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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나서 (수 2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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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나서 (수 23:1~11)


우리는 2009년에 들어서면서 이 나라를 이끌어간 대통령 두 분을 잃었습니다. 지난 번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과 장례절차를 보면서 우리 국민 모두가 받은 충격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한 동안 비통함을 지울 길이 없어 모두가 망연자실 하지 않았습니까? 고인이 남긴 유서를 보면 그가 당한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됩니다. 투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던진 김대중 대통령을 서거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의 목표가 뚜렷했기에 반대 세력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당하지 않고, 그 숱한 생명의 위협과 큰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당당하게 그 고난의 숲을 헤쳐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 가운데도 그의 리더십을 인정해 노벨 평화상을 받는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방송을 보니까 그 역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판사 앞에서 내란죄로 최종 판결을 받을 때 판사의 입만 보이더랍니다. (사-, 무-) 그 결정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니 그리고 본능적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이것이 솔직한 모습이 아닙니까? 그는 어떤 결단을 내릴 때 마다 '우리가 어떤 문제 앞에 서 약하다는 것 때문에, 두렵다고, 겁이 난다는 것 때문에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용기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어떻게 인고의 세월을 헤쳐 나왔는가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도 복된 죽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매우 엄숙하고 뜻 깊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머지않아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지나간 생애를 또한 돌아보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지나간 생애를 돌아다보고, 또 다가올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매우 복된 일이 아닙니까? 흔히 별 생각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은데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우리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설 때, 충분히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경계선에 서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는 단순히 인간적인 감상에 젖어 있거나 삶에 대한 애착심에 젖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해 볼 때 그 말들 속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들이 들어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며 한평생을 어떻게 달려왔는지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이 날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의 충성스러운 동역자요, 격려자요, 후원자였던 갈렙이 있었을 것이며 대제사장 비느하스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피와 눈물과 땀을 함께 흘렸던 동지들, 생사고락! 같이했던 전우들, 노병들이 여호수아의 마지막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세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젊은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구절 7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 이 말 속에는 여호수아는 자신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술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라왔더니 이렇게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얻게 됐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이제 죽음을 직감하면서 다음 세대를 향하여 몇 가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첫째, 이렇게 된 것은 절대로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잘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군대를 하나님이 지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지휘관입니다. 그의 명령대로 행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기!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신 것을 보십시오. 한 번도 같은 작전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다양한 전술과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가진 능력이 하나님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하나님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수십 수백 배의 능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어떻게 하면 그 지혜를 나의 지혜로 끌어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붙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하나님이 끝까지 가나안의 세력을 몰아내신다는 것입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지는 편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아 너희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하나님이 요단에서 대해까지 모든 나라들을 격파하셨는데 하나님은 그 남은 자! 湧 몰아내는 일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을 살며 환란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든지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결혼을 했지만 결국 갈라서야 하는 아픔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아침에 멀쩡했던 아이가 불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을 가랑잎처럼 흔들어 놓는 인생풍랑 가운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한 분의 인격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금방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아십니까? 고작 기도 몇마디만 하고 나서 얻게 되면, 그것을 기도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행수나 자기의 능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허니문 베이비’로 자녀를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녀를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결혼해서 5년, 7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특별 새벽 기도회에 해마다 나와 간절히 기도하고, 안수 기도 받고 난 다음에 아이가 생긴 사람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이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응답을 유보하실 때가 많은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실이라는 절실하게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끔 이런 광고가 있습니다. “월수입 100만원 보장. 숙식과 승용차 제공. 용모단정한 20대 초반의 아가씨 구함.” 무엇을 하는 일인지 벌써 예상이 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20대 초반의 여자에게 월수입을 1000만원을 보장해 주고 자동차를 주겠습니까? 뻔한 일이 아닙니까? 이런 돈을 바라면 안 됩니다. 누가 주는 것인지 그 출처를 확실히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구원,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십자가를 붙들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이 현실과 처한 환경 앞에 왜 이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세신바 된 그 뿐께서 나의 작은 신음 마져도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분께서 내가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가운데도 함께 하고 계! 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셋째, 여호수아는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바로 이것이 여호수아가 지금까지 가나안을 정복했던 원리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늘 자기 앞에 여호와의 율법을 두고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늘 자기 앞에 여호와의 율법을 두고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율법이 자신을 이끌어 가는 힘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 구절과 비슷한 구절을 수 1:7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말씀은 역사의 새 아침에 주께로부터 받았던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처음 그가 받은 말씀을 죽음을 앞두고 다시 말하는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처음 받은 말씀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를 일생동안 붙들고 있었으므로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후손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강조는 “행하라”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계시록의 기자인 사도 요한은 3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읽는 것과 듣는 것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 즉 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20번 읽었습니다” 혹은 “100번 읽었습니다”라고 자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별로 자랑이 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안 읽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독했다는 사실에만 자부심을 느끼지 마십시오. 

