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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들어야 할 복음 (롬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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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어야 할 복음 (롬 1:8~15)

 
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라이언 화이트’라고 하는 13세의 소년이 혈우병을 앓던 중에 수혈을 받았는데 에이즈에 감염된 수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도 에이즈에 걸렸고, 오랫동안 살지 못한다는 무서운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 소년은 언젠가는 죽을 줄 알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기쁘고 명랑하게 학교생활을 잘 해나갔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주의한 어른들 때문에 생긴 결과였습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많은 이들이 이 소년에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TV에 이 소년이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라이언 화이트’는 5년을 더 살다가 18세로 세상을 마감하고 맙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한 기독교 잡지에 소개된 일이 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버지는 아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그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누구도 아빠처럼 귀한 선물을 준 사람은 없어요. 아빠는 저에게 예수님을 소개시켜주셨어요. 제가 교회에 나가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어요. 저는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이 아이는 아빠가 그에게 준 이 복음의 선물을 감사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아무리 값비싸고 훌륭한 선물이 있더라도 예수님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복음보다 위대한 선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기념일에, 혹은 명절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아주 값진 선물을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복음의 선물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그 복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 되었고, 사도로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의 그 열정 때문에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원했습니다. 아니, 방문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로마서는 바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인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오늘 본문을 감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오늘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로마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것에 대해서 그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가 확장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참으로 세계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인 도시이며 동시에 우상의 땅이었습니다. 세계 모든 우상의 집합체가 바로 로마였습니다. 그런데 그 척박한 로마 땅에 몇 명의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는 곳에 전파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감사는 무엇입니까? 내 개인적인 사건에 대해서 여러분은 감사하십니까? 적어도 바울은 기독교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주위에서 바라보면서 함께 기뻐하십니까?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가 세워질 때 여러분은 손을 들어 환호성을 지릅니까? 어떤 분이 그랬답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는데 그 시골 마을에 교회가 하나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한 시간씩 걸어서 읍내에 있는 교회에 다녔는데 20년 후에 시골 동네에 갔더니 세상에 그 동네에 교회에 2개나 생겼더랍니다. 십자가 뾰족탑이 2개나 생겼는데 어찌나 기쁘던지 덩실 덩실 춤을 췄답니다. ‘이 우상의 땅에 교회가 세워지다니!’ 이 교회를 통해서 새롭게 구원받을 영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얼마나 벅차오르던지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어떤 분들은 '웬 놈의 교회만 생기냐? 다방보다 더 많은 교회!' 여러분은 어떤 시각으로 그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로마 교회를 생각할 때 기쁨과 감사가 충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교회에 나와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감사가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이어서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과 10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오늘 바울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로마로 가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만나기를 원하노라.” 그는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의 기도는 종종 나 자신을 위한 기도로 제한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내 사업을 위해서, 내 가정을 위해서, 내 자녀를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다릅니다. 내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로마에까지 가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열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의 기도는 지속적인 기도였습니다. 9절에 보니 바울은 항상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한두 번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집요하게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다. 10절에 보니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제가 로마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시면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의 기도는 사랑의 기도였습니다. 로마를 향한 그의 뜨거운 마음, 사랑의 마음이 이 본문 속에 녹여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갖는 바울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과 바나바를 비교해 볼 때 바나바는 좀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 자체가 위로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 냉랭한 사람, 좀 논리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의 이미지를 비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마가요한이라는 젊은이가 동행했다가 ‘밤빌리아’라는 곳에서 되돌아가게 됩니다. 아마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음식이 맞지 않아 힘들어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마음에 새겨두었습니다. 그리고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할 때 마가요한의 일로 인해서 바나바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한 번의 실수쯤은 용서하고 데리고 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준비한 선교여행에 마가요한같은 젊은이를 데리고 갔다가 또 어떤 낭패를 볼지 모른다고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두 개의 선교팀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바울의 성품이 좀 냉랭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로마를 향한 이 바울의 마음은 매우 뜨거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염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바울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알부남’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혹시 ‘알부남’이 뭔지 아십니까? ‘알고 보니 부드러운 남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겪어 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사실 저도 굉장히 부드러운 남자인데, 제가 웃지 않으면 굉장히 야박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오해하고 있다면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렇게 간절한 뜨거운 사랑의 기도를 로마로 가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15절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한 번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한 번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이 구절에 어떤 잘못이 없습니까? 지금 로마에 있는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으로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이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7절 말씀을 또 읽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8절에 보니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이미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로마 교인들은 지금 믿음이 매우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아니 그들의 믿음은 너무나 뛰어나서 온 세상에 소문이 날 정도로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그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고, 열망하고 있습니다. 10절에 보니 “너희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원하노니.” 11절에 “너희보기를 간절히 원하노라.” 13절에 보면 여러분 너희에게 가기를 시도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복음을 전한다. 혹은 전도한다고 할 때 우리가 신자에게 전도합니까? 불신자에게 전도합니까? 불신자에게 합니다. 

