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의 성숙 (롬 15:1~9)

  • 잡초 잡초
  • 303
  • 0

첨부 1


신앙의 성숙 (롬 15:1~9)
 

한낮에는 아직 덥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완연한 가을이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온 산이 단풍으로 갈아입게 될 것입니다. 화면을 보시고 잠시 단풍 숲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올 가을에 적당한 때를 봐서 교우들이 산에 한 번 같이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단풍이 절정에 달하면 온 산이 붉게, 노랗게 물듭니다. 언뜻 보면 붉은 색, 노란 색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가까이 가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붉고, 노랗게 물든 산이라고 하더라도, 거긴 푸른 잎이 있게 마련입니다. 반드시 푸른 잎이 섞여 있습니다. 

단풍 숲에도 푸른 잎은 있듯이, 사람들이 모인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인 모두가 다 똑같은 색깔일 수는 없습니다. 오래 전에 늘푸른대학 어르신들 소풍을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소풍 간다는 말을 듣고 학생이 아닌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갑자기 교회 봉고까지 동원해서 모시고는 갔는데, 도시락이 모자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봉사자들의 도시락을 어른들에게 드렸습니다. 

어르신들 중에는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이리 와서 반씩 나눠 먹지>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 분들은 오랫동안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신 분들입니다. 이 분들은 봉사자들이 얼마나 수고하는지 잘 아시기에 같이 먹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봉사자들이 <그럽시다>라고 할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날 봉사자들은 굶었습니다. 봉사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사님 시장하지요? 미안하네요.> <괜찮습니다. 일부러 다이어트도 하는데요, 뭐!> 집사님은 굶어도 기쁩니다. 그런 분은 좋은 인상으로 남습니다. 나중에도 어려운 부탁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집사님, 미안한데 바쁘지 않으면 그 날 좀 와서 도와 주세요!>

그러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도시락을 드렸는데도 화를 내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이유는 왜 다른 분들보다 늦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저쪽부터 주느냐? 왜 우리 쪽엔 늦게 주느냐?> 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분에게 <저기 저 분은 아예 굶었는데, 조금 늦은 것 가지고 뭘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그 분은 처음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금방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어떤 분은 <반씩 나눠 먹자>고 말씀하는데, 어떤 분은 단지 늦게 받으신 것 때문에 화를 냅니다. 사람마다 너무 다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열이면 열 명이 다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이 아직 연약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에 따라 반응도 다릅니다. 

예컨대 주차장도 그렇습니다. 주차장이 아주 좁은 시내 한 복판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 좋은 분은 교회 주차장이 좁아도 불평이 없습니다. 먼 곳에 있는 사설 주차장에 자신이 주차비를 내고 옵니다. 아무 불평이 없습니다. 차를 멀리 댈 것을 고려하여 지각하지 않으려고 일찍 옵니다. 그리고 은혜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 제게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제가 교회 주차장을 마련하는 데 헌금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늦게 와서 이미 주차장이 가득 찬 것을 보면 불평이 생깁니다. <이 교회는 왜 주차장도 제대로 없나?> 이렇게 불평하면서 그냥 집에 가 버립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음 주일부터 일찍 오면 되지 않겠느냐? 뭘 그런 것 가지고 불평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분은 그것을 감당할만한 이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기분이 상하면 신앙생활 하는데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믿고자 교회에 와서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으면 하나님도 믿지 못하는 불행한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 생활을 위해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어떠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행복한 교회 생활을 위해 배워야 할 원리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배려한다>, 바로 이것입니다. <저 분은 아직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저 분도 더 큰 은혜를 받으면 나 보다 더 교회를 사랑할 거야!> 이렇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먼 데다 주차를 하고 교회 주차장은 처음 오는 분들을 위해 비워 놓아야 합니다.   

이런 배려가 왜 필요합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당신은 희생하셨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매우 피곤하고 시장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에 식사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쉬면서 식사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식사도 못하셨어. 지금 우리가 또 찾아가면 너무 힘드실 거야. 그러니 내일 가자> 이렇게 말할만한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만 생각하면서 또 찾아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또 왔느냐?>고 못마땅해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셨고,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셨고, 나중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이들은 아직 우리를 생각해 줄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 이들은 아직 자신들밖에 몰라. 우리가 이들을 배려해야지...> 이게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격을 논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입장을 이해하셨습니다. 우리편에서 주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기에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주님은 <넌 그것도 해결 못해?> 이렇게 말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 안다. 내가 네 사정 다 알아.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은혜의 결과인 줄 믿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울처럼 해라. 넌 왜 베드로처럼 못하느냐? 다윗처럼 믿음으로 해 봐!> 이렇게 말씀하면서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셨다면, 우리 중에 여기 있을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더러운 우리를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부족한 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런 은혜로 배려해 주셨기에 우리도 서로를 배려해야 합니다. 오래 믿은 분이 처음 믿는 분을, 여유가 있는 분이 가난한 분들을, 건강한 분들이 병든 분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이런 배려가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서로 배려하면서 아름답게 살길 원하십니다. 그게 효도입니다. 그런데 형제 자매끼리 배려하지 못하면 그것처럼 불효는 없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공부를 잘 하는 아이도 있고, 못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 형이 공부 못하는 동생을 꾸짖으면서 <넌 왜 나처럼 못해? 너 같은 녀석은 밥 먹을 자격도 없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게 옳습니까? 그 때 공부 잘하는 형은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형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엄마, 동생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 녀석이 성적은 좀 떨어지지만, 