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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창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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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복했던 사람 

오래전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몇 년 동안 살았던 학교 아파트를 비어주고 나와야 했습니다. 한국으로 짐을 다 보내고 귀국하기 전 며칠의 시간이 나서 여행할 시간을 좀 가졌습니다. 쫓겨 나오듯 집에서 나와 여행하는 동안 해만 떨어지면 아이들이 걱정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빠, 오늘은 어디서 잘 거예요?” “내일은 어디에서 잘 거예요?” 여행하는 동안 아이들의 가장 큰 걱정은 ‘어디에서 잘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거할 집이 없어졌으니 걱정이 많이 되었나 봅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것은 엄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해결해줄 거니까.” 그렇게 말해 주어도 저녁때가 되면 아이들은 여지없이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아빠, 오늘 저녁은 어디에서 잘꺼예요?” 

아무리 힘이 없다할지라도, 먹는 것, 입는 것, 살아갈 모든 것을 준비해주는 부모가 있는 아이는 행복합니다. 그런 아이를 우리는 고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가 이렇게 책임져 주실 분이 계시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 든든하겠습니까? 특별히 어려움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와 같이 책임져주고 준비해줄 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이겠습니까? 

일찍이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이민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꽤나 잘 나가던 사업가였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평온하고 윤택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던 그 사람은 어느 날, 모든 것을 정리하여 하나님이 명하시는 곳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던 그 사람은 자신이 이룩한 평온하고 윤택한 삶 속에 안주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삶을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지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 살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그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그는 정처 없는 이민길에 오릅니다. 오늘날도 이민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이민 생활이 더욱 어려운 때였습니다. 이곳에 살던 사람이 그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침입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전쟁 상황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삶을 명령하고 계셨습니다. 집도 없고, 땅도 없고, 안전도 전혀 보장되지 않는 위험가운데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방으로 열려있는 삶,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는 위험 많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결단하고 나아갔을 때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문제도 있었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기기도 하고, 가족들과 가속(家屬)들이 붙잡혀 가지도 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고 많은 은혜들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는 힘이 들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나면 그것은 감사 제목이 되었고, 간증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려움의 순간은 힘이 들었지만 살아계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온 가슴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던 가슴 떨리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위험 많은 세상에서 능력 많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얼마나 희열이 넘치는 일입니까? 아브라함은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민생활이 창 12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의 삶의 기록이 계속되면서 오늘 본문인 창 22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 가장 최고의 어려움 

그런데 오늘 본문 상황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그의 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문제는 외부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도와주시고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당하는 문제는 너무 심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신학교 보내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종 삼으라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주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면서 어린양을 어깨에 메고 가서 그 어린양의 심장에 칼을 꽂고 콸콸 쏟아지는 더운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각을 떠서 이글이글 타는 장작불에 태워 번제의 제사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바치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는 끔찍한 명령이었습니다. 20년을 기도하여 얻은 아들, 그것도 도무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을 어떻게 번제물로 바친다는 말입니까?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어떻게 죽인다는 말입니까? 그 아들이 얼마나 귀한 아들인데, 어떻게 죽여서 바친다는 말입니까? 못할 일이었습니다. 

정말 못할 일이었습니다. 다른 일은 다 할 수 있어도 그것만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지금 인생 일대에 최대의 위기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평생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왔는데 불순종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이 100살이 넘어서 그것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받은 아들인데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다른 자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들 하나 있는데, 어떻게 그 아들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 아들을 잡아 바치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후손들을 이삭을 통해서 그렇게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아이를 바치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변개치 않으시는 분이시라면서요? 아들을 죽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실 때는 언제고 바치라는 말씀은 또 무엇입니까? 따지고 싶었습니다. 

3: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어려운 삶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결론이 해피 앤딩으로 끝났기 때문에 다 알고 폼만 잡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의 행동들을 보면,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부인 사라와는 의논도 안 합니다. 

부성도 강하지만 일반적으로 모성은 더 강한 법입니다. 만약에 사라가 아들을 바치러 간다는 사실을 안다면 일은 다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일어난 시간이 “이른 새벽”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사라가 알면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아무 말도 없이 이른 새벽 나선 것입니다. 

