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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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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인기 없는 온유

제가 아는 청년 하나가 이름이 ‘김온유’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어려서부터 이 이름 때문에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름을 이야기하면 꼭 이렇게 묻는답니다. “이름이 참 특이한데 무슨 뜻이야?” 그러면 늘 이렇게 대답을 했다지요. “예,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 성격이 온순(溫順)하고 부드럽다는 뜻인데 성경에 나오는 말이에요.” 문제는 이 이름 때문에 자라면서 늘 화낼 일이 있어도 화도 못 내고, 싸움할 일이 있어도 싸우지를 못하는 거예요. 

화내거나 싸우려고 하면 사람들이 “너 이름이 온유라며?” 하니 어떻게 화내고 싸웁니까? 그래서 어려서부터 스트레스 참 많이 받았다는 겁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이름을 붙인 까닭은 아마 아들이 온유하게 살라는 뜻도 있지만 아버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아서 신앙생활 하는 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 성격 닮지 말고 온유한 사람 되라고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글쎄요. 그냥 저 혼자 생각이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아무튼 이 이름 덕분인지, 이름값을 해서 그런지 에 이 친구는 참 착하고 순수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 때문에 어려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온유’라는 말은 그리 인기가 없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한다. 그러니 스스로 강해지도록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저도 가끔 두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야, 그렇게 비리비리 해서 험산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너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강해야 살아!” 그렇지요? 학교나 직장은 계속해서 무한경쟁 체제로 갑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을 갖추고 노력도 남들보다 배는 해야 하고 남들 잘 때 공부하고 남들 쉴 때 일하며 스스로를 강한 자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요즘 예전에 아바(ABBA)라는 그룹이 불렀던 “The winner takes all”이라는 노래가 새삼 인기를 끌고 TV 선전에도 이 문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 아닙니까? 그러니 너는 반드시 패자가 아니라 승자가 돼라,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승자가 되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생각을 철저하게 주입 받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강하다, 실력 있다, 능력 있다’는 말은 인기가 있을지 몰라도 절대 ‘온유’라는 말, ‘온순하고 유하다’는 말은 인기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온유’라는 말을 ‘강하다’는 말의 반대말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온유’라고 하면 왠지 좀 약하고 비겁하고 무능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유한 자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고 이 극심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말이 인기가 없지요.

❚온유는 강하다, 온유가 이긴다

오늘은 예수님의 팔복 설교 가운데 이 별로 인기 없는 말 ‘온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세상에서 온유라는 낱말은 어찌 된 셈인지 약하다는 말과 동일시되어서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는 의외로 아주 강합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일찍이 온유가 강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단단한 대나무는 쉽게 부러지지만 부드러운 대나무는 구부러져서 오래 간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해와 바람이 누가 힘이 더 센가를 두고 내기를 했다지요.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쪽이 이기기는 것으로 했습니다. 바람이 먼저 나서 센 바람을 불어 나그네 옷을 벗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셀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더욱 단단히 여밀 뿐이었습니다. 

이번엔 해가 나서서 따뜻한 볕을 나그네에게 쪼이자 나그네는 “어휴, 왜 이리 더워?” 하며 스스로 외투를 벗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이 이야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셨습니까? 센 것, 힘 있는 것보다 오히려 부드럽고 유한 것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온유가 이깁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의 승리방정식은 “강한자=승리한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승리방정식은 아주 다릅니다. “온유한 자=승리한다”입니다. 이를 증명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 온유라는 말이 헬라어로 ‘프라위스’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낱말을 예수님이 두 번 사용하십니다. 먼저 마태복음 11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자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내 멍에를 메고, 즉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고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이 예전보다 생활환경도 훨씬 좋고 살기도 더 잘 살고 의학도 훨씬 발달했는데 왜 지금 사람들이 옛날에 살던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훨씬 더 받을까요? 

