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제 가을입니다 (요 12:24~26)

  • 잡초 잡초
  • 267
  • 0

첨부 1


이제 가을입니다 (요 12:24~26)


(요12:24-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9월이 되었습니다. 9월이면 가을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이제는 가을입니다 라고 해 보았습니다.
가을 하면 무엇이 연상되는지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단어, 그리고 느낌이 다를 것입니다.
검색해 보니 사람마다 다양한 단어들을 이야기 합니다.

신작로의 코스모스 = 60년대 생 이후의 사람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이제 힘없어져 가는 세대의 추억입니다.
가을비 우산 속 = 연애시절 옛 추억에 잠겨 있는 이들입니다. 과거를 조사해 봐야 합니다.
오동잎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 =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분들은 혈중알콜 농도를 조사해 봐야 합니다.
추수, 수확, 열매 = 이 분들은 아마도 지난 봄부터 소쩍새 우는 울음과 함께 열심히 무언가를 심고 가을을 기대하는 분들로 보여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본문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한 알이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삶은 그대로 있는 밀알의 삶이십니까? 아니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십니까?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입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밀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심던 때가 있었습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심지 않고 거둘 수 없습니다.
버림 없이 거둠은 없습니다.
버림은 없어짐이 아닙니다. 버림으로 결국 살게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돌 항아리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땅콩이나 열매를 넣고 그물을 가지고 나무 위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냄새를 맡고 원숭이들이 나타나 돌 항아리 속에 손을 집어 넣는답니다. 먹이를 잔뜩 움켜진 원숭이의 손은 주먹이 걸려서 안 나옵니다. 손에 쥔 땅콩 한 웅큼을 버리면 손을 빼어 살 수 있는데 손에 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안타까워할 때 그물을 씌워 잡는다고 합니다.
집착을 버리고 포기할 줄 알면 살게 됩니다. 참으로 얻기 위해서는 버리는데 용감해야 됩니다.

한 여객선이 심한 폭풍우로 항로를 잃고 헤매다가 어느 무인도에서 난파되었답니다. 승객들이 머리를 모아 아무리 의논을 해도 무인도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난파된 배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몇 달 먹을 식량과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는 날까지 살아야 했기에 씨앗을 심기로 결정하고 땅을 팝니다. 그런데 황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씨앗 뿌리는 것도 잊고 황금을 캐느라 온 무인도를 동분서주했습니다.

몇 달 후, 황금은 산더미같이 쌓였고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지쳤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식량이 바닥났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이 씨앗을 뿌리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들 모두 황금더미 옆에서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누런 덩어리 쌓음이 사는 길이 아닙니다.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일, 또 내일이 있는 법입니다. 심어야 할 때 심지 못하면 추수의 때에 슬피 욺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목숨을 버리면 다시 얻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마중물을 아낀다고 품에 지니고 있다면 새로운 물은 영원히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대 가득 찬 꿈으로 심을 때 심은 그것을 거두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추수의 때입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가을은 추수의 때입니다. 결산을 말함입니다.
동장군을 물리친 봄바람이 살랑거릴 때 버림으로 씨 뿌렸습니다.
그리고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볕을 등에 지고 온 몸으로 부대껴 이겼습니다.
모든 것을 삼킬 듯한 폭풍우도 견딥니다.

그리고서야 비로소 수확의 가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향유하십시오.
모든 기대에 찬 결실을 누리십시오.
풍성함이 깃들여 새로운 창고가 필요할 만큼 넉넉함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다만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콩을 심은 자는 콩을 거둘 것입니다.
팥을 심은 자는 팔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둘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할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지혜로운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덕망이 높아 마을 사람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노인에게 자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노인은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 마을에 두 사람이 동시에 이사를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이 노인을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나직한 어조로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당신이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마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까?”
“예, 참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친절하고 다정했으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 마을에서도 역시 똑 같은 좋은 사람과 다정한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노인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노인도 똑같은 질문으로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 헐뜯고 다투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서로 욕하고 비평만 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이 마을에서도 똑같은 나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투고 있다면 어느 일방의 전적인 잘못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먼저 자기 자신을 바꾸어라”는 말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은 것이 나에 의해서 된 것이라는 면에서 동시에 심겨진 것에도 우리의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외부로부터 내게 심겨진 것도 있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리고 내게 그것이 있다면 그것을 거두어야 할 책임이 함께 주어졌음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눅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 구원의 특권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았으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에서부터 구원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눅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마땅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는 준엄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듣기에 아픈 소리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거룩한 하늘의 생명이 심겨진 것입니다.
그 생명의 결실이 있어서 추수 때에 거둘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 황혼의 때입니다.

가을은 황혼의 때입니다.
이 때는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질투 가득한 때가 아닙니다.
약삭빠르게 계산하여 이해득실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너그러움 가득하여 삶을 관조할 수 있을 때인 것입니다.
삶의 연륜이 빛을 발하는 때입니다.