만약에 신자, 남의 교회 교인들에게 전도한다고 데려오면 잘못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전도를 베푸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신자에게 전도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내가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믿음이 훌륭한 사람들에게 왜 전하기를 소망했을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로마 교회는 이미 설립된 지가 20년이 지났습니다. 아마 그들은 유대로부터 흘러나온 그리스도인 몇 명이 매우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로마까지 가서 그 척박한 땅에 교회를 세워갔을 것입니다. 핍박도 있었을 것입니다. 역경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뜨거운 열정이 모든 것을 이겨내게 했을 것입니다. 무려 로마교회 역사가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가 이어져가면서 그들이 가졌던 순수한 첫 믿음의 순수성과 열정이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역사와 전통만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 교인들 가운데 처음에 그 뜨거웠던 사랑을 잃어버리고 불평하는 사람들, 원망하는 사람들, 또 분열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생겨날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 7개 교회에 사도요한이 편지를 보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에베소교회에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너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서 촛대를 옮기겠다.”고 주님은 경고하십시다. 라오디게야교회를 향해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차갑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계속 미지근하면 내가 너희를 토해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아마 어찌 보면 로마교회상황이 이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 속에 어떤 문제들이 자꾸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제가 죄송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문제가 생겼다. 좀 시끄럽다. 교회가 분열 직전이다.’ 라면 대게 그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예수 믿은 지 1년, 2년 밖에 안 될 사람들일까요? 예수 믿은 지 오래된 분들이 대게 문제의 중심에 서 있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왜 그럴까요? 그들은 처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감격을 서서히 상실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의 열정도 잃어버렸습니다. 남는 것은 형식주의가 남습니다. 율법주의가 남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어떤 교회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마치 그 전통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이 로마교회 안에도 이방인들도 있고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시작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만 믿어서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 온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행위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상실할 때 그것이 바로 교회의 위기인 것입니다.

오늘 목사의 위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 안수 받을 때의 감격, 예수 믿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겠다고 자원할 때의 감격을 잃어버릴 때 그는 사람들은 인격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하나의 수단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장로님이든, 권사님이든, 집사님이든 여러분이 처음 예수 믿을 때의 구원의 감격을 상실해버렸다면 여러분은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율법주의나 어떤 형식주의의 노예가 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내 속에는 예수도 있고 구원도 있는데, 구원의 기쁨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 믿는 분들은 보면 대게 얼굴이 밝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 감격을 생각할 때 찬양할 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10년, 20년 되어 가면 눈물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데 왜 그렇게 굳어지는지 모릅니다. 무표정합니다. 화난 표정도 아니고, 기쁜 표정도 아니고 무표정입니다. 냉랭하고 냉담합니다. 감정이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뜨거운 것입니다. 복음은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예배는 축제인 것입니다. 찬양을 하면서도 감동이 없습니다. 노래는 부르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로마교회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문제인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교회도 54년의 역사가 되어갑니다. 처음에 이 교회를 개척했던 분들의 그 열정과 순수함은 어찌 보면 점점 더 상실해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면 우리 교회도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에 대해 설교하면 ‘십자가, 다 아는 얘기지, 예수님의 사랑 나는 다 알지.’ 알기는 무엇을 압니까? 마음에 뜨거움이 없는데. 지식적으로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 믿게 되었는데 내 마음이 별로 기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문제이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기주의 속에 자기 자신이 빠져서 다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감격이 식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이런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빚진 자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여러분! 혹시 빚져 보셨습니까? 여러분! 살다보면 빚 안 져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 대학 등록금 내고, 큰 아들 장가보내려면 천만 원씩 빚질 수 있습니다. 

