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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로 설득할 수 없는 것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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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설득할 수 없는 것 (눅 5:1~11)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돈을 내고 야단을 맞는 곳입니다. 적나라한 표현이지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곳은 돈을 내고 자기 맘에 맞는 서비스를 받지만 교회는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대통령이든 재벌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권고하시고 때로는 꾸짖으시고 때로는 우리를 바로잡으시는 엄한 말씀을 듣고 그리고 감사하고 헌금을 내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LA 동양선교교회 임동선 목사님이 과거 해군 군목이었을 때 주일예배를 인도하는데 마침 진해 해군기지를 순시 중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예배를 참석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을 앞에 두고 젊은 군목이 설교를 하게 되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 무대에서부터 회개해야 됩니다.’라고 설교를 했답니다. 경무대는 당시 청와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배 참석하고 있던 해군 장교들이 땀을 흘리면서 아까운 군목 하나 잘리게 됐다 이렇게 염려하는데 예배 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그 젊은 군목 설교 한번 힘이 있다고 칭찬을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임동선 목사님도 대단한 것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니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사람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옛날에 어느 영화를 보니까 젊은 카롤릭 신부에 대한 영화였는데 젊은 신부가 교회에 부임해서 첫 설교를 합니다. 그 첫 설교를 한 다음에 나이든 신부님이 한 마디 코칭을 하는데 여러분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우리라는 말을 써라 이렇게 말합니다. ‘you-여러분이 회개해야 되고 여러분의 죄와 여러분의 이런 식으로 교인들에게 훈계하는 식으로, 교인들의 죄를 지적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우리가 회개해야 되고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 적어도 그런 식으로 하면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내용의 코칭이 되겠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나이든 신부님은 세상 물정을 이해할 줄 알고 경험이 많고 그리고 사람의 눈치를 볼 줄 알고 적당히 눈을 감아줄 줄 아는 때가 묻은 사람으로 비치고 젊은 신부는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지 않고 정의감에 불타고 순수한 사람으로 비쳐지지만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죄의 문제는 말로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로 설득이 된다면 얼마든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설득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설득한다고 회개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누가 자신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도덕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누가 자기의 외모의 결점을 지적하면 원수가 됩니다. 만일 누가 저보고 목사님은 키가 작다 그러면 아마 제가 은근히 얄미워 할 거예요. 또 성격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건 절교하지는 얘기입니다. 

아내가 운전할 때 남편이 그 옆에서 아내의 운전하는 스타일을 탓하면 그것은 이혼 법정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인격적인 허물을 지적하는데 누가 그것을 좋아하고 누가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누가 그 말을 듣고 정말 내가 문제가 있구나 라고 뉘우치겠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떤 외모든 지극히 평범한 허물을 지적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사람됨에 대하여 지적할 때 누가 그것을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죄인도 좋아하지 않고 의인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적을 한다고 회개를 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저희가 주일마다 참회기도의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참회의 기도는 성도님들이 각자 하나님께 해야 되는 것이지만 목회자가 먼저 대표로 참회 기도를 하고 그리고 성도님들에게 묵묵히 기도할 기회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개척을 하고 한 2년 동안은 참회의 기도문을 일일이 써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한 2년이 지나니까 어느 정도 경험이 쌓여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기도를 하게 됐는데 그렇다고 즉흥으로 하는 게 아니고 예배가 시작한 다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기다립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제가 첫 번째 찬송가를 부르다 말고 중얼중얼 기도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건 참회의 기도에 대해서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일 1부 ․ 2부 ․ 3부 예배를 다 참석하시는 분들은 제가 예배 때마다 참회기도 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마다 떠오르는 기도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기도문의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냥 무턱대고 죄를 회개하자고 말하면 내가 무슨 회개할 죄가 있을까, 내가 뭘 잘못했다는 얘기인가, 이런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죄의 사례를 열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구체적으로 죄의 사례를 말합니다. 예컨대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갖고 있으면서도 더 갖고자 하고 또 더 갖지 못함으로 남을 시샘하고 인생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나이다’ 이런 식으로라든가 아니면 ‘거룩하고 선한 것을 구하라고 하셨건만 저희는 썩어질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욕심을 구하며 살았나이다’ 이런 식으로 뭔가 구체적인 죄의 사례를 열거함으로 ‘아, 나도 거기에 해당되는구나. 아, 내가 저런 죄를 회개해야 되겠구나.’라고 성도들이 죄에 대해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 대표기도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제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건 누가 내가 죄인이라고 설득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깨닫는 순간에 상대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습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게 아니고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습니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나는 죄가 많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독실한 신자입니다. 