왜 신경이 훨씬 더 날카롭고 정신병이나 우울증이 훨씬 더 많고 암도 많은 것일까요? 바로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훨씬 더 경쟁이 치열하고 훨씬 더 강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온유하면 뒤쳐진다, 바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마음을 다잡고 굳게 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오히려 예수님은 이럴 때일수록 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져야 한다고, 나를 좀 배우라고 그래야 너희 마음도 쉼을 얻고 오래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분들, 아무리 해도 마음에 쉼이 없고 늘 불안한 분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또 마태복음 21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말씀한 ‘겸손’이 헬라어로 ‘프라위스’이므로 차라리 ‘온유’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프라위스’라는 낱말을 쓴 것을 보며 정말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왜 말을 타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는가? 물론 예수님이 겸손하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프라위스’ 즉 ‘온유’가 예수님의 승리의 방법, 승리방정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입성 때 환영하는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요즘 수요예배 시간에 성경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구약의 역사가 끝나고 신약의 역사가 시작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을 ‘신구약중간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에 대해서는 성경에 전혀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만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이스라엘 지역이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셀주커스 왕조에 의해 지배를 받았는데 이 왕조는 유대교를 극심하게 핍박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드디어 주전 164년 마카비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입성하게 됩니다. 물론 말을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유대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말입니다. 바로 그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마카비 장군을 환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마카비 장군이 자신들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준 때처럼 예수님도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메시야라고 믿고 그때와 똑같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들을 구원해주러 오신 메시야가 말을 타고 보무당당하게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것이 아닙니까? 참 이상한 일이지요. 예수님은 “내가 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말 위에 높이 앉아 화려하게 입성하지 않고 나귀를 탔는가? 바로 온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카비는 무력에 의해, 강함에 의해 이방인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똑같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되 무력이나 강함이 아니라 온유라는 방법으로 입성하고 겸손이라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나귀는 마카비의 강함과 대조되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승리방정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하늘의 천군천사를 다 동원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십니까? 열왕기하 19장 35절에 보면 천사 딱 한 명이 하룻밤에 예루살렘을 포위한 무서운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쳐서 다 송장으로 만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면 천군천사를 동원해 막강한 로마군대쯤이야 한 순간에 쓸어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런 방법, 이런 무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힘으로 세상을 해방시키러 온 분이 아니라 ‘온유’라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방법으로, 아니 가장 약해 ‘보이는’ 방법으로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방법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하고 불쌍한 자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의 방법인 십자가로 최후 승리하셨습니다. 

지금은 진 것 같아서, 지금은 너무 약해보여서 사람들도, 심지어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던 제자들마저 실망하고 떠나가지만 그래도 맨 마지막에 보면 결국은 예수님이 승리하십니다. 이것이 온유의 힘입니다. 지금은 약해보이고 지금은 우습게 보여도 반드시 마지막에는 온유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이고, 이것이 십자가의 방법이요 기독교 신앙의 방법이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퀴즈, 누가 이 복을 가장 좋아할까요? 복부인이랍니다. 여기서 ‘땅’은 복부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부동산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동산은 온유한 자는 절대 못 얻습니다. 

마음이 강한 사람, 용감하게 투자하는 사람이 부동산을 얻지요. 여기서 ‘땅’은 영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마치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처럼 이 땅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가 장차 받게 될 천국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누가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것인가? 하나님 나라에는 누가 들어갈 것인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 강한 자, 교만한 자, 힘 있는 자, 자신만만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스스로 약하다고 하는 자, 스스로 쓸모없는 자라고 하는 자, 무엇보다 온유한 자가 들어갈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로마를 단숨에 무찌르고 자신들을 해방시킬 능력의 왕, 가장 강한 왕인 줄 알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입니까? 제자들도 자신의 귀를 의심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해 천군천사를 동원해 로마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도 좌의정 우의정 할 줄로 기대하고 따라다녔는데 이게 무슨 소립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이 믿을 수 없기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사람은 강한 자, 잘난 자, 대단한 자들인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도 강한 자, 높은 자, 돈 가진 자, 권력 있는 자, 유명한 자를 사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목회자가 성도 모두 대견하게 여기고 “우리 교회 시장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사장도 많고 의사, 판사, 교수도 많다”며 자랑합니다. 

나아가 성도들에게 이런 사람 되라고 축복하고 모든 성도는 이런 강한 자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나라에 들어오기를 원하느냐? 내 나라에 들어올 자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다. 그들이 비록 힘없어 보이고 실패한 자 같이 보이고 무력해 보일지 몰라도 이런 사람들이 나의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 나라는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고 내가 분명히 말하노니 이런 자들이 마지막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온유

온유는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지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흔히 아주 강한 지도자를 원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처럼 강하고 능력 있는 메시야가 나타나 카리스마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지도자를 기대하는 심리를 메시아니즘(messianism)이라고도 부릅니다. 

