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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러러 탄식하사 (막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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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러 탄식하사 (막 7:31~37)


어느 날 늙은 꿩의 새끼 한 마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늙은 꿩은 틀림없이 다른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이웃에 사는 흰 토끼를 의심하였습니다. 
“틀림없어! 그가 왜 우리와 가깝게 살고 있었겠어? 기회를 엿보다 내 새끼를 잡아먹자는 속셈이었던 거야. 속담에, ‘토끼는 울타리 앞의 풀을 뜯어먹지 않는다.’고 했지. 울타리 앞의 풀을 뜯어먹지 않는다면, 그건 바로 고기를 먹는다는 말 아니겠어?” 
이렇게 의심한 꿩은 안경을 끼고 희 토끼를 자세히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축 늘어진 큰 귀를 봐. 틀림 없는 강도의 특징이야! 그 빨간 눈은 악마의 것이 아닌가? 짧은 꼬리는 꼭 이리 새끼를 훔쳐 먹다 이리에게 물어뜯긴 것 같군...”
보면 볼수록 흰 토끼는 흉물스럽게 보였습니다. 꿩은 틀림없이 새끼가 흰 토끼에게 잡아먹혔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꿩은 저도 모르게 목 놓아 울었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내 자식, 가엾게도 토끼 밥이 되고 말다니!”
이튿날 새끼 꿩이 돌아왔습니다. 밖에서 놀다 길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늙은 꿩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괜히 흰 토끼를 의심했구나. 그는 강도들에게 능욕당한 동물이야. 내가 어떻게 그를 의심할 수가 있어? 그가 나의 이웃이 된 것은 이리떼가 두려워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였어. 속담에, ‘토끼는 울타리 앞의 풀을 뜯어먹지 않는다.’고 했지. 울타리 앞의 풀도 그냥 둘 정도니 얼마나 선량한 짐승이야!”
늙은 꿩은 또다시 안경을 끼고 흰 토끼를 자세히 분석했습니다. 
“귀를 좀 봐. 강도를 방지하느라 저렇게 큰 거야. 저 빨간 눈을 좀 봐. 이리의 시기를 받고 너무 울어서 그렇게 된 걸 거야. 꼬리가 짧은 건 틀림없이 늙은 범에게 물어 뜯겼기 때문이고!...흰 토끼가 어떻게 나의 보배둥이를 먹을 수 있겠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달라진 것 단지 내 마음입니다. 어린 자식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인한 내 마음의 상태가 상대방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편견이 그래서 무섭습니다. 같은 편견이라면 상대방을 좋은 쪽에서 보아주려고 하는 그래서 왜 그 사람에 대해서는 항상 좋은 쪽에서만 이야기 하냐고 하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대상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 눈밖에 난 사람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이런 장애를 지니고 있었는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지금 귀 먹고 말을 더듬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볼 때 귀 먹은 것이 말까지 더듬게 만들었다고 하는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습니다. 

어쨌든 저에게 있는 이 장애가 저로 하여금 정상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건 아픔입니다. 남들처럼 살 수 없다고 하는 것만큼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또 있겠습니까? 남들처럼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듣지 못하기에 말하는 것도 제대로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후천적으로 듣지 못하게 된 사람인 경우는 말을 제대로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또 다른 답답함입니다. 상처입니다. 그건 누가 어떤 말로 위로를 한다고 해도 그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3일 동안만 본다면”이라는 책을 보면 헬렌 켈러의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 주고 교육을 시켜 준 나의 선생 애니 설리번을 찾아 가겠다. 