요즘은 마이너스 통장 필요해서 백만 원씩 빚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빚져본 사람의 마음은 빚져본 사람만이 압니다. 이자도 못 갚고, 원금도 못 갚을 때 그 돈 꿔준 사람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당황스럽습니다. 곤혹스럽고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 시장바구니 들고 시장가다가도 그 사람을 만나면 샛길로 돌아갑니다. 얼굴 마주치기 민망합니다.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빚진 자의 심정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심정이 바로 빚진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고, 감옥에 넣던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꼬꾸라졌습니다. 그리고 내 모든 죄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았음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정말 괴수 중에 괴수인 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마음속에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바로 그런 심정 이였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복음에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은혜의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빚을 좀 갚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함으로 이 빚을 좀 갚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빚진 자의 심정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육신적으로 빚쟁이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의 빚진 자, 사랑의 빚진 자, 복음의 빚진 자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것을 잊어버린 분들은 너무 냉담해집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봐도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없습니다. ‘안 믿으면 안 믿는 거고, 믿으면 믿는 거고, 나야 어쩌다가 믿게 되었으니 할 수 없이 믿는 거지만 당신은 안 믿었으니까 평생 안 믿을 거고.’ 마음에 감동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저 영혼이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지옥의 고통을 어찌 감당하려고…….' 이런 마음이 없습니다. 오늘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내가 복음을 전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지나쳤는데 그것이 늘 마음에 괴롭습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도 그것이 기억에서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내가 복음 전할 자리를 놓쳐버렸어.’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빚진 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빚진 자의 마음이 늘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그런 심정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저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 스페인, 포르투갈까지 가서 복음 전하기를 소망했습니다. 빚을 갚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심방 가서 들어보니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이 교회 앞 동네에 살아서 만날 교회 앞마당에 와서 놀았답니다. 어머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는데 어머니가 결핵인지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하셨답니다. 그러면 어린 나이에 감당이 안 되었답니다. 그런데 옆집에 계신 오 아무개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 피를 다 닦아 주시고 청소를 해 주시고 약도 갖다 주시고 이 소년을 앉혀 놓고 늘 이야기 하셨답니다. 

“얘야! 너 엄마 병 고치려면 예수 믿어야 돼. 너희 집이 잘 되려면 너부터 예수 믿어야 해.” 늘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지금도 생생하답니다. 어머니 입에 피가 묻어있는데 그 아주머니가 와서 피를 다 닦아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교회 나왔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교회의 안수집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를 다 전도해서 그분들이 얼마 전에 다 세례 받으셨습니다. 

그 집사님의 마음속에는 빚진 자의 의식이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우리 어머니를 치료해주는 그런 모습이 늘 마음속에 미안한 마음으로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와주지 않고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빚진 자 의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이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마음, 십자가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고, 거기에 살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분들은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한답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은 광주리 신앙이다. 여러분! 광주리 아십니까? 시골에 가면 생선 같은 것을 말려 담아두는 광주리, 떡 같은 것을 담아두는 광주리, 나물 같은 것도 말려 담아두는 광주리, 그 광주리 채로 물  속에 집어넣으면 광주리 속에 물이 꽉 찹니다. 그러나 광주리를 들어 올리면 물이 쫙 빠져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빈털터리입니다. 마치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은혜의 강 속에 있을 때는 다 근사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같은데 교회 문만 나가면 물 빠진 광주리 같습니다. 전혀 예수 믿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복음 안에서, 은혜의 방주 안에서 늘 거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말 생명의 강물이 흘러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이 복음의 감격을 가지고 구원의 기쁨,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나를 살리고, 이것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한 초등학생이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갔는데 엄마, 아빠도 교회 나가서 구원받아야 된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이 어린 애가 교회 나가는 게 신기하고 예뻐서 “그래, 너나 잘 나가라. 우리는 시간 되면 나중에 나갈게.” 늘 그렇게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이가 학교 갔다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만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부모들은 너무나 슬픈 마음으로 그 아이의 장례를 잘 치렀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방에 돌아와서 그 때 묻은 옷들, 장난감들을 정리하면서 보니 서랍에서 일기장이 하나 나왔는데, 그 일기장에 기막힌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죽기 얼마 전에 쓴 일기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엄마, 아빠 꼭 예수 믿게 해 주세요. 하나님! 엄마, 아빠가 예수 믿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죽어도 좋아요. 

내가 죽어서라도 엄마, 아빠를 예수 믿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문을 써 놓았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 아빠의 마음속에 감동이 밀려옵니다. 회개의 마음의 솟구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면 자기 생명과도 바꾸려고 했을까? 우리 아이가 죽으면서까지 내가 예수 믿기를 원했다면 내가 예수 믿어야지.’ 그 엄마, 아빠가 회개하고 교회 나가서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나중에는 세계대학생국제선교회 CCC의 부총재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안에 불타는 십자가의 복음이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있습니까? 이 사랑을 여러분들께서 꼭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면 오늘 우리도 복음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으로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복음으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고, 복음으로 긍휼의 마음을 회복해서 한 영혼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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