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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도 계속 되어야할 하나님의 역사 (행 19: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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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계속 되어야할 하나님의 역사 (행 19:17~20)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선교지를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제가 중국에 가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중국은 정말 놀랍게 변하고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중국은 광속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중국은 세계 공장이고 세계의 소비국가입니다. 외한 보유고가 1위입니다.  지금 중국과 한국의 기술 격차가 3년이라는 무섭고 두려운 진단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교육의 방향을 어떻게 할지를 모른는 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뀌고 있는 암담한 현실입니다. 여러분, 중국과 한국의 기술 격차가 왜 이렇게 무섭도록 간격이 좁혀지고 있는 것입니까? 요즘 욱일 승천하고 있는 중국에는 숨은 비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처음으로 미국과 중국이 핑퐁 외교로 관계 개선이 되었을 때 미국은 많은 원조를 주려고 했습니다. 그 때 중국은 어떤 원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똑똑한 중국 학생 10만 명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습니다. 단순히 빵 한 조각으로 잠시의 배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것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당시 수많은 청년들을 미국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들이 예일, 프린스턴, 하버드를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현재 중국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관료들은 우리나라의 관료보다 훨씬 깨어 있습니다. 시스템 상 우리보다 더 자본주의화 되어 있습니다. 게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상해에 푸동을 한번 가 보신 분은 놀랄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도 다녀왔지만, 70층이 넘는 건물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는 모습에 탄성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서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진시황제가 도읍으로 정하고, 당나라의 수도인 이 서안은 서북쪽의 내륙인데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한나같이 말하는 것은 이것은 중국의 겉모습뿐이지, 사람들의 의식은 좀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곳은 빠르게 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중국을 다시 바라다보았습니다. 도시가 변하고 길이 변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어지럽게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정신은 너무도 더디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영적인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이 세속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되다 보니 영적인 부분은 퇴보하는 것 같았습니다. 영적인 어둠이 더 짙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할 때는 그 사상체계가 나라를 이끌었지만, 이 사상이 무너지자 그 무너진 곳에 물질 맘몬이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작지만, 믿음의 거인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의 꿈을 듣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지 몰랐습니다. 3분을 만났습니다. 한 분은 중국에 16년 째 사역. 또 한번은 우리 교회에 오신 위선교사님, 그리고 이제 중국에 온지 1년 4개월 된 앳된 모습이 그대로 묻어있는 선교사 가정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꺼질 줄 모르는 하나님의 열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서안은 실크로드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 이곳에서 백투더 예루살렘, 서진 운동을 위해 인생을 던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아침 함께하는 본문은 제3차 전도여행의 장도에 오르게 됩니다. 안디옥에서 불과 한 달 남짓 쉼의 시간을 가진 후 여독이 풀리기도 전 그는 다시 전도 여행길에 오른 것입니다. 이 제3차 전도여행의 코스는 2차 여행과 거의 같은 여정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의 제2차전도 여행 여정의 가장 핵심적인 선교 전략지가 고린도였다면 제3차전도 여행의 핵심적인 선교 전략지는 에베소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말로는 다 할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령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열정을 누구도 꺼뜨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여기 에베소에서 약 3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 도시의 복음화에 전력투구합니다. 바울 당시 에베소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으며 인구가 한때 30만에 달하는 곳이었습니다. 로마 당시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신 로마로 불리웠습니다. 무려 2만 5천명을 수용하는 대 극장, 체육관, 음악당과 거대한 쇼핑상가와 대 목욕탕 시설이 있는 도시로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석주 127개가 동원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테미 신전에서는 매년 5월에 세계의 호사가들을 불러 모으는 아테미 여신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도시의 겉 모습일뿐 이미 영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버린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복음인 것을 확신했고 그래서 자신의 고귀한 인생의 시간을 이 도시에 투자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기도하다가 먼저 예수 믿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을 알지 못하는 구원은 받았지만, 복음의 은혜와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바울은 에베소 도시 안에 예수 믿는 몇몇 제자들을 만났는데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에베소의 성도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졌습니다. 18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말씀을 듣다가 이상하게 여겨서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19장 넘어오니까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뭔가 균형 잡히지 못한 모습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직설적으로 질문을 하지요. 