성경은 다만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성령의 조명을 구하면서 접근하기만 하면, 이 말씀은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여 그 삶을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철학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삶의 양식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왜 성경을 안 읽습니까? 왜 성경에 접근하지 않습니까! ? 왜 성경을 내 삶의 한복판에 두려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수아는 이 가나안 땅에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자들에 대해 조심할 것을 당부 합니다. 12절과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여기에서 <친근히 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바크>라는 말로서, ‘바싹 달라붙다’, ‘매우 가까이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호수아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 민족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친근히 하지 말고 더불어 혼인도 하지 말고 피차 왕래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왜 이방민족들을 친근히 하지 말! 고 멀리하라고 합니까? 그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죄악 된 세상이라고 기도원으로 간다든지 은든주의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구별됨을 존재로 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히려 세상 앞에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요즘 교회가 자꾸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자꾸 세상으로 도심 한 복판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한해에 3000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이젠 정말 능력 받아야하고 구별된 인생으로 자신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을 따라갈 때 그들이 세상 사람들을 이기지 못할 뿐 아니라 평생 그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무려 네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첫 번째는 올무입니다 목에 올무가 매여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원하지 않아도 질질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덫은 어떻습니까? 발이 덫에 걸리면 꼼짝달싹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이 세상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그들이 하자고 하는대로 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옆구리의 채찍이 되어 모질게 옆구리를 걷어찹니다. 좀 쉬고 싶어서 게으름을 부리면 어느새 채찍이 옆구리에 날아오는 것입니다. 말을 보면 말 탄 사람이 장화 끝에 뾰족한 것을 달고 옆구리를 치기 때문에 뛰기 싫어도 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한 사람의 결과가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끝없이 돌아가는 욕심의 수레바퀴에 붙들려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유언 속에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10절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한 사람이 1,000명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한 사람이 1,000명의 몫을 해낸다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천 명의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그 삶이 복되고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전혀 과장된 표현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인생이 1,000명의 인생으로 변합니다. 삼손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의 힘은 1,000명의 힘을 능가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성령은 해 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경제가 무척 어려운 때입니다. 유가가 치솟고, 물가는 동반 상승하죠. 지금 세계는 한 지붕 밑에 있기에 우리만 유익할 수가 없습니다. 다 부족하고 궁핍한 때입니다. 이럴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인색해지며 남을 염려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너도, 나도 내 것 챙기기에 급급해지기 쉬운 때입니다. 그러나 이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옛날에 보면 임금 한 삶을 먹이기 위해 수많은 신하와 식솔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1000명이 달려들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1000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넘쳐나야 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이 땅에 그 생명의 예수님을 나누어야합니다. 사람이 궁핍해지면 나누기 싫어집니다. 나누려 해도 나눌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것이 적다 하드라도 그것을 주님께로 가져가고 주님께서 나누시게 하면 다 풍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함께하고 하나님의 복 주시는 은혜가 함께 하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 한번 밖에 없는 나의 삶을 어떻게 쓸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진정한 지도자 한 분을 보내면서 국민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그와 등진 사람들 마져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의 좌우명처럼 했던 이야기 가운데 한 토막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생의 사업에서 성공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인생의 성공자는 될 수는 있다. 그것은 무엇이 되느냐에 목표를 두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에 목표를 두고 사는 삶의 길을 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나 한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 설 것입니다. 우리의 종말에 마지막으로 남게 될 질문이 무엇입니까?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입니까?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 후손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 瀏나 그 모든 것이 다 쓸 데 없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흐르면 다 먼지 속에 파묻히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그것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 앞에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그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의 승리자는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은 다 심판 받아 없어집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백성들이 사는 하늘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그분이 영원토록 다스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남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바로 살았느냐 바로 살지 못했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저는 이 시간!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짐. 엘리어트의 일기장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결국은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의 삶은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이룬 삶이 되어야 합니다.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내 삶을 결산하기 위해 이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나를 부르신 주의 소명 앞에 부족한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놓쳐서는 안 될 그것을 위하여 결코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겠습니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결코 붙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명성도, 자기 만족과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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