그렇게 사흘길을 걸어갑니다. 별생각이 다 들지 않았겠습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 출발했지만 사흘을 걸어갈 때, 별생각이 다 들지 않았겠습니까? 남의 이야기이니까 쉽지 100살에 얻은 자식 앞세우며 걸어가는 길이 어떠했겠습니까? 기가 막히는 길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가야했던 길을 사흘을 걸어 모리아산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산정(山頂)으로 올라가면 되었습니다. 두 하인들이 장작더미를 내려놓고 쉬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삭에 걸머지게 하고 하나는 자기가 걸머집니다. 두 하인들이 깜짝 놀라면서 말합니다. “왜 무거운 장작 짐을 영감마님이 짊어지세요? 어서 내려주세요.” “아니다. 너희들은 여기에서 쉬어라.” “아니 저희가 쉬러왔나요? 

산에 올라가면 제단도 쌓아야 하고, 제물도 잡아야 하고...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요. 어서 내려주세요.” “아니다. 너희는 올라오면 안 된다.” 못 올라오게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힘이 좋아서 이삭을 묶었다고 합시다. 칼 뽑아들고 죽이려고 다가가면 하인들이 곁눈질 하면서 구경만 했겠습니까? “아니, 영감마님 왜 이러세요?” 하면서 양손 붙잡으면 드리고 싶어도 못 드리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그 사람들은 꼭 데리고 갔겠어요. 하는 척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아들 앞세우고 모리아 산을 올라갑니다. 오늘 마지막 보는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저 아들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인들 그런 상황에서 피눈물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앞서가던 아들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며 묻습니다. “아버지, 지난 주간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면서 어린양을 매고 가서 번제로 드렸는데 오늘은 왜 빈손으로 가시는 거예요?” 저 같으면 그렇게 대답했겠어요. 

“지난 주간에는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더니 오늘은 너를 바치라고 하신다. 오늘은 네가 죽을 차례다....” 아들이 그 소릴 듣고 도망가 버리면 나이 100살이 넘은 아빠가 청년 아들을 어떻게 잡습니까? 못 잡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눈치 채고 도망이라도 가버리면 아들도 살리고 하나님 앞에도 체면이 서는 것이고... 일거양득 아닙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행여나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게 될까 싶어서 아들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온갖 방해거리들을 다 떨쳐내고 아브라함은 올라가고 있습니다. 저는 바치고 싶었는데 사라가 알고... 하인들 때문에... 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 도망가서.... 그런 생각이 왜 안 들었겠습니까?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죄렌 키엘케골은 그의 책, The Practice of Christianity[그리스도교의 훈련]라는 책에서 이 상황에 대해 그렇게 말합니다. “3일 동안 걸어가면서 아브라함은 먼저 자신이 먼저 죽임을 당하는 시간이었고, 자신을 십자가에 먼저 못 박아야 했던 걸음이었다. 먼 훗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앞세우고 가셔야 했던 그 길을 아브라함이 걸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꽁꽁 못 박아 버린 다음에야 독생자를 우리 위래 내놓을 수 있었던 것처럼 아브라함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다음에야 갈 수 있었던 길이 모리야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다음에야 갈 수 있었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 모리아로 가는 길은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아픔의 길이었습니다. 한숨의 길이었습니다. 눈물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합니다. 힘들면 포기해 버립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외면해 버립니다. 모리아로 가는 길은 순종의 길이요, 자신의 자아가 온전히 죽는 아픔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삶 속에서 온전히 살아나시는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정말” 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자신을 바쳐라” 하셨다면 아마도 그 일은 쉬웠을 것입니다. 네 가진 재산을 바쳐라 했다면 그것은 더욱 쉬웠을 것입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들은 생명보다 더욱 귀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욱 귀했습니다. 
이런 확실한 신앙고백을 가졌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명령조차도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 어려운 삶의 상황 속에서 그는 아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힘 있게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힘 있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아, 저 어두워져가는 세상을 바라보느냐? 자식 하나 키우는 재미로 살지 말고 복음을 위해서 살아라.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살아라. 생명을 위해서 살아라. 더 영원한 것을 붙잡고 살아라. 아들이라는 줄잡고 살지 말고, 세상이라는 줄잡고 살지 말고, 하나님 줄잡고 살아라.” 세상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바라보신 것입니다. 누구 가정에 맡길까? 

어느 교회에 보낼까? 찾고 찾으시다가 아브라함을 주목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아들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넌 나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아브라함은 아들이라는 매개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을 들은 것이지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날에도, 제 인생이 절단 나는 날에도, 제 사업장의 문을 닫아도, 제 인생이 끝나는 그 순간이라 할지라도 저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는 말씀에 벼락 맞은 사람처럼,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밖에는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신뢰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본 것이지요. 