지금까지 그의 특징과 얼굴 모습을 내 손 끝으로 만져서 알던 그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그의 아리따운 몸매 등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나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해 두겠다. 다음엔 나의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 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보를 나가겠다. 바람에 나불거리는 아름다운 나무 잎사귀들, 들에 피어 있는 예쁜 꽃들과 풀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들을 보고 싶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또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 하우스, 오후에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하고 그러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나는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나와서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거리,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상품들을 보면서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 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그 마음의 아픔을 이렇게 간절함 소망으로 담아 고백했던 헬렌 켈러 그녀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세계적인 인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먼저 장애의 고통을 겪었던 애니 설리번이라는 선생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애니 설리번 역시 안질과 동생의 죽음이라는 스트레스로 인해 거의 실명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정신 병원에 수용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의사도 회복 불능이라는 판정을 내렸던 그녀를 한 명의 늙은 간호사가 날마다 과자를 들고 찾아와 위로를 합니다. “애니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늙은 간호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를 위해 6개월 동안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때부터 애니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며 밝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픔을 겪었던 경험이 헬렌 켈러를 사랑으로 돌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당연합니다. 그 설리번 선생님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자기 자신의 필요만큼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할 때 사랑은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만이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데려온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보았을 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너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습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셔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셨습니다.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이었는데 그 순간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다고 했습니다. 그가 온전히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들도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질병과 고통이 다 치료되고 사라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듣고 보고 말하기는 하지만 비뚤어지게 보고 듣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몸에 장애를 지닌 채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이 하나가 없다든지 발이 없다든지 그런다면 그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 따라서는 그럴 경우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뛰어난 기능을 발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큰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병들어 있는 경우입니다. 듣기도 잘하고 보기도 잘하고 말하는 것도 남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삐딱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비뚤어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원하는 것만 보고 듣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그를 지켜보는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큰 상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을 그 곁을 떠나버립니다. 그럴수록 그 자신도 더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이윽고 누구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는 아니라 해도 우리 모두에게는 편견이라고 하는 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예외일 수는 없겠죠. 어떻게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모두가 다 마음에 들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 외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겨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알게 모르게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전에 받았던 상처가 반응을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도 필요한 것이고 설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나 모습이 있다고 해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듣고 본다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줄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만큼이나 상대방도 힘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먼저 인정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고 할 때는 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안 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싫은 표정 없이 먹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나가는 비결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보고 듣는 것은 내 마음대로 가려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듣기 싫어도 들려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띄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는 흘려버리면 됩니다. 그냥 지나쳐 버리면 됩니다. 문제는 그런 내 마음의 상태가 내 표정과 말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먼저 다스려야 됩니다. 

그냥 지나치던 소린데 잠이 안 올 때는 그 소리가 더 유난스럽게 들려지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아니 낮에는 전혀 들리지도 않던 소리입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째깍째깍 하는 소리 낮에는 일부러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를 않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그 소리가 왜 그토록 유난스럽게 들립니까? 그럼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조용하게 틀어놓을 수도 있지 않나요? 억지로 자려고 하니까 더 잠이 안 오는 것 아닌가요? 

그럴 때는 자려고 하지 말고 그냥 누운 채로 기도를 드리십시오. 아님 기분 좋은 생각들을 해 보세요. 나의 장래가 우리 자녀들의 장래가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바로 그런 생각으로 내 마음을 채우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모습은 내게서 사라질 것입니다. 보세요 어떤 때는 옆 사람이 그토록 크게 코를 골아도 모르고 잠들어 있지 않나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그냥 새근새근하는 소리조차도 귀에 거슬리게 들릴 때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듣기 싫다고 정의하지 말고 이것도 참 듣기 좋다 하는 마음으로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 소리만큼 다정한 소리도 없지 않습니까? 왜요? 코를 골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같이 자고 있는 사람이 아직 살아있음을 코고는 소리가 알려주고 있으니 감사하게 생각하면 그 소리는 더 이상 뒤에 거스른 소리가 아닙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것도 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입에 쓰다고 하는 것이 좋다고 했으니 이 쓴 약이 내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그걸 피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 혀가 쓴 맛을 안다는 것은 적어도 내 입맛이 살아있다는 것이요 입맛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 건강이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건강이 나빠지면 입맛부터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듣기 싫은 말이 들려져도 그냥 무심코 흘려버리면 됩니다. 

