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 1:1~2)

  • 잡초 잡초
  • 516
  • 0

첨부 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 1:1~2)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최희준 씨의 노래 ‘하숙생’은 한 때의 유행가가 아니라 불후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란 가사는 인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문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물리학에 힘의 3요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용점, 방향, 크기입니다. 작용점은 현재 위치가 어디이고 제반 조건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방향은 힘이 가해져서 물체가 움직이는 방향을 말합니다. 크기는 가해지는 힘의 양을 말합니다. 이 세 요소만 알면 물체의 정확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이 행성의 궤도를 추적하고, 우주선의 도착 지점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원리에 의해서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출발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마치 우주 공간에 홀로 떠서 어디론가 달려가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내가 왜 여기 있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최초 내가 탄생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장 1절 말씀이 바로 우리 인생의 출발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라고 하면 하늘과 땅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이라고 하면 멀게 느껴집니다. 하늘과 땅에는 우주 만물뿐만 아니라 인간도 그 안에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할 때 나 또한 그 인간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읽어야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나 를 창조하시니라” 

나란 존재는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우주도 옛날부터 있던 그대로 자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자연 만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연 만물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작품 전시회에 가면 우리가 감탄하는 매우 멋있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은 자연의 모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자연이 작품입니다. 오늘날 컴퓨터란 매우 정교한 제품이 나와서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컴퓨터보다 정밀하고 우수한 것이 인간입니다. 수만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정교한 작품은 인간입니다. 이런 위대한 작품들 앞에서 위대한 제작자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과 새소리를 들으면서 감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옆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감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감동이 없다는 것은 마치 루브르 박물관을 지나면서 그 안에 있는 고흐의 작품이나 모나리자의 그림을 보면서도 전혀 반응이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작품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무섭고 괴팍한 분이 아닙니다. 악하거나 변덕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의 필요나 권위에 의해서 꼭두각시처럼 만물을 만드는 그런 폭군이 아닙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십니다. 이 창조사역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 지를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우주 만물을 만드셨다면 우리는 그것이 또한 사랑 때문에 그러하셨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인간과 우주만물을 만드신 사건을 스스로의 권리포기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들을 만드심으로 그것에 매이는 것입니다. 유한한 존재의 탄생과 행복을 위하여 스스로의 자유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만들고 나서 하나님에게 얼마나 복잡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까?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소리가 들리고, 하나님은 악을 징벌하기 위해 노아 홍수를 내리셔야만 했고, 급기야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구원사역을 이루어야 하는 복잡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행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녀를 낳은 것과 같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고 살면 자기 마음대로,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자녀를 낳으면 돈도 시간도 자유도 빼앗기고, 항상 걱정을 달고 살아야 합니다. 길러 놓았다고 해서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반항하고 또 강도처럼 우리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자녀를 낳는 것과 같은 소중한 경험은 아무 데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을 향하여 그렇게 온전한 사랑을 쏟고, 그렇게 매인 적이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길러놓았을 때 그들과 맺는 사랑의 관계는 얼마나 깊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우리 희생을 통해서 또 다른 존재가 인생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 소중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 ‘창조’라고 하니까 수백 억 년 전의 시간을 떠올리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는 다름 아닌 우리가 태어나던 때가 바로 창조의 때입니다. 우리가 생명과 의식을 가지고 태어나기 이전 시간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종말이란 것도 다름 아니라 나의 죽음의 때입니다. 내가 죽고 난 후에는 태양이 뜨고 예쁜 새가 노래한다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만큼 귀합니다. 그의 죽음은 곧 우주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창조하다’라는 동사로 히브리어 ‘바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만든다고 할 때 히브리어 단어에는 ‘바라’와 ‘아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의 사용이 다릅니다. ‘바라’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창조를 말합니다. 반면에 ‘아사’는 이미 있는 재료에서 무엇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목수가 의자를 만든다고 할 때 이 때 사용하는 단어는 ‘아사’입니다. 나무라는 재료에서부터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바라’, 곧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절대적인 창조입니다. 이 의미를 좀 더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유에서 유를 만드는 ‘아사’의 창조는 항상 재료라는 한계에 매이게 됩니다. 예컨대 음식 경연 대회를 한다고 할 때 승패는 단지 솜씨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누가 얼마나 신선하고 값진 재료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바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한계에도 매이지 않는 창조입니다. 온 우주와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놓으셨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우리 인간과 우주는 하나님의 전적인 책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전적인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 더욱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인생 또한 모자람이 없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읽다보면 매일 매일의 창조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감탄사로 마칩니다. 여섯째 날 인간을 최종적으로 만든 후에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최대의 감탄사를 발합니다. TV에서 흔히 들리는 말로 ‘완벽해! 완벽해!’ 입니다.

우리라는 인생이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실수에 의해서 아니면 피치 못할 숙명이나 아무런 생각도 없는 우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전적인 책임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실수와 연약함도 다 계산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우주의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떤 방법에 의해서 태어나기로 계획하셨고, 때가 차매 이 한국 땅에, 현재라는 시간 속에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천 살 가까이 살았던 아담이나 므두셀라도, 그냥 평균 수명을 누렸던 평범한 사람들도, 또 태어나자마자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은 어린 생명도 주님의 완전한 계획 가운데 있음을 믿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있지만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완전하심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신앙의 눈으로 깨닫게 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찬양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렘1:5) 이미 뱃속에서부터 아니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체가 되기 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것보다 더 멀리까지 갑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하나님이 수백 억 년 전 우주를 만드실 때 그 계획 가운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들의 고백은 어떠합니까? 여전히 원망과 불평 가운데 있습니까? 감사와 찬양으로 주어진 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에는 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물을 만들 때는 그 사물을 만든 목적이 있습니다. 의자는 앉기 위해서입니다. 마이크는 적은 소리를 큰 소리로 확대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자녀를 낳을 때 무슨 목적을 가지고 낳는 것은 아닙니다. 노년에 무슨 덕을 보려는 생각보다는,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인간으로서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렇게 유추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목적 외에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생은 이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마치 연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듯이 우주의 드라마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역할에 충실할 때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태중에 있기 전에도 ‘선지자’로 세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이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빚으시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자기 유익과 욕심을 좇아서 방탕하게 산다면 그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어긋난 삶이라 할 것입니다.    