아이의 때에는 아이의 생각과 아이의 말과 아이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아이들이 순진하다, 순수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계산적이지 않다는 면에서나 그런 것이고 모든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이의 전형적인 특색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자기중심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성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그 관계성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상대의 관점과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개구리는 올챙이 때를 생각해야 하고, 상점 주인은은 자신이 손님일 때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핏대 올리며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비판하던 유권자였었던 시절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시절을 생각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위주의 생각을 하는 듯 합니다.
엄마의 사정은 개의치 않고 어린 아기는 배 고프면 울어 제칩니다.
오줌 싸서 기저귀가 축축하면 또 울어 제칩니다.
안아 달라고 보채는 것 보면, 엄마가 피곤한지 졸린지, 다른 일로 바쁜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당장 해 놔야 합니다.

아이들은 조금 커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손 들고 벌 서던 말씀을 드렸는데, 제 선친께서는 손들고 벌서게 하는 일에, 장교 출신도 아니고 사병 출신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단체 기합을 잘 주었습니다.
한 번은 외갓댁 다녀 오다가 제 동생이 떼를 썼던 가 봅니다. 단연코 제가 아닙니다.
제 기억엔 여산버스 정류장인데 그곳에서 5남매가 나란히 손들고 벌 섰던 기억이 납니다.
성장하면서 참 많이도 벌을 섰는데 그 이유는 늘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 때문입니다.
‘성적이 떨어졌다.’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형제들 간에 배려하지 않고 욕심내다가 다툰다.’등등이 그 이유입니다.
사실 2, 3살 터울의 고만고만한 애들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형제들을, 그리고 부모님을 배려할 여유가 어린이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2008-04-10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곽금주 교수(서울대 심리학과)의 컬럼을 보면 아이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이미 3살 때부터 탈피가 되기 시작한답니다.

한 실험 결과입니다.
세살 어린이에게 앞면에는 강아지, 뒷면에는 고양이 그림이 있는 카드를 보여주고 그것을 아이에게는 강아지가, 실험자에게는 고양이가 보이도록 세웁니다.
“너는 강아지가 보이지? 그럼 내게는 무엇이 보일까?”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상대가 고양이를 보고 있다고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은 어릴 때 이미 발달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런 능력은 성장하면서 도리어 감소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옵니다.
직장 생활에서 하급자들은 상급자를 보면서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를 되 뇌이지만, 훗날 상급자가 되면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왜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까’ 하며 부하직원과 후배를 답답해하곤 합니다.
교회에서도 장로님을 보는 어느 집사님의 생각이나 집사님을 보는 장로님의 생각은 자기중심성이 강합니다.

최근 한 실험에서, 대학생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며칠에 걸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상상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두 집단 중 하나는 자원을 공급하는 권한을 가진 권력자요, 다른 한 집단은 권한 없이 배급을 받는 위치에 있는 이로 상상하게 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글자 하나를 자기 이마에 써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빨리 알아맞히는 게임을 하게 했답니다.

그리고 이들이 자기 이마에 쓴 글자를 비교해 보았는데, 권한이 없음을 상상한 집단은 다른 사람이 잘 볼 수 있게 글자의 좌우를 거꾸로 해서 쓴 반면, 자원을 공급하는 권력자로 스스로를 상상한 집단은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관점에서만 글자를 썼다고 합니다.
권한을 가지는 순간 타인의 관점에 대한 이해나 고려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권한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사람들의 행동이 이처럼 달라져서 자기 중심성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황혼의 때입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죄인들을 배려하여 이 땅에 친히 오시어 따지지도, 묻지도 않으시고 용납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심고 영생하는 열매를 거두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제는 장성한 자를 넘어서 황혼의 때가 되어 갑니다.
어른이 되어 어른의 생각을 갖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내게 남아 있는 어린 아이의 생각과 행동에서 장성한 어른다운 생각과 행동과 열매가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나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성’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힘없는 자를 배려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려운 시절에 온 몸으로 그 어려움 속에서 노심초사하며 나름대로 잘 해 보려 애썼던 교회의 지도자들을 배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4. 새로운 시작의 때입니다.

열매는 완성이며 동시에 시작입니다.
씨앗은 이미 생명을 배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로 완성되지만, 그것은 곧 새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교회 어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아버지 목을 빼다 박았다”는 소리였습니다.
그만큼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야기겠죠? 걸음걸이, 뒷모습까지 닮았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는 생전의 아버지를 알고 있는 이들로부터 점점 더 닮아간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남자의 애기씨와 여자의 애기씨가 만나서 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인데, 이미 그 씨에는 생명과 그 주인의 모든 것이 그것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씨앗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어도 ‘콩’이라 불리는 씨앗에는 콩의 생명과 형질이 들어가 있습니다.
팥이라 불리는 씨앗에는 팥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콩을 심어 놓고 팥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져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씨 뿌리는 자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씨앗 속에 생명이 있게 하신이의 권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우리에게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모든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는 죄에서 죽고 의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절망에서 죽고 소망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고난이 끝나고 축복의 환희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선포하며 살 특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여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가시고 기분을 쾌적하게 만들어 주는 선선한 바람 가득한 가을의 문턱에서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보며 심던 때가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추수의 때입니다. 많이 거두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황혼의 때입니다. 바쁨에 겨워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줄달음하던 모습에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주변을 살피며 배려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배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른 어느 때보다 더욱 아름다울 이 가을에 우리는 새로운 시작의 때를 만나게 됩니다.
감사함으로, 주어진 생명의 힘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 유익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넓혀 가는데 온전히 쓰임 받는 새 생명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