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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제까지 예수님 주변에서 머뭇거리겠는가? (요 12: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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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예수님 주변에서 머뭇거리겠는가? (요 12:37~43)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이 많았다. 둘로 나누자면 다수의 무리와 소수의 12제자이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였다. 
다수의 무리들은 예수님 주변에 있었지만 그냥 머뭇거리기만 했던 사람들이다. 
교회를 다니지만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무리 같은 교인들이 적지 않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오늘 말씀에 예수님 주변에서 머뭇거리기만 했던 몇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1.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28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들었다. 어제 예수님을 환호하며 환영했던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이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천사가 뭔 말을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무슨 말씀인지는 전혀 모른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이다. 

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 듣지 못하였을까? 왜 들을 귀가 없는 것일까? 
관심이 다른데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것이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이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필요한 말씀만 귀에 들어온다. 그래서 그냥 예수님 주변에만 머뭇거리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후에 제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되었다. 성령님의 계시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도 말귀를 알아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과 동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열려야 한다. 그래야 주님 주변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직접 예수님을 보면서도 “인자가 누구냐?” 묻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는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른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다. 그런데 못 알아듣는다. 예수님을 직접 본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른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왜 보아도 보지 못할까? 사람들이 듣고 싶을 것을 듣는다. 마찬가지로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예수님은 심판을 말씀하신다. 죽음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경제적인 메시야를 보고 싶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라고 말씀하셨으면 그들이 믿었을 것이다. 죽으시는 예수님,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보고 싶지 않다. 자기가 보고 싶은 메시야를 보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 주변에서 머뭇거리다가 마는 무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학자는 과학자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시인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밤하늘을 보면 과학자는 은하계를 설명할 것이다. 은하계의 크기는 얼만큼이다. 그 거리는 얼만큼 된다. 빛으로 가면 수만 광년이 걸린다. 거기에 태양계 같은 같이 얼마나 많이 있다. 
시인은 전혀 다른 것을 본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기 한 마리” 이런 노래를 한다. 시인은 과학자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과학자도 시인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각각 자기의 눈으로 본다. 

성도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아야 할까?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다윗은 밤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영의 눈으로 우주를 본 것이다. 
엘리사의 종은 영의 눈이 감겨 있었다. 그래서 자기들을 포위한 아람 군대를 보며 두려워 떨었다. 엘리사가 기도하여 영의 눈이 떠졌을 때, 그 종은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다. 
왕하6:17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과학자가 보는 것을 다 보지 못해도 괜찮다. 시인이 보는 것을 다 보지 못해도 괜찮다. 
그러나 성도는 영의 눈이 떠 있어야 한다. 성도는 과학자가 보지 못하는 것, 시인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교인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제자가 될 것이다. 

3. 기적을 체험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 

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 기적이다. 이 기적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싸인이기도 하다. 이런 기적을 표적이라 한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직접 보았다.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그런데도 예수님 주변에서 머뭇거리기만 하다 떠나가 무리들이 많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어려운 말씀이 나온다. 40절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무슨 소리인가? 믿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말인가? 아니다. 스스로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이다. 완악해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이다. 

조심하자!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한번 굳어지면 들을수록 더 굳어져 버린다. 
돌짝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돈 욕심에 마음이 굳어진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기적을 보아도 굳은 마음이 열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굳어져서 마침내는 예수님까지도 돈을 받고 팔아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고야 믿겠다고 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기적은 귀하다. 때대로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자. 
그러나 믿음이 더 귀하다. 믿음의 은혜가 더 귀하다. 믿음이 기적이다. 기적 중의 기적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믿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한다. 

4. 믿긴 믿으나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42절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러라.” 
귀한 사람들이다. 관리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숨겼다. 안 믿는 척 했다. 
이 사람들도 예수님 주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을 떠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예수님 안으로 쑥 들어오지도 못한다. 

왜 그렇게 행동했나?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서 그랬다. 출교를 당하면 공직을 박탈당했다. 
그게 두려웠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다. 그런데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싶지는 않은 거다. 손해를 볼 바에야 안 믿는 척 하자. 그런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더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하셨다. 43절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예수님을 믿긴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 믿는 게 때로는 부끄럽다. 

왜 그런가? 세상 것들이 더 자랑스럽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것보다 세상이 인정해주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한다. 
예수님이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하자.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예수님을 믿긴 믿으나 세상을 두려워하는 교인들이 있다. 예수님보다 세상이 더 강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담대하자. 세상보다 하나님이 강하시다. 세상의 강한 것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예수님을 믿긴 믿으나 세상을 더 사랑하는 교인도 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세상을 더 사랑한다. 세상보다는 예수님을 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위험하다. 예수님 주변에서 머뭇거리다가 언젠가는 떠나버리는 무리가 되기 쉽다. 

맺는 말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왕상18:19 “너희가 어느 때가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수아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수24:15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결단을 내리라고 말씀하신다.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서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무리들처럼 예수님 주변에서 머뭇거리지 말자. 구경꾼 신자는 되지 말자. 
주님과 깊은 관계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제자가 되자. 
교회 주변에서 머뭇거리지 말자. 깊이 들어와서 충성하는 종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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