하나님 보다 더 높은 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식을 묶어 불로 태울 제단 위에 아들을 올려놓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나님을 놀랍게 섬겼습니다.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기가 막히는 명령,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 명령의 중심에는 “네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도무지 환경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섬기기로 마음에 작정한 사람들입니까? 그렇다고 하면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4: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얻게 된 것 

그렇게 해서 20년 동안 기도해서 얻은 독자 이삭을 잃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아브라함은 어린양을 매고 와서 그 심장에 칼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심장에서 솟구쳐 오는 더운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각을 떠서 불에 태워 번제로 드렸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을 그렇게 드려야 했습니다. 아들은 심장에서 더운 피가 솟구쳐 내면서 파리하게 죽어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칼을 듭니다.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아브라함의 손을 붙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브라함아! 네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구나. 네가 나를 이렇게 신뢰하는구나. 이제는 내가 너에게 복을 주마. 아니다. 너 뿐만이 아니라 너의 후손들에게까지 복을 주겠다. 행하는 일마다 형통케 하겠다. 내가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할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가는 곳곳마다,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시겠다는 축복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이 놀라운 은혜! (롬 8:28).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삶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걸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동일한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가 되실 것입니다, 한숨과 눈물로 지새울 수밖에 없는 인생의 어두운 밤에도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기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계속해서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가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삶의 큰 고통 가운데 계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인생의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오고 나도 모르는 신음소리를 토해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까? 그 인생의 깊은 밤에도 믿음으로 걸어가십시오.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 17절, 18절에서는 계속되는 하나님의 축복 선언이 나옵니다. “네게 복을 주고..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놀라운 축복이 선언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고 축복을 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보이는 것 같지 않으나, 들리지 않은 것 같으나 믿음으로 걸어가는 자에게만 들려오는 음성...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아브라함이 진정한 승리자일 수 있었던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욕심내어야 할 인생의 목표, 신앙생활의 목표가 있다면 그것입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우리 인생이 어느 때 진정으로 승리자 일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 에녹의 생애가 다른 사람보다 짧았지만 그의 생애가 복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축복이 넘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들을 바치십시오. 집도 팔아서 바치세요. 있는 재산 다 드려서 헌신하세요....” 그렇게 명령한다면 그렇게 할 사람이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시고 순종하는 그에게 아들을 다시 돌려주시고, 축복도 안겨주시고 모리아산을 내려가게 하셨는데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대신 죽이시고 그 축복은 우리에게 안겨주시면서 모리아를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만 걸어가는 그곳에 내가 여호와 이레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은혜를 예비해 놓으셨다”(고전 2:9)고 말씀하십니다. 

모리아로 올라가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아들을 바치러 올라가는 믿음의 길이지만 눈물의 길이요, 한숨의 길입니다. 그러나 모리아로 내려가는 길은 어떠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춤을 추며 내려갔을 것입니다. 터질 듯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면서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축복 받은 사람이요,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이지요. 감격입니다. 감격이 없이 세워지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감동의 예배, 감동의 섬김, 감동의 드림, 감동의 찬양, 감동의 헌신이 있는 신앙생활하실 때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실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인생을 살면서 늘 부족한 것은 감탄사입니다. 감탄사의 회복, 그것이 진정한 은혜 생활이지요. 예배에 대한 감동, 섬김에 대한 감동, 일할 수 있음에 대한 감동, 살아있음에 대한 감동... 감동이 회복될 수 있기를 빕니다. 

5: 주만 바라볼찌라 

한 청년이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후에 주의 종이 되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신학교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음이 깊지 못한 그의 부친은 아들이 고생스러운 목회길로 나가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만약에 신학교에 가면 한 푼도 학비를 대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합격통지서와 함께 일부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부족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 청년은 형을 찾아갔습니다. 