그냥 애써 무시해버리면 됩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지나가다 보면 이윽고는 그냥 무덤덤해 집니다. 적어도 사실은 바뀌지 않았는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마음 상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상하지 않으니 내게서 나가는 말도 편안하게 됩니다. 아니 내 마음이 힘들수록 우리 입에서 나가는 말이 더 평안할 수 있도록 그렇게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찌개 그릇을 집어 드는데 아주 뜨겁습니다. 그렇다고 앗 뜨거 그러면서 집어 던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힘들더라도 잠시 참으면서 더 천천히 내려놓도록 해야죠. 아니 뜨거울 것을 예상한다면 행주 같은 것으로 감싸고 들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는 말도 합니다.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린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런 우리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함께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잠시는 내 마음이 흔들릴지 몰라도 금세 다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더군다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듣고 본 것이 내 마음에 거슬린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말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서 거슬리는 일이 생기게 된다는 뜻도 됩니다. 그걸 바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에 거슬리기에 오히려 말은 거슬리지 않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러기에 더욱 상대방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위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대방과 더불어 나를 위하는 길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꺼려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 배려를 아끼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마음이 죽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엄청난 장애를 딛고 일어선 위대한 여성 헬렌 켈러가 희망의 빛을 어떻게 발견했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헬렌은 정원에서 꽃 한 송이를 꺾어서 설리번 선생에게 드렸습니다. 그때 설리번은 헬렌의 손바닥에 글을 썼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헬렌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사랑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설리번은 헬렌의 손을 잡아 헬렌의 가슴에 대고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글을 썼습니다.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말을 마음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란 꽃의 향기와 같습니까?” 
헬렌의 물음에 설리번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며칠 후, 헬렌의 집에는 아침부터 먹구름이 뒤덮여 있었습니다. 태양은 가려져 어두운데다가, 바람이 불어 오후까지 내내 음울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습니다. 헬렌은 그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헬렌은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까?”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손바닥에 무엇인가를 한참동안 써내려 갔습니다. 
“헬렌, 사랑이란 태양이 나타나기 전에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은 것이란다. 구름은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이지. 너도 비를 맞아 보았지? 햇볕을 쬐고 난 뒤 비가 내리면 땅위의 나무들과 꽃, 풀들은 너무나 기뻐한단다. 비를 맞아야 쑥쑥 자라거든.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 
“예 선생님.”
“사랑이란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이 사람에게 부어져 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란다. 사랑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단다.”

헬렌은 이렇게 진실한 설리번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사랑을 배우게 되었고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정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없다면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겠죠. 기쁨이란 자체도 없을 거고요. 헬렌 켈러 여사는 아무 것도 없는 암흑에서 단지 설리번 선생의 따뜻한 손길로 쓴 손바닥 글씨에 하나에 사랑이 전달되어 누구보다도 행복을 전파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헬렌이 이렇게 밝은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설리번 선생이 처음 만난 헬렌 켈러는 이미 여섯 살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았고 손으로 음식을 먹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주위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야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건 그녀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을 때도 있지만 어떤 환경이라든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마음이 닫힐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마음이 죽어버린 상태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가장 큰 이유는 불신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계속 불신을 당하다보면 그만 마음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합니다만 그건 결국 삶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죽어있기에 나타나는 반응조차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그 닫힌 문을 여는 에바다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문을 여는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귀한 역사가 우리들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닫힌 귀가 열리듯 우리의 죽은 마음을 열 수 있는 분도 오직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뿐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실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이 불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으니 이제 접근 방법은 끝까지 믿어주는 신뢰밖에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 이건 정말 아니야 하는 느낌도 있을 것이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것과 같은 상황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뢰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너희가 심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신뢰를 심으면 신뢰를 얻습니다. 거기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하셔서 우리의 닫힌 환경에 에바다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의 닫힌 마음에 에바다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의 상한 몸에 에비다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보든 곳에서 이 에바다의 역사가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은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말씀입니다. 헨델은 '메시아'를 "너희는 위로하라"로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잘츠부르크 성곽에서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을 곰곰이 되씹고 되씹었습니다. 존 브라운은 '하퍼의 페리(Harper's Ferry)' 감옥에서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폭풍이 몰아칠 때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니엘 웹스터는 마음이 아프고 꺾일 때마다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위로의 품으로 안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1:29∼30). 예수님에게 나아가 예수님에게 배우면 배운 만큼 마음의 안식과 위로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하고 말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의 좋은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모습이 보이거든 거기서 눈을 돌리세요. 다른 사람의 안 좋은 점에 대해 들리는 소리가 있거든 그 말은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세요. 거기에는 관심도 두지 마세요. 그리고 좋은 이야기에만 관심을 집중시키세요. 그리고 항상 긍정적으로 말하도록 하시고 좋은 점만 전하도록 힘써 보세요. 물론 저도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노력하자고요. 그것이 성장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에바다의 역사가 나타나니 그 사실을 사람들은 나가서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게 어디 입 다물고 있을 수 있는 겁니까? 그래요 진짜 입을 열어 말해야할 것은 바로 이 에바다의 역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우리의 모든 삶에서 이 에바다의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나타나는 에바다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에바다의 주님을 나타내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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