을 보고 예수가 살아났다고 얘기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되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이 모두가 근거없는 얘기요, 만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가 있다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번째 부활의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의 기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경험, 사고를 갖고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이해하고 연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의 한계성입니다. 사람이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차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거니와 완전히 죽어 3일 만에 부활했다고 하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정직한 얘기입니다. 아무도 그것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생명의 호흡을 넣으신 이, 오늘도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의 역사이기 때문에 로마서 6장 4,5절을 보면 ‘하나님이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지라 그의 거룩한 능력으로 살리신지라’ 그러므로 부활의 사건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의 역사의 기적인줄 믿습니다.
   
이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나타내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새 생명의 창조입니다. 부활은 옛 모습의 회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학자 칼바트는 말하기를 ‘부활은 새로운 질서의 세계요, 새로운 종류의 세계로 나타나셨고 하나님께서 모든 깨어지고 배척받은 인간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하지만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너희가 죽었었고 너희가 이방인이었고 너희가 객이었고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에 제외되었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라 하였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부활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어록을 살피고 그를 본받아 우리도 그와 같이 선하고 의롭게 완성되어져가는 인격을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생명이 새로운 생명에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로 변화된 삶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 거듭남이라. 새 사람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이 보여주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가치관이 형성되어지고 새로운 삶의 모습들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에서 새로운 날을 창조해주셨거니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새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은 피곤하시고 지치시고 주무시는 그런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고기를 낚는 제자들이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 오셔서 그는 고기를 구우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기도, 잡수시기도 하셨는가 하면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시기도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줌으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고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  홀연히 없어지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가 ‘나는 내손으로 만져봐야 알겠다’고 했을때에 예수님이 그 손을 옆구리에 대시고 ‘내 창자국을 만져보고 내 못자국을 만져보고 나를 믿으라 그리고 너는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라 나를 만져본 자는 믿음을 갖거니와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고 새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새로운 창조였고 질서였습니다. 새로운 긍정이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 그들은 소위 예루살렘의 지성파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시여 당신이 부활이 있다고 말하는데 다시 살겠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풍습가운데에 형이 장가를 들어 후손이 없으면, 그 동생이 형을 대신하여 형수의 남편으로 그리고 또 후손이 없으면 그가 죽었을 때 또 그 동생이 그 형수에게 장가들어 손을 잇게 되어지는데, 한 일곱형제가 살았습니다. 일곱형제가 다 손이 없이 한 여자와 장가들었는데 마지막까지도 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부활할 때 이 부인은 누구의 부인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부활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큰 오해를 하고 있다. 부활하게 되어졌을 때에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고 하늘의 천사와 같이 되어지느니라’하셨습니다. 서양의 미인과 동양의 미인을 보는 가치가 다르고 미의 개념이 다르고 인식하는 것이 다르듯이 새로운 부활은 우리의 가치관이나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신령한 몸인줄 믿습니다.
  
 과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물질의 불멸설을 믿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자가, 없는 것도 있게 하시고 있는 것도 없게 하시는 자가 썩어서 없어졌으니안된다면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내가 이땅에서 불구로 사는 것도 불편한데 내가 만약 죽었다가 부활했을 때에 불구로 태어나면 어떡합니까 나는 그때에는 좀  새로운 몸으로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새로운 존재로 창조될 줄을 믿습니다. 너무 많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 그속에서 새로운 창조질서를 보며 거룩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을 봅니다.
   