첫 등록금만 도와주면 어떻게 하든지 아르바이트도 하고 장학금도 받아서 공부 할테니 한번만 도와달라는 동생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 그의 형이 약간의 생활비와 부족액을 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구정 무렵 부산에서 목포행 야간열차를 탔습니다. 앉을 자리는커녕 겨우 올라설 정도로 복잡한 열차를 타고 밤새내 오는 길에 깜박 조는 사이에 생명처럼 소중한 돈을 소매치기를 당했습니다. 그 청년을 고향에 돌아와서 명절도 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습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의 종이 되겠다고 나섰는데, 하필은 그 등록금을 소매치기 당하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저 신학교 안 갈랍니다. 저 주의 종 안 될랍니다.” 하나님께 투정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습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명절에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누워있는 아들에게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청년은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하나님께 대한 반항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번 학기만 하고 보따리 쌀 것입니다.” 3개월 동안 반항 아닌 반항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3개월이 지나가는 어느 날, 하나님께 반항하던 그 청년은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꾸라졌습니다. “야 이놈아! 내가 여기까지 너를 도와왔고, 앞으로도 너의 앞길에 모든 것을 준비해놓고 있는데, 도대체 목사가 되겠다는 놈이 믿음이 어디 있느냐? 창 22:13, 삼상 7:14이 믿음 없는 너에게 주는 말씀이다!” 그 청년은 성경을 펴서 읽었습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에벤에셀, 내가 너를 여기까지 도와왔다!” 말씀을 받고 청년을 고꾸라졌습니다. 그의 긴 반항의 시간은 끝이 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청년은 7년의 신학수업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이고, 저의 신학교 생활은 좌절과 그로 인한 반항으로 시작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쓸모없는 사람, 믿음 없는 사람에게 말씀을 주셔서 견고케 세워주셨습니다. 

중간에 방황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가슴 벅차게 해주시고, 심령에 불질러주시는 말씀 앞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안수를 받으러 가는 날,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환상 중에 하나님은 환상 중에 또 다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노회 안수식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오늘의 본문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목사가 되어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면 앞길에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가 되실 것”이라는 권면의 말씀이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길지 않는 시간동안 주님을 섬겨오는 동안 주님은 그 약속대로 놀랍게 예비해 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주님 만족하실 만큼 넉넉하게 충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주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더 아름답게 주님을 섬기지 못해도, 작은 능력뿐이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부목사로 사역할 때도 그랬고, 강남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할 때도 교회를 건축하는 중이어서 수중에 돈 십만 원 저축하고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유학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미국의 한 신학대학원에서 입학허가를 받고 나서 출발을 해야 했던 때 저는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성격이 변변찮아서 누구에게 저 도와달라는 말은 죽어도 못하는 스타일입니다. 

유학 출발할 날은 다가오고 수중에 돈은 없고...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나가 기도할 때 입학허가서를 아예 들고 나갔습니다. 교인들 다 돌아가고 난 다음에 혼자 엎드려서 기도할 때 그것을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울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찬양하고... 그때 불렀던 단골 찬양은 455장이었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벗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 

3절 부르다가 저는 한 단어에 목에 메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내 궁핍함을 아시고...” 그 부분만 부르다 보면 수중에 돈 10만원 없는 것이 왜 그렇게 서럽습니까? 엉엉 울었습니다. 저는 그 때 믿음이 좋아서 울었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그 때를 생각해 보면 불안해서 방황했고, 믿음이 없어서 울었습니다. 
빈손 들고 갔습니다.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공부하는 동안 암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데 두 손을 높이 들고 있다 보면 모퉁이만 돌아서면 예비해 놓으신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고, 모퉁이만 돌아서면 예비해 놓으신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손길을 가장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도와주셨던 도우심과 예비하신 은혜들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부 마치고 귀국하던 때 김포공항에 내리면서 아이들 손잡고 감사기도 드리고 날짜를 헤아려 보았던 7년 3개월 10일을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돈이 없어서 한 끼도 굶지 않았습니다. 한학기도 쉬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예비해 놓으신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찬송이 바뀌었지요.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작은 믿음을 가지고 걸어갔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셨습니다. 부모가 있어도 고아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도 영적 고아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험한 세상, 수많은 문제 속에서 살아가면서 “나의 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귀하신 분입니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삶의 어려운 시간들 속에서도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예비하시는 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기로 마음 정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보호하실 것입니다. 지키길 것입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을 존귀히 여길 때, 하나님은 결코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십시다. 답답한 날에도 믿음으로 걸어가십시다. 그런데 왜 문제만 부딪혀 오면 믿음으로 살기가 그렇게 힘이 드는 것입니까? 그래서 남아프리카의 설교자였던 엔드류 머레이는 그렇게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 믿음은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심령 속에서 솟구쳐 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바라보았다면, 자기의 노년을 바라보았다면, 자기를 원망하며 평생을 살아갈 아내를 바라보았다면 한걸음도 걸어갈 수 없는 길이 모리아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바라보지 않습니다. 노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어렵고 답답할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평온한 삶을 살고 있을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겨부르는 찬양을 그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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