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막 9:30~37)

  • 잡초 잡초
  • 321
  • 0

첨부 1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막 9:30~37)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유명한 지도자의 한 사람인 ‘론 새니’가 한 젊은이에게 제자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는 종에 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제가 이제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때에 론 세니는 그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모르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종으로 취급할 때, 그 때에 자네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네. ‘네가 나를 무시해’라고 화를 낸다면 자네는 아직도 종이 되지 못한 거야. 남들이 나를 무시하고 종으로 취급할 때에도 자신을 종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 자네는 진정한 종이 된 것이네.”라고 했다고 합니다.  

조건 없는 섬김의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이기심을 극복하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해도 섬김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종이 되십시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이란 “둘로스”라고 하여 노예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다 주님의 종이요, 성도들의 종이 되고, 불신 사회의 종이 되어 주님이 걸어가신 섬김의 삶을 잘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개정역 성경으로 보았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토론한 것’이라는 말은 아주 평이하게 번역한 것이고, 토론하다는 말은 ‘디엘로기제스데’라는 말인데 논쟁하다, 따지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한 주제를 가지고 의논하고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디엘로기제스데’라는 말은 난상토론을 벌리고, 논쟁한다는 말이요, 자기주장만 옳다고 고집하며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들은 길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모이고, 하나의 단체로 조직하고, 어떤 일을 추진하다보면 앞으로 선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단순히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기관이나 단체를 운영하다보면 높은 자가 있게 되고, 낮은 사람도 있게 됩니다.  이러다보면 경쟁하게 되고, 때로는 시기와 질투심이 발동하여 격한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높아지겠다는 생각이 과열되면, 투표나 선거를 통하여 해결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 중심으로 조직이 쪼개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도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앞장서시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뒤따라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제자가 많아지고 사역이 늘어나다보니 앞에서 책임지고 사역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목회자를 세우고, 장로, 집사, 권사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교회들이 모인 노회도 그렇고, 그런 노회들이 모인 총회도 앞장서서 일하려는 사람들로 경쟁하게 되고, 선거전이 과열되기도 합니다.  
   
교회도 항존직원 선거가 있을 때가 되면, 교회의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오랜 친구로 지내왔는데, 내가 먼저 되어야 하고, 내가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서먹서먹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목회자가 중립에 서지 못하고 어떤 사람을 의식해서 응원하고 내 세워주려고 하다보면 교회는 시험에 빠지고, 선거후유증을 겪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에게 맡기고 기도할 것 뿐이 없습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출석하시고 봉사하신 성도들을 몰라주어도 안 되고, 젊고 유능한 성도들을 앞장서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기에 두 가지를 다 고려하여 일꾼을 선정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교회에서 누가 좋은 일꾼이냐 하면 목회자를 협력하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일하고, 기도생활이나 성경 공부, 제직회원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전도 잘하는 사람이 좋은 일꾼입니다.  
   
요즈음 리더십을 말하는데 섬기는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어진 위치, 주어진 자리, 포지션 때문에 권위가 있고, 알아주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섬기는 권위, 얻어진 권위를 알아주게 되었습니다.  무슨 장 자리 맡아서 권위 있다고 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대신에 그의 사람됨과 섬김의 정신, 섬김의 열정을 보고 사람을 알아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성공한 사람에서 위대한 사람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알아주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가치관이 뚜렷하고 섬김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보다, 섬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야 좋은 교회입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이 그를 알아주고, 욕구를 채워주고, 누릴 것이 있으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나서고 싶고,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다른 교회로 옮겨버리고 맙니다.  그 교회 갔더니 목사님이 계속해서 이것을 하라, 저것을 내놓으라, 이것이 당신이 할 일이라고 요구만 하면 ‘나는 더 이상 내어놓을 것이 없다’고 하면서 떠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책임 의식은 사라지고 편히 누리려고 하는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되었습니다.  

책임의식을 가진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 봉사라고 하면 굴종이 아닙니다.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시간, 물질, 건강, 마지막으로 당신의 소중한 목숨까지 우리에게 다 내어주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진정한 기쁨이란 섬기는 자로 살아갈 때에 얻을 수 있습니다.  기쁨을 넘어 환희와 열정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고, 존경하고 찬양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우러러보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위하여 살아간 사람들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에게 그 사랑을 보답해야 하는데,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주님과 같은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시기와 다툼, 분쟁이 없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1.  예수님을 알고 주님으로 모신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당신이 길을 나서는 것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가시는데, 예수께서는 이것을 여러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많은 시간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당신의 사역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말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것보다, 제자들에게 핵심적인 말씀을 나누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주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조용하고 차분한 중에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누고자하는 핵심적인 말씀은 31절의 말씀입니다.  

31절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잡혀 넘겨지고,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요, 복음의 핵심이며,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은 가장 중요하고 복음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놓고 어떻게 시끌벅적한 곳에서 말씀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도 아닌데,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며 길을 나서 갈릴리를 지나가시고 있습니다.  