19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바울이 생각할 때 이들에게 뭔가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그래서 바울이 가로되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여기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성령 충만함을 요청하는 말입니다. 이미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12:3).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미 성령의 은혜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이미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성령을 받으라고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예수를 영접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새 생명을 얻는 것이고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즉 죄를 이기는 능력, 마귀를 이기는 능력,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받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우리 속에 있는 새 생명을 키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평생 한번이면 족하지만 성령 충만은 거듭거듭 받아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하는 것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에베소에 갔더니 말씀이 약하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첫 번째는 이들에게 성령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꼈고 두 번째로 말씀이 약하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행전 8절을 보면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데살로니가에서도 세 안식일, 20일 정도 복음을 증거했는데 바울의 패턴 상 3달 동안이라고 하면 굉장히 긴 시간입니다. 석 달 동안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다음에 9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그리고 나중에 보니까 10절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석 달 동안 말씀을 증거한 다음에도 두란노서원이라는 곳에서 -두란노서원이라고 하면 서점을 생각하는데 서점이 아니지요. 어떤 장소였던 것 같아요. 신학교와 가깝지요.- 강론을 하는 일들을 두 해 동안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순회전도자 아닙니까? 에베소에 가서 보니까 이들의 문제는 말씀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서는 말씀의 뿌리를 내릴 때까지 승부를 보잖아요. 자그만치 3년이라는 세월을 투자 한 것입니다. 다른데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간에 에베소에 머물면서 투자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여러분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기 머물면서 주의 사역을 펼치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17-20절을 보십시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바울이 증거한 말씀 앞에 에베소 전체가 영적인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십시오. 에베소에서 일어난 영적인 부흥이 즉시 에베소 지방에 충격적인 사회 변혁을 가져 왔습니다. 여기에 지금 은 오만이나 되는 엄청난 마술책들을 가지고 와서 불사르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 책을 최고의 경전으로 여기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삶은 마술에 달려 있었고 그들이 마술에 종사하고 있는 한, 그 책은 그들의 마술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책을 중심으로 가치가 형성되고 사람들의 섦이 그 책에 구속받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그 책이 가르치는 바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이제 지난날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 책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치 있게 생각해선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두 무가치하게 여겼습니다. 에베소 고장 한가운데서 하늘로 치솟는 불길과 함께 타오르고 있는 그 마술책들과 함께 이교도적인 그들의 모든 삶도 같이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신 우상 숭배의 종말이며 여호와의 인정함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의 종말이며 복음의 승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에베소 교회에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을 보십시오. 무엇이 이 오만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헬라인들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떨며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예수의 이름을 떨리는 음성으로 찬송하게 만들었습니까? 에베소 사람들로 하여금 평생에 생업처럼  여겨 오던 마술책을 불사르며 여호와를 노래하게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자복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만들었습니까? 

에베소 사람들로 하여금 허탄한 일을 버리고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만들었던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인 실재 앞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복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은 교회안에 이러한 영적인 실재를 다룰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교회를 권세 있게 만듭니다. 부흥이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와 구별되는 신적인 권세를 가진 공동체임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게 있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위대한 영적인 부흥을 맞이하고 권세를 가진 공동체로 나타날 때 세상은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부흥이 아니고는 결코 교회가 영적인 권세를 회복할 수 없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언제나 플로렌스에서 있었던 '허영의 화영식'이라고 불리워지던 종교개혁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사람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였습니다.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그는 말씀과 함께하는 영적인 권세를 설교 속에서 혁혁히 드러내 보여 주었던 종교개혁 이전의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말씀 선포를 듣고 플로렌스의 시민들은 회심하였으며 도시 전체는 그 설교자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의 설교는 하누 간 동안 그 도시의 가장 커다란 뉴스거리였습니다. 건달들은 사라지고 감옥은 텅텅 비었으며, 부랑아들의 유행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꾸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동안 몰두해 오던 허영과 사치를 버렸고 음탕과 광란의 상징이던 사육제의 행사는 그쳤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가발과 가면, 세속적인 책들과 음란한 그림들을 태웠습니다.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며 골목고록 다니며 마차를 끌고 집집에서 이런 쓸데없는 것들을 거두어들였습니다. 플로렌스 시민의 관심은 세속적인 것에서 멀어졌습니다. 

헛된 것들은 거두어졌고 세속적인 책들과 음란한 그림, 유치한 가면과 유행하던 가발 같은 것들을 불태우기 위하여 모았습니다. 거두어들인 물건을 팔각형의 피라밋 모양으로 쌓았습니다. 둘레가 72미터이고 높이가 18미터였다고 하니 그 산적함은 가치 산더미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각성한 이 백성들은 찬양을 부르며 종을 치며 여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때는 1497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플로렌스의 '허영의 화형식'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부흥은 교회를 권세 있게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부흥이 아니고는 세상을 항해 교회가 영적인 권세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부흥을 경험한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위대한 능력으로 세상을 근본적으로 이렇게 고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을 맞이한 시대에 그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영적인 권세를 소유하게 되었을때 그들은 오늘날의 평범한 교회가 수백 년이 걸려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선교의 업적들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수많은 회의와 토론이나 많은 물질로도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이 세상의 변화를 그들은 변화된 교회 속에 내재하는 영적인 권세를 통하여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부흥(revival), 교회의 부흥, 민족의 부흥이 무엇입니까? 숫자가 늘어나고 예산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부흥의 시작입니다.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인생에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흥도, 민족의 부흥도 없습니다. 여러분 최근에 성경을 읽다가 멈추어 서서 감격하며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무릎 꿇고 기도해 본 적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 신앙은 어느새 메말라 버린 것입니다.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깨달음이 더 이상 없고 삶에 변화도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하시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열매의 계절, 기도하십시다. 오늘 우리는 태신자 용지를 받았습니다. 무슨 수로 저들을 주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 어두움의 세력은 나의 삶을 거미줄처럼 쳐놓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머물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 교회가 이젠 모두 나와 기도하되, 무엇보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가슴에 담겨 있는 열정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라고 외쳐야 됩니다. 지금이야 말로 여러분의 인생을 하늘로 들어 올릴 이 거룩한 바람에 자신을 맡길 때가 아닙니까? 지금이야 말로 내 춥고 외로운 인생의 마당에 거룩한 불이 임하여 나의 실존을 능력의 불로 태울 때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속의 대명사로 불리원지는 이 에베소 한복판에서 우상 서적과 음란 서적 그리고 온갖 퇴폐적인 것들이 검은 연기로 불에 타 하늘로 치솟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바 된 소수의 헌신된 제자들과 함께 주의 능력을 붙잡고 일어섰을 때 더 이상 그들은 무능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사탄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고 그들을 사로 잡던 모든 온갖 더러운 영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지금이 바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할 시간이요, 지금이 바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시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사신 우상 숭배의 종말이며 여호와의 인정함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의 종말이며 복음의 승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엄청난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나를 써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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