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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여실 때 (계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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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여실 때 (계 6:1~6)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6:1-6). 


Ⅰ. 본문의 배경 

사도 요한은 노년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박해를 받고 밧모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도의 유일한 위로는 주님과의 교제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사도의 서신이자 성경의 마지막 계시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는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일곱 교회가 교회 역사의 일곱 시대와 관련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에베소 교회는 사도와 그 이후시대를,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이 오시기 직전 말세의 교회를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은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지역의 실제 일곱 교회였고, 그 교회들이 주님께 지적받은 좋고 나쁜 상태는 이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후대의 교회들이 거울삼아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스스로를 주님 앞에 바꾸고 세워야 할 지침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런 계시가 2장 3장을 걸쳐 나오고 4장부터 계시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일곱 교회에 전달하라는 소명을 받은 사도가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이 노(老)사도는 그렇게 크게 통곡하는 것일까요? 


Ⅱ. 통곡하는 노(老)사도 

희랍어 성경을 보면 이것은 조용한 흐느낌이 아니라 목 놓아 우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사도가 그렇게 통곡하는지 알기위해서 우리는 우선 그의 사명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A. 주어진 사명(1:19) 

성경은 그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19-20). 곧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은 지금 있는 일과 마지막 때에 일어날 위대한 일들, 그리고 목회자와 교회에 관한 비밀들을 주님으로부터 계시 받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이 깨우칠 뿐만 아니라 이후에 지상에 존재할 모든 교회들도 이를 통해 일깨우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 몸도 가누기 쉽지 않은 노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나이가 되면 은퇴하고 나이도 있으니 교회에 다니다가 목사님 장례식만 받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주님을 젊어서 알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거나 혹은 자신이 지식이 모자라고 재물이 없는데 무슨 사명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노구를 이끌고 외로운 섬에서 지내는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께서는 중차대한 사명을 주시고, 이후 교회의 생명이 달린 진리를 맡기셨습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도 없고 주님이 부르시는 때는 사람의 지혜로 부르심과는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쓰임 받을 만한 때는 쓰시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모세가 아닙니까? 

젊고 기억력이 있어 애굽의 모든 문물과 학식에 통달하고 이스라엘을 위한 열정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때 그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80세가 넘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부르심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나이에 주님은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그를 만나시고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할 때 자기에게 주신 은혜의 비밀이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목표도 없이 경주에 나가 달음박질하는 선수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목표도 없는 그에게 어떻게 최선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의 부르심은 현저히 달라서 하나님은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과, 때가 다 지나간 것 같은 사람을 부르셔서 당신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봉인된 책(5:1) 

노(老)사도의 사명은 자기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해 주셔야만 알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오른 손에 책이 들려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지막에 될 위대한 일들의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당연히 천사가 이것을 받들어 풀고 자신에게 가르쳐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도에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당시 봉인은 왕이나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두루마리에 찍힌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고 만약 다른 이가 그것을 뗀다면 왕의 명령을 거스른 것으로 여겨 죽음을 면치 못 했습니다. 사도 앞에 놓인 책은 봉인되어 있었고 그 누구도 그것을 풀 권리는 없었습니다. 그 앞에서 사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C. 통곡하는 노(老)사도 

그는 크게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평생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만을 위해 살아온 노(老)사도에게 자신이 목회하던 성도들이 얼마나 보고싶었겠습니끼? 또 두고 온 혈육들은 얼마나 그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던 사도가 주님의 계시의 책을 볼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억제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목 놓아 운 것입니다. 뼛속 깊이 사무친 전존재적인 슬픔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도가 그렇게 울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이 인봉을 풀어주시지 않으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곧 일곱 별과 일곱 교회에 대해 현재 상태와 미래에 하나님의 일을 알려줄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로 사는 동안 많은 시련과 환난을 만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십자가를 지고 눈물 골짜기와 폭풍우, 외로움과 두려움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겪는 모든 고통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체험은 날마다 우리에 대해서는 죽고 주님을 향해서는 살게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통곡하는 노(老)사도 앞에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왜 일까요? 

사도가 통곡했던 이유가 우리가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책을 볼 수 없었기 때문 사도는 울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때가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닫지 못해서 나는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이고 나의 지성은 눈멀어 자신의 힘으로는 인봉된 책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께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며 나의 눈을 열어 기이한 법을 보여주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무지로 인하여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못할까봐 염려스러워 울어본 일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진리의 말씀과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수많은 책들이 많은 매체들이 즐비한데 조금도 감사하지 않고 그 진리가 내 마음에 없다는 이유로 안타까워하지 않는 신앙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은 많고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그것이 그 사람을 녹인 진리가 아니기에 사람들은 길을 잃고 헤매며 목말라 기갈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노(老)사도는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Ⅲ. 말씀을 여실 때 

그때 주님께서 말씀을 여실 때가 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렇게 저렇게 말씀이 열릴 것을 미리 말씀해주시지 사도가 그 많은 시간을 통곡과 눈물로 울고 난 후 위로해주셨을까요?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말씀의 주인이신 다윗의 뿌리를 만나게 됩니다. 