제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받고 관리들에게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깊이 알지도 못하였고, 받아들이지도 아니하였습니다.  

32절 말씀처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두 번째로 수난에 대한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고, 예수님에게 자세히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동문서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없고, 오로지 자기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 주님의 부르심에 오직 헌신할 수 있는 사람,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주님을 잘 알아야 하고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우리 주님이 하시려고 하는 일을 깨달아야 합니다.  소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자세하게 물어보고, 주님이 하시려는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깊이 알아야 하는데, 물어보는 것조차 두렵게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지 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하나님, 저는 무엇을 해야 할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지금 여전히 영광의 면류관이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주님, 저를 불러 주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게 하십시오.”  조용한 가운데 여러분의 영혼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일을 끝내야 합니다.  


2.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주고 싶어 하고, 또한 자신도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고독 속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도 다투었느냐?”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잠하였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어느 모임에서 첫째가 되려고 하면 꼴찌가 될 생각부터 하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그는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사람이니, 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것을 말씀하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 누가 가장 높으냐, 누가 먼저 좋은 자리에 오를 것이냐를 따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왕이 되실 것이요, 온 백성을 통치하실 터인데, 그렇다고 하면 우리 12 제자들은 장차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개국공신이 될 것이요, 12 제자들 중에서 나라의 요직을 맡아야 할 터인데, 내가 먼저 총리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3명의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적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예수님은 3제자를 특별 관리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2제자, 베드로 요한은 주님의 그림자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A그룹에 속한 베드로, 안드레, 야고,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B그룹에 속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C그룹으로, 성경에 별로 등장하지 않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열심당원(가나나인)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유다가 있습니다.  

12 제자 중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세리 출신으로 마태라고 생각됩니다.  헬라어를 잘 하고, 박식한 사람은 빌립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아 돈궤를 맡았습니다. 이래저래 보면 어느 제자도 뒤쳐질 사람은 없고, 다 한 몫 하는 사람이요, 당연히 크다고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라고 하지요, 안드레는 예수님의 가장 처음 제자이지요,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사촌형제 지간이었습니다.  빌립은 바돌로매를 데리고 온 사람이요, 바돌로매는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으로 다른 이름이 나다나엘이었습니다.  디두모라는 도마는 의심이 많지만, 때때로 예수님의 말씀을 깊게 만들고, 많은 사람으로 이해를 돕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는 당시의 로마의 세법에 능통한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모든 제자들이 갈릴리 어촌 출신이지만, 유다는 남쪽에서 공부한 사람이요, 우월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막10:45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려고 힘써야 가능해집니다. 


3.  돌려받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36-37절에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사실은 다시 되돌려 받을 것이라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무엇을 베풀었는데, 그가 커서 나중에 나에게 되돌려줄 것으로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였는데, 사실은 우리 주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유명한 강철왕 카네기는 이런 말을 합니다. “부자인 채로 죽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제가 그런 말을 하였다고 하면 교만이 들어간 말이라고 할 것이지만, 세계 제1의 부자였던 사람이 한 말이니 새겨들어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까?  아니면 위대한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까?   
   
우리가 죽어서 관에 들어갔을 때에, 조문하러 오신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습니까?  “여기 인색한 사람이 또 하나 죽었구나!”  그런 말을 할 것 같아서 정말 걱정이 됩니다.  “여기에, 자기에게는 철저하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은 사람,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구나!”라고 하면 정말 잘 살아간 사람입니다.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가 가야하는 길을 알고 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스웨덴 태생으로 1866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함으로 인해 순식간에 거대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영국, 이태리 등의 유럽각지에 자신이 거처 할 주택을 마련해 놓고 여행을 다녔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백만장자의 부랑인"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아내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를 맞아줄 따뜻한 가정이 없었습니다.  명예와 온갖 물질적 혜택을 받고 누렸지만, 사랑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고, 고독하였습니다. 

노벨이 어느 날, 조간신문을 주워 들고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신의 부음 기사가 실렸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잘못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도 자기가 죽은 후 사람들이 무어라고 할까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다이너마이트 왕 사망' 이라는 제목의 본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기사를 읽어 가다가 자신을 '죽음의 상인' 으로 기술한 대목에서 그만 아연해졌습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 발명자로서, 폭파 무기를 만들어 커다란 재산을 모았습니다. 사람들이 노벨은 '죽음의 상인' 으로 알고 있다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그 순간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회심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자신의 능력과 돈을 평화와 인류의 진보를 위한 사업에 바쳤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그를 훌륭하게 기리고 있습니다.  '죽음의 상인' 으로서가 아니라 노벨 평화상 제정자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번 사건으로 누가 크냐 하는 논쟁을 종식시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0-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끝자리에 서는 것이 참으로 귀하고, 의미 있고, 소중한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뒤에 서므로 해서 다른 사람들이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으로, 정말 보람되고, 의미 있고, 아량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주님으로 모신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돌려받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숙한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