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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요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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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요 6:1~13)


격주로 극동방송에서 <소망의 기도> 프로그램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양한 문제들이 기도제목으로 올라옵니다. 사람들마다 참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개인뿐이겠습니까? 가정과 교회, 우리 사회 전체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공동체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 배가 뒤집히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데도 불구하고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성도의 가정과 기업에도 문제는 생깁니다. 문제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벗을 수 없는 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 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여기면 그 문제가 우리를 짓눌러 죽게 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면 어떨까요? 문제를 학생이 학교에서 받아오는 숙제 정도로 여기면 어떨까요? 숙제에는 어려운 수학 문제도 있고, 영어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숙제를 다 하면 실력이 더 많이 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그 학생은 문제를 통하여 실력을 쌓고 더 발전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기회>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문제는 <사명>이란 이름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땅히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를 파견하면 그 사람은 사명자가 됩니다. 사명자로 산다는 것,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까?

게다가 문제를 나쁘게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는 부흥과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어느 날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라고 했지요. <큰 무리>가 온다는 것은 부흥을 의미합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그것을 보고 많은 무리가 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수 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여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왔기에 문제도 더 커지고 힘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골치 아프니까 차라리 부흥이 안 되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문제가 더 많아져도 부흥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작은 식당을 열었는데, 손님이 많이 와서 부흥되었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일하는 사람을 두어야 하겠지요. 식당과 주차장을 넓혀야 하겠지요. 부흥되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싫어서 차라리 장사가 안 되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요? <난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싫어>라고 하면서 식당 문 앞에 <다른 식당에 가 보시오>라고 써 붙이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면 신경 쓸 일도 많아집니다. 시설도 늘어나야 합니다. 주차장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더라도 교회는 부흥되어야 합니다. 부흥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면 당장 백 가지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오히려 부흥되지 않아서 생기는 한 가지 문제가 부흥되기 때문에 생기는 백 가지 문제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여러분, <문제없는 인생>을 살려고 애쓰지 마십시요.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들과 정면으로 맞서십시오. 피해서 도망하지 말고,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더 발전하고 성장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문제 해결의 사명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도 부흥하여 부흥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많아지길 원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문제요, 기쁨의 고민이요, 행복한 눈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일까요? 문제 해결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밖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 때 빌립이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7절을 보면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어른의 하루 품삯이니까, 이백 데나리온은 적어도 천 만원 내지 이천 만원 정도가 되는 거금입니다. 빌립은 그 정도의 돈으로 떡을 사와도 부족할 것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돈을 구해서 동네에 가서 떡을 사 오자>, 이게 빌립의 해결책이었습니다. <나가서 떡을 사온다?>, 이것은 해결책을 밖에서 찾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각대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돈도 없었고, 그 곳은 동네와 멀리 있는 빈들이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밖으로부터 도움이 오길 기다리는 방법은 우리에게 좌절감을 안겨줍니다. 우리 민족은 이런 설움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올 때, 우리는 밖을 기웃거렸습니다. 처음에는 청 나라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청 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 패한 후 국력이 급속히 쇠퇴하여 자기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하고 있었고, 급기야 청일전쟁에서 패전하였습니다. 그 후엔 러시아를 의지했지만, 러시아도 러일전쟁에 패해 물러났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미국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일본과 카쓰라 테프트 협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을 삼키고, 미국은 필리핀을 삼키기로 한 상태였습니다. 고종 황제는 이 준 열사 등을 헤이그에 보내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세계의 도움을 구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뿐입니까? 금번에 인공위성 발사에 실패했는데, 러시아의 기술에 의존하는 우리네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밖에서 도움을 구하는 것은 이런 아픔과 절망을 가져옵니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 해결의 방식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안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빌립이 이렇게 대답할 때 제자 안드레가 와서 말했습니다. 9절을 보세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안드레는 동네에 가서 떡을 구해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 결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다>, 이것은 놀라운 시각의 전환입니다. 