백성들은 온유한 지도자를 만나면 “사람은 좋은데 영 힘알이가 없어, 저래 가지고 무슨 나라를 다스려?” 이럽니다. 하지만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힘 있게 다스리는 지도자를 보면 백성들은 열광합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지도자는 그런 강한 지도자, 힘 있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온유한 지도자를 참다운 지도자라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가 구스 여자를 첩으로 삼자 미리암과 아론이 강하게 비난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런 비난을 받고도 꾹 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세가 세상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만큼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잘 참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세가 본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과거의 모세는 애굽 궁전에서 40년 동안 왕자 훈련을 받고 누구보다 자신감이 가득한 야심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동포를 한 번 구해보겠다고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출 2:12). 그만큼 성격도 급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격으로는 도저히 모세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해서 40년 동안이나 거기서 썩게 하십니다. 정말 푹푹 썩습니다. 푹 썩으니 숙성이 되어 그 급하던 성격 다 죽고, 그 자신감 다 사라지고 세상에서 제일 잘 참고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제야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을 인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는 온유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하서를 살펴보노라면 우리는 다윗이 정권을 잡고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잘나고 힘 있는 사울은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다윗은 계속 피해서 도망 다닙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며 사양합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오히려 사울을 자기가 죽였다며 왕관을 가져온 자를 사형시키고,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이나 적군의 장군인 아브넬이 죽은 후 장례를 잘 지내주고, 요나단과의 약속대로 그 아들인 장애인 므비보셋을 극진하게 보살펴줍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원수는 죽이고 그 씨를 말려버려야 권력을 차지하지요. 그런데 다윗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모습입니다. 피하고 양보하고 참고 또 참고 원수를 후대하고 원수의 자손을 극진히 대해줍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권력을 잡는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사울과 그 아들 이스보셋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스스로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찾아와 나라를 바칩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나라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릴 왕의 자격을 갖춘 분이라며 스스로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누가 이긴 것입니까? 결국 강한 자, 힘 있는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온유한 자 다윗이 최종적으로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찾아 쓰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때로는 강한 목사가 되고픈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어느 어느 목사님은 정말 마음대로 목회한단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교회에서 누구도 목사님 하는 일에 대해 가타부타 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한다”는 말을 들으면 솔직히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나도 한 번 저렇게 힘 있게 강하게 목회해 봤으면, 내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마음껏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혹임을 곧 깨닫게 됩니다. 

어느 대선배 목사님은 자신의 목회가 ‘스펀지 목회’라고 자처하시더군요. 겉보기엔 너무 부드럽고 푹신해서 저래 가지고 뭘 하겠는가 싶지만 뭐든지 흡수하고 뭐든지 품어가면서 목회하니 교회가 평안하고 성도들이 평안하더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목사인 저도 혈기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사람이니까요. 이럴 때 그 순간 당장 화를 내면 안 됩니다. 그 순간 크게 심호흡을 하고 조금만 참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한 번 기도합니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의 모든 문제가 나 한 사람 참음으로 인해 해결됩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해보세요. 신기하게도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강하고 내가 힘이 있으면 큰소리 뻥뻥 치면서 당장은 좀 편하고 내 맘대로 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부딪힙니다. 반드시 상처 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반드시 나중에 문제가 됩니다. 

지금은 좀 답답하고 지금은 좀 힘들고 번거로울지 몰라도 잘 참고 다 흡수하면 그것이 가장 강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반드시 나중에 이기는 방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져주는 게 이기는 거다”라고 말씀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토록 잘나고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고백한 모양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온유해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쓰임 받고 무엇보다 온유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야고보서 1장 21절은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프라위스’는 짐승을 길들인다는 뜻도 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는 아무리 힘이 좋아도 쓸모가 없습니다. 오직 길들여지고 순종하는 말만 요긴하게 쓰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절대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아 쓰임 받고 천국 백성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가정이나 직장 안에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교회 안에서나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가장 강한 사람입니까? 내 주장이 제일 강하고 내 뜻과 고집이 관철됨을 기뻐하는 사람에 속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있는 곳마다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분열이 일어나고 상처 받는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좋은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혹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귀 기울여 듣고 잘 품어주는 사람입니까? 잘 참고 양보해서 어떨 때는 바보 소리도 듣고 사람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기도 합니까? 여러분도 사람이라, 목사도 사람이라 때로 속상하고 화가 치밀고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또 내 성질 본디 이래서 성질을 이기기 쉽지 않다고, 나 이대로 살다 죽겠다고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죽어라, 네가 죽으면 다 산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온유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인 온유(갈 5:23)의 열매를 맺은 성숙한 성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화평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상처 받은 사람이 위로를 받고 모든 사람이 편안해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소리는 못 들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복 있는 사람’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되게 하는 사람이요 십자가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에 여러분은 천국 백성이 되는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내 본성을 이기고 온유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이름이 다 김온유, 이온유, 박온유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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