   두 번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의 승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의 세력이 가장 크고 가장 위협적입니까? 아무래도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권세 잡은 사탄은 죽음으로 우리를 얽매입니다. 그러므로 귀인도 명인도 영웅도 호걸도 악인도 의인도 모두 다 죽어갔고 모두 죽음의 노예가 되어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 가장 강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선도 모든 공적도 모든 삶도 죽음의 삼킴을 당하고 죽음은 우리를 파괴해 버리고 모든 행동과 삶을 멈춰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 그리스도를 무덤이 가둘 수가 없었고 사망의 권세가 그리스도를 묶어둘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위대한 능력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을 녹이고 새로운 생명으로 목련이 피어나고 아름다운 개나리가 만발하는 것처럼, 예수그리스의 생명이 죽음을 이기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부활의 승리가 되심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죽음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부활을 보고 즐거워 하시가 바랍니다. 죽음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놀라운 환희를 갖는 우리가 되어져 마치 주님처럼 죽음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으며 그의 능력이 무엇이냐고 죽음을 비웃을 수가 있어야 그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이요,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놀랍고 큰 사랑과 은총가운데서 원수를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네’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영광과 찬송을 드릴 수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생명의 위대한 승리의 선포입니다.소망신학자 몰트만은 말하기를 ‘부활 그것은 바로 자유이고 축제이다.’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너희를 해방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세 번째,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소망을 주셨습니다. 몰트만은 말하기를 ‘기독교의 신앙의 근거는 부활에 있으며, 하나님은 이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시고 죄와 죽음을 없이하시며 여기에 소망의 지평선이 열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희망의 지평선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만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고전 15장 14절 이하에  ‘우리의 모든 믿는 것들이 헛되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짐과 우리의 삶을 의탁하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가자’라는 메시지는 서서히 교회에서 사라져갑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의 사업과 삶이 번영할 것이며 내 생이 이 땅위에서 보람찬 삶을 살것인가를 더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러나 내가 여기 사는 것은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함이라’
  
여러분이 여기에 사시는 것은 여러분이 잘 됨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고 우리가 아니어도 그의 일을 하십니다.그의 거룩한 역사에 쓰시고자 우리에게 직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주신 것은 그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전하고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여러 가지 책을 읽다가 보니까 많은 예화들을 봅니다. 어떤 유충이 어느날 갑자기 번데기 속에 꽁꽁 갇혀 있다가 새로운 자기의 몸이 이상하게 변화되어지고 꼬치에서 나와보니 물속에도 더러움 속에도 있지 않고 밝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과거에 유충으로 더러운 물가운데 있었다가 지금은 공중에 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거룩한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된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믿는 우리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부활의 신앙을 어떻게 간직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윌리엄 바클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주님의 명령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리리로 가 그를 만나라. 만일 믿지 않았다면 예수를 만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깨닫고 이해하고 경험으로 알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머리가 혼미해질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흔들릴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엡 2장 8절 이하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말씀은 공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므로 받아 믿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진리의 놀라운 영광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안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생활을 우리의 의지의 결단으로 하려 하지 마시고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주장하고 인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그 능력이 우리의 삶을 지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으라’ 너무 놀라운 사건이요 이해할 수 없기 떄문에 믿어지지 않아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때문에 믿을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소식을 받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저들의 첫 번째 사명이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은혜받고 내가 새사람이 되어져 하나님의 교회에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주님은 내 인생의 삶을  바꿔놓으셨다. 그는 내 삶의 가치와 방향을 바꿔놓으셨다. 오늘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심령가운데 살아계신 그가 나를 붙드시어 내게 책임과 능력을 주셨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그의 말씀을 더듬어 양심적이고 인격적인 훌륭한 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말씀안에서 새 인격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새 생명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선교의 열매요, 하나님의 교회의 존재의 의미는 선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을 닫고 선교의 길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막는 일입니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주께서 살아나셨다고 전해야 합니다.
   
그 당시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전하다가는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이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그들은 ‘저 나사렛예수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그가 바로 메시야이다. 그가 그리스도시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가 부활했는데 내가 보았다. 우리가 증인이다.’ 당시로서는 생명을 내건 증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증거하려고 하니 자존심에 상처를 받습니까? 내 직책과 위치가 부담스럽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내 밑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특별한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  잘못되어질까봐 나는 절대로 예수 믿는다고 안합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종교적인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지 모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귀한 사명을 준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당당하십시오. 담대하십시오.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거나 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역사 가운데 살아계시고 내 속에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증거 하십시오. 선포하십시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뻐하십시오. 
   
예수님이 저들을 만났을 때 편안하뇨라고 말했습니다. ‘칼리에타’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이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기뻐하라 내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였느니라 내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소망이 있느니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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