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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로 살리심은 (벧전 2: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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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살리심은 (벧전 2:23~24)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을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3-24). 

Ⅰ. 본문해설 

사도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쓴 목적은 핍박을 받고 있거나 흩어진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담대한 믿음과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우리들이 이미 받은 구원의 아름다운 의미와 축복에 대해서 설명하고 2장에서는 구원 얻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도 이 맥락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우리의 두 상태를 대조함으로써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Ⅱ. 우리의 옛 상태 

먼저 우리의 옛 상태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벧전 2:25上). 이것이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이들과 우리의 옛 상태입니다. 양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가장 많이 의존합니다. 지독한 근시안에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양이 사람을 의존하며 사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있고,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을 가지고 인식합니다. 게다가 동물에게는 없는 하나님 닮은 영혼이 있어서 물질의 이치와 그 너머에 있는 영적인 세계까지 이해하고 하나님을 숙고하는 능력까지 부여 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무생물과 식물, 동물보다 훨씬 우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함에서는 존재의 정도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더 많이 의존하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하더라도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지 않으면 영적인 기갈을 체험하며 자신의 생명을 올바로 이어갈 수 없습니다. 육체의 생명이 영혼이라면 하나님은 그 생명의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창조되었지만 한 마리의 양처럼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 붙어있도록 창조된 존재인데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주인 삼았으며, 이 날들을 성경은 길 잃은 양에 비유한 것입니다. 예번에 우리의 영혼은 어둠 속에 갇히고, 지성은 눈멀고, 정서는 부패하였습니다. 의지는 헛된 것에는 굴복하고 굴복해야할 하나님께는 완고히 반항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세상의 환경과 사람들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사실 그 원인은 우리 자신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신자가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구원을 일상적으로 간주하고 살아가는 안일한 신앙생활을 할 때 그것은 예전에 그리스도 없을 때 어땠는지 새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복음의 빛이 비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에 대한 뼈아픈 배신감을 느끼며 하나님을 목자로 삼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런 우리의 옛 상태를 잊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칠 순종이 너무나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Ⅲ. 우리의 새 상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고 가시밭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우리들을 내버려두시지 않고 건지셔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 상태 입니다.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下). 

이제는 사랑이 많은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의 영혼의 목자가 되셔서 곤고하고 목마른 인생의 길을 지날 때는, 우리 앞에 샘을 터뜨려 위로와 힘을 주시고, 시련과 고통 속에 모든 힘을 잃어버렸을 때는 하늘을 열고 능력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더구나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능력, 진리를 위하여 외로워져도 고독하지 않는 힘과 같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지성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극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보여주시고 그 진리의 아름다운 빛들을 우리에게 비추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진리에 떨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 속에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감정들을 정결케 하시고 허무한 데 굴복하던 의지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충만한 은혜의 삶을 살 때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시련과 난관 죄책감의 구렁에서도 우리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주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들 중에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까? 어둠 가운데 살았던 지난날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상될수록 오늘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날들은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가운데 때로는 우리가 죄와 부패 환경의 깊음 속에서 고통 받고 영혼의 갈급함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먼저 우리의 입맛을 쓰게 함으로써 이후에 부어주실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감미로움을 알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일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수시로 주님을 배반하고 주신 바 은혜를 이 세상의 정욕과 바꾸기 좋아하는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붙드셨습니다. 

여러분은 약했지만 주님의 강한 손길로 붙드시는 영혼의 목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때가 언제이든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새로운 능력을 경험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싸움과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불같은 시련인데도 신기하게 주님은 불을 끄거나 시련을 물러가게 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주님 때문에 강하게 하십니다. 이 주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건만 그들보다 의롭거나 선한 일을 많이 행한 적도 없는, 아무 공로 없는 우리를 붙드셔서 생명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사랑하며 섬겨야 하는지 목회자를 통해 가르쳐주시기까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비참한 옛 상태에서 이토록 복된 상태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무엇이 있었습니까? 


Ⅳ.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그 복락의 이유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이렇게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먼저 말합니다. 


A.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 

주님은 죄와는 관계가 지으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죄인처럼 저주를 받아 강도들과 함께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저주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사람들은 사람들이 정죄하여 나무에 매달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와 상관이 없는 예수는 죽이시고 죄와 관계있는 우리들은 살게 하도록 뜻하신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신 것입니다(요일 4:9).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처음 받았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졌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신 것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에 우리의 마음이 묶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사랑에 싸늘히 식을 때 우리는 그렇게 기뻐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힘겹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매일 우리의 지성을 채우던 진리의 빛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달려가기 위해 삶의 한 길을 걷고 순종하는 성도가 진리를 사랑함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혜에 물러나고 뒤로 미끄러졌을 때를 회상해 보십시오. 제일 먼저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린 아이처럼 늘 흐르던 십자가 사랑의 눈물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머릿속에는 수많은 지식의 개념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마음에는 예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이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던 우리들을 건져 목자의 품에 돌아오게 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B. 고난의 목적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목적은 속죄였지만 구체적으로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는 오늘 이 고난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下). 그 분이 어떤 길을 걸었습니까?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2-23)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렇게 당신이 가신 삶을 우리로 하여금 모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존 칼빈은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물론 이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과 성품, 삶을 예수 닮도록 성숙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많은 역경과 시련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죄 없이 애매히 당하는 고통일 수도 있고, 자기의 연약함과 죄 때문에 다가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성숙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품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모든 본성과 삶을 바꾸심으로 우리로 예수의 향기가 되게 하기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신자가 그리스도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평안하고 안락한 살을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삶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섬기고 살지만 이 세상에 것들 때문에, 그것들을 위하여, 그것들을 소유하기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고난이 오고 시련이 닥쳐 힘이 들 때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바라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볼 때 자기에게 매인 십자가가 너무 크다고 원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으며, 그들이 바라보는 그 언덕에는 주님이 친히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그 형상이 받으시는 고난의 깊이와 넓이는 자기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무한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유혹과 감각적인 표상 속에서 주님보다 어떤 것이 주님보다 소중하다 우리를 속일 때 십자가의 경험은 항상 우리를 새롭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고난이 오거나 시련이 올 때 사람을 생각하면 미움의 정동이 일어나고 보복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으며 진리를 따라 살 때 고난이 있고 쓰라린 슬픔이 있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분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큰 경륜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불평과 불만을 버리고 주님 한 분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믿음의 길을 헤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취를 따르게 되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예수를 많이 닮은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고난의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반응할 수도 없습니다. 산 자는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자극할지라도 그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생명력을 발휘하라는 의미입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내 안에 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그를 때리고 모욕한 이 세상의 손과 악수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자신에 실재화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살 때 우리는 죄 된 마음을 버리고 주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더 주님을 닮지 못하는 것에 죄송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랑이 싹트고, 극악한 악인이나 죄인에게도 복수를 꿈꾸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Ⅴ.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공의로우시고, 심판하시는 아버지께 영혼까지 의탁했던 것을 본받아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충분히 죽을 때, 살아나는 새사람을 봅니다. 날마다 그 은혜의 힘을 강건함을 더해가는 속사람을 봅니다. 신령한 말씀을 배우며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강해지고 그 고난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잠시 나태함과, 무분별함, 부주의함, 때로는 실제적인 짓고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물러났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고난과 복음의 목적으로 돌아가십시오. 거기에 여러분의 진정한 행복과 참된 삶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은 그 사랑을 알고 진리를 따라 우리가 살도록 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신자로서 세상은 늘 변하나 여러분은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 십자가에 더 가까워지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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