혼돈 공허 흑암

반대로 하나님이 없는 우주와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공허과 쓸쓸함뿐입니다. 창조가 시작되기 전 우주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세 단어로 나타나고 있는데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혼돈은 무질서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모습입니다. 공허는 황량한 들판처럼 허무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흑암은 빛이 없는 깜깜한 어둠을 말합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우주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장에 묘사된 하나님의 창조는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몰아내시는 과정입니다. 먼저 흑암이 사라졌습니다. 첫째 날 빛의 창조로 세상이 밝아졌습니다. 다음으로 혼돈이 물러갔습니다. 둘째 날 물을 나누어 하늘과 땅으로 나누었습니다. 셋째 날에는 땅의 물을 나누어 바다와 육지로 나누었습니다. 우주가 질서를 찾았습니다. 무질서가 사라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허가 물러났습니다. 셋째 날 땅에 식물이 자라게 하고, 넷째 날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을 달아 가득하게 하시고, 다섯째 날 바다를 물고기로 하늘을 새로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 땅 위에 동물과 인간을 만드심으로 온 우주에 빈공간이 없도록 가득 채웁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주에 법칙이 있습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질서를 발견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주에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는 빈공간이 없이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주는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방정식대로 물질이 풀어지면 빛이 되고 빛이 뭉쳐져 물질이 됩니다. 지옥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만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우주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 없는 인생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1장 2절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인생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혼돈이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고, 내가 경험했던 아픔과 상처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감추어두고 있었지만 이것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현재 내 사는 인생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건강한 인생은 혼돈이 없는 인생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사람들은 그 안에 혼돈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관계가 힘들고 자신이 없습니다. 마음속에는 괜한 짜증과 분노가 있습니다. 선택이 극단적일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는 혼돈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경험했던 상처들이 내 안에 잠복되어 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공허가 있는지 모릅니다. 공허는 불안으로 때로는 권태로 나타납니다. 이 불안감을 감추려고 세상의 욕심을 추구하거나 자신을 어떤 일에 몰두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 안에는 또한 흑암이 있습니다. 어둡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며, 내 삶의 방향이 올바른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질 때 비로소 극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하실 때 어둠이 떠나가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 위에 떨어질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물러납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14:6) 길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 인생의 혼돈이 사라집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가 어지럽게 걸었던 길들이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길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안개 속을 헤집고 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둠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빛입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나갈 때 우리는 환한 빛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더 이상 어둠 가운데서 엉뚱한 길로 사망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충만히 임할 때 모든 불안과 두려움과 권태와 허무가 사라집니다.

인간들의 역사도 하나님 없는 역사는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2절은 다시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역사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아마 옛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세상이 굴러가지 않는 것이 혼돈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렘4:22-23) 창세기 1장 2절과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빛이 없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또 온갖 악을 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1:2-4) 불의가 가득한 데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는 상황이 바로 혼돈입니다. 정의가 없는 세계는 창조 이전의 무질서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 말씀이 울려 퍼질 때 세상의 불의와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할 때 그들이 무슨 세상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창세기 1장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자 되시고 정의를 세우는 분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사야 45장 7절과 8절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구원의 하나님이요 정의의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대항하여 싸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역사 가운데 새 창조의 역사를 만들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정의의 길을 간다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는 태초에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혼돈의 세력이 창조의 질서를 넘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반 인륜성, 약육강식의 경쟁과 제국주의 체제의 야만성, 이기심과 욕망을 자극하는 자본주의의 물신성, 모든 이익과 권력을 혼자만 차지하려는 독점과 독재, 이 모든 것들이 역사의 혼돈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혼돈에 대항하여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수면에 운행하시는 하나님

이런 혼돈과 공허와 무의미 가운데도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호흡 숨결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모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감싸고 있습니다. 운행하신다는 단어는 ‘라하프’인데 이 단어에는 알을 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해산의 고통과 같습니다. 막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죽을 것만 같습니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통이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응애’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아이가 태어납니다. 혼돈과 공허와 깊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여기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혼돈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위에 부는 하나님의 바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눈입니다. 우리 인생에 어둠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그것을 바라보지 말고 그 위에 부는 하나님의 바람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혼돈을 가지고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십니다. 역사의 희망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가 혼란스러워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백성들 가운데 정의와 사랑을 심고 계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더 단단해집니다.

여러분 이 숨결이 느껴집니까?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란 책에서 ‘고난의 선물’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죄를 씻어준다. 
고난은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갈 때 
마음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평면적 세속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고난의 잔을 마셔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어 냄으로써 생명은 한 단계씩 진화한다. 
핍박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포용하는 관대함이 생기고 
궁지와 형벌을 참음으로써 자유와 고귀함을 얻을 수 있다.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 상처 가운데서 우리 고난을 통해서 이미 일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되고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될 때 이미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할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빛이 있으라”는 우렁찬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질 때 혼돈과 공허와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장엄하고 빛으로 가득 찬 창조의 첫날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