A. 말씀의 주인, 다윗의 뿌리 

말씀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창조 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는 성부 하나님께서 낳으셨지만 그분의 나오심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지혜와 하나님 안에 있는 큰 지식의 반영이었습니다. 위격은 달라 아버지와 교통하셨으나 신적인 본질에서는 동등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친히 보내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교통하던 하나님과의 사귐을 직접적으로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인격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삼위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셨고, 진리의 말씀이신 그분을 통해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 진리의 빛을 보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은 다윗의 뿌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견 이해하기 힘듭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선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사적인 중요한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다윗왕국은 그 당시 영광과 위엄에 있어서 가장 찬란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왕국은 영원히 있을 또 다른 나라를 뿌리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곧 보이는 다윗의 아름다운 왕국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의 한 표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혈통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이었으나 영적으로는 모든 신자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왕국의 뿌리였던 것입니다. 그 뿌리 안에서 뿌리를 보여주도록 나타났던 찬란한 왕국은 소멸되고 소멸된 왕국 안에서 다시 꽃피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다윗의 뿌리로 묘사되고 말씀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주는 권세를 갖게 되신 근거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구속을 완성하심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구속을 완성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새로운 의미에서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말씀의 주인이 되신 방식 또한 보혜사 성령이 오심으로써 그 모든 진리와 진리의 의미를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 예수의 분신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복음과 계시의 말씀에 의미를 밝히 열어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를 비롯한 가톨릭 신자들과 이단들이 이 성경의 기본적인 원리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직통으로 계시를 받고 마음속에 은밀히 말씀하시는 음성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의 기준들은 무너지고 교회는 질서를 잃었고 사단은 인간들의 이 혼란한 틈을 타 오류로 몰아넣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진리를 깨닫는 일은 초보적인 신앙의 대명사가 되었고 누구든지 관상기도이니 광명이니 내면의 빛이니 성령에 의한 주관적 체험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어리석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들이 교회를 더럽히고 참된 기독교 신앙을 사악하게 만드는 원흉이라고 생각했던 종교 개혁자 단번에 이것들을 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중세의 미신 속에서 성경에 관한 중요한 교리를 복원했습니다. 바로 말씀의 주인인신 그리스도 예수가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에 대해 증거 하시는 객관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리였습니다. 

오직 66권의 하나님의 말씀만이 주님의 진정한 계시라고 믿었고 성령의 위대한 역사는 바로 말씀을 열어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의 심령 속에 불어 넣어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성령을 통해 일어나고 성령의 위대한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짝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떠난 성령의 역사는 신뢰할 수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식일 뿐이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신비한 경건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말씀을 붙들었고 말씀을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인간의 모든 탐구 능력을 넘어서는 성령의 강한 빛줄기, 우리 인간 지성에 벼락을 내리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선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목마르게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위대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을 되찾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B. 빛을 구하는 기도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압니다. 진리의 말씀을 모르고 자기의 주관을 하나님 말씀처럼 높이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이 위대한 성령의 역사는 진리의 말씀과 함께 다윗의 뿌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열어주심을 통해 일어나는데 도대체 어느 교인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이 노(老)사도처럼 통곡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해결사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형통주의의 복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헤아릴 수 없는 신학적 혼란이 이 개혁사상을 침해하고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고통 하는 더 많은 성도들이 있는데 그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가 일생동안 하여야 할 기도를 줄이고 줄이면 오직 둘 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찬란한 빛과 이 빛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 이 두 가지 이외에는 사실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빛을 구하는 기도드리고 있습니까? 정상적으로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면 회심을 하여 신자가 되든지 아니면 그 진리가 미워 뛰쳐나가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미지근한 모든 신앙생활은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교회생활 모두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신

앙의 길을 달려갈 때도 있고 걸어갈 때도 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깊이 착념하고 계시에 붙들려 사는 것이 아닙니까? 진리의 빛을 깨닫도록 기도하고 말씀의 깨우침이 있는 가운데 신앙생활이 멈추면 즉시 영혼의 물러감이 시작됩니다. 신앙의 관록은 믿음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계신 동안만 주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Ⅳ. 기도 

혹시나 졸고 계십니까? 교통전문가들은 운전자가 전방만 똑바로 쳐다봐도 대형 사고는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탈해 시궁창에 빠진 것이라면, 교회 출석을 안 하고 자기 본의대로 사는 사람들은 갓길에 정차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에 나와서 말씀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은 졸면서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갓길에 세워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빛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보셨습니까? “주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이세상의 것들 말고 주님의 불변하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해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는 외로운 섬에 홀로 굶주리며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 진리를 깨우쳐 주는 수많은 책들 그런데도 우리는 사도와 같은 이유로 울지 않습니다. 더 많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우리의 탐욕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소명은 많아 보이지만 줄이고 줄이면 하나입니다. 내 주되신 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이가 비록 이 세상에서 높은 권세나 아름다운 지위가 없어도 이 땅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사람의 지위나 소유의 크기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붙들고 있는 진리의 빛의 크기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진리의 빛으로 나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 가득 채우시도록 그 사랑으로 내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진리를 바라보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 나의 행복이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면 여러분의 예배가 바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열어달라는 기도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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