그는 비록 직업은 어부지만 그건 먹고 살기위한 것이고 베드로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 형제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상당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죄가 있다면 양적으로 봤을 때 그에게 얼마나 죄가 많길래 자신을 죄인이라고 불렀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죄가 많고 작고를 떠나서 본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낚게 하실 때 그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에 자신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의 관심은 더 이상 고기에 있는 게 아니고 고기를 많이 잡은 것에 놀란 것 보다는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라는 사실에 놀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와 및 동무들이 놀랐음이니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기를 많이 잡았기 때문에 놀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그 순간에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놀란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설득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순간에 베드로는 누가 그의 죄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했습니까. 그럼에도 그 순간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의 차원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에 ‘내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고 죄를 먹고 죄를 마시고 죄를 숨 쉬고 죄를 생각하고 죄가 내 안에 내가 죄 안에 있다, 죄인이라는 사실 그것을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베드로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를 떠나소서’, 숨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를 가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이 동산을 지나가시는 소리를 듣고 부끄러워서 나무 뒤에 숨을 것을 탓하기만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자신들이 부끄러운 것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산에 지나가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가까이 왔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까이 왔을 때 상대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운 것을 깨닫고 자기를 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문제인 것뿐만이 아니고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보니’ 하면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는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주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그리고 스랍천사들이 여섯 날개가 있는데 두 날개로 날고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을 본 이사야의 첫 반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가 말하기를 ‘화가 있도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도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보는 순간 이사야는 나는 망하게 됐다, 나에게 화가 있다, 나는 죄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직자든 모세든 사도든 세리든 다 마찬가지에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의인이고 덜 의인이고를 말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좀 더 많은 증거를 보여주지 않을까. 당신이 계시다는 증거를 좀 더 많은 기적을 통해서 내게 보여주면 나도 믿기가 쉽고 다른 사람도 믿기가 쉬울 텐데.’ 그런데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생각은 마귀가 유혹한 것과 아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마귀도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기적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표적을 보이라 그러면 믿겠다, 자꾸만 표적을 행하면 믿겠다, 기적을 행하면 믿겠다 라고 말했는데 예수님 말씀에 ‘이 악하고 패역한 세대가 이적을 구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오늘 본문의 초점이 예수님의 기적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셔서 베드로가 그렇게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고기를 그렇게 많이 잡은 것이 정말로 이 본문의 초점이라면 베드로는 그 잡은 고기를 시장에 파느라고 바빴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기 잡은 것을 그대로 두면 안되니까. 그걸 팔아야 돈을 벌지요.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어부들은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만 간절히 기다렸을 것입니다. 대박을 터뜨려야 되니까. 또 어디에 그물을 내려라 이렇게 말씀하실 테니까.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그 많은 고기 잡은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만약 그게 베드로에게 중요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 사건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복신앙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신비주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복신앙은 고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고기를 많이 잡는다, 그건 기복신앙적인 해석이고 신비주의는 이런 신비한 체험이 너무 좋아서 두고두고 또 하고 또 하고 싶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고기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고 그 체험을 반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도 않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두려워말라 이제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도 아니고 신비주의도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결과로써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고 이제는 이웃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고 남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적을 많이 경험해야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결과로 여러분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그리고 인생에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고 그 일을 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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