열왕기하 4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지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던 한 남자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죽었습니다.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그 남편이 살아 생전 많은 빚을 지고 죽은 것입니다. 빚쟁이들이 와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빚을 갚을 돈이 없으면 두 아들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당시엔 빚을 못 갚으면 종이 되어 팔려가던 시대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도 잃고 자식마저 잃을 위기를 만났습니다.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소연을 했을까요? 당연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때만해도 여인은 밖에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엘리사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기름 한 병이 있습니다> 보세요. 아직 여인에게는 기름 한 병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주는 많은 이웃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이웃 사람들에게 빈 그릇을 빌리라고 했습니다. 당시 그릇은 고가의 생활품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은 말없이 빌려 주었습니다.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빈 그릇을 집안에 들여놓고 문을 닫고 기름병을 기울여 빈 그릇에 기름을 따랐습니다. 기름이 다 차면 그릇을 옮겨놓고, 또 다른 빈 그릇을 가져오는 일을 누가 도왔습니까? 아들들이 도왔습니다. 그녀에게는 아직 두 아들이 건재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왜 밖에 도움을 청하느냐? 먼저 안에서부터 해결책을 찾으라. 아직도 네게는 기름도 있고, 널 사랑하는 이웃도 있고, 아들이 둘이나 있지 않느냐? 해결책은 네 안에 있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안드레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9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정말 의미심장한 표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기 한 아이가 있어>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떡을 가진 아이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해결의 실마리를 가진 아이를 발견하는 것이 해결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인생의 질문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두셨는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하여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미>와 <어머니>의 차이를 아십니까? 어느 가정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시집을 갔습니다. 가서 고생을 합니다. 그럴 때 질문합니다. <왜 나는 여기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나를 여기 두셨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건강한 대답을 할 수 없을 때, 인생에 파국이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 많은 가정을 박차고 뛰쳐나갑니다. 이런 모습은 <어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여인은 생각합니다. <나를 여기 두신 목적은 문제를 해결하게 하심이다. 이 가정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이게 나의 사명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을 바칩니다. 눈물로 자식들을 키웁니다. 그 때 한 가문의 고귀한 어머니가 탄생합니다. 아기만 낳는다고 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도 새끼를 낳습니다. 짐승도 어미가 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되지는 못합니다. 자식을 낳기는 했으나, 문제 해결을 회피하고 떠나는 것은 어미입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분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들은 말합니다. <아가, 엄마가 여기 있다. 울지 마라>, <엄마가 여기 있다>, 어머니들은 이 순간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아이를 지킵니다. 바로 이 순간이 한 여인이 어미에서 어머니가 되는 숭고한 순간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 지역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이 지역은 어둠의 지역입니다. 부산은 기독교인의 비율이 불과 7%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곳은 매년 수천 명의 인구가 줄어드는 어려운 곳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본문에 나오는 아이가 되길 원합니다. <한 아이가 여기 있어>라는 말처럼, <여기 저 김운성 목사가 있습니다. 여기 장로님들이 있습니다. 여기 많은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있습니다. 여기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처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서 6장 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그렇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고, 도탄에 빠진 세상에 등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고백해야 할 때입니다. <주여,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저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시길 바랍니다. 많은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 사회에서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지도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지도자란 문제를 피해 도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도자란 모두가 꺼리는 문제를 향하여 자신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던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일개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인간적인 표현을 빌려서 재수가 좋아서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표현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할 표현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건 헌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할 때, 상대편에 골리앗이란 엄청난 장군이 등장했을 때, 사울 왕부터 모든 장수와 군인들이 모두 피해 숨었을 때,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섰습니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다윗은 만만>이란 칭찬을 얻었고, 이스라엘 앞에 우뚝 서는 리더가 된 것입니다.

영향력은 그저 생기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저와 여러분의 죄와 형벌이란 우주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당신을 던지심으로써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비전입니다.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창립 6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우리 교회가 이 지역의 창고와 같은 교회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현수막에서 보시는 것처럼 롯데빌딩이 들어서는 건너편에 부산을 위한 센터를 건축할 것입니다. 이 건물은 부산 크리스천 센터로서 지역 교회들과 복음화의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복지 사역과 영성 수련을 위해, 교제와 나눔을 위해 쓰여질 것입니다. 이 센터의 건축은 우리 교회가 이 지역의 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던지는 거룩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부산의 등불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교회 이름도 바꾸고자 합니다. 건물이 완공될 때, 부산을 품을만한 이름으로 개명하고자 합니다. 이 거룩한 비전에 여러분 모두가 함께 자신을 던져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길 원합니다.

문제 해결은 거저 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일에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본문의 아이는 자신이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덕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라고 했지요? 아이는 거기 있기만 한 게 아닙니다. 아이는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 나 김 아무개가 있어 손에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손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손에 있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가난한 자들을 먹이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의 것을 취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먹이기 위하여 부한 자들에게서 가져오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한 아이의 것으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삼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난하고 힘들지만, 그 아이처럼 우리의 보리떡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눈물, 땀, 물질, 기도,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을 위해 비전 헌금에 참여해 주십시오. 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참여해 주십시오. 나누어드린 브로셔에 헌금 작정서가 있습니다. 이미 하신 분들 중에 추가로 할 수 있는 분들, 그리고 아직 참여하지 못한 분들은 액수에 상관없이 정성을 모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제 마지막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수천 명을 먹이는 문제가 아이가 거기 있었고, 아이가 드린 떡과 물고기가 있었던 것만으로 해결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이가 거기 있었어도, 아이가 드린 떡과 물고기가 있었어도 해결은 불가능했습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수천 명이 먹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것은 거기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그 떡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손에 올라갈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 해결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 곁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문제를 피해 도망하는 자들을 통해서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문제 한 복판으로 들어갈 때 함께 하십니다. 모세는 노예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그 40년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제가 있는 한 복판, 애굽으로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 교회와 우리 지역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있고, 우리의 헌신이 있고, 우리를 주님의 손에 올려드릴 때,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반드시 비전을 이룰 것입니다. 

이 거룩한 행진에 여러분 모두의 참여가 있고, 교회와 함께 위대한 기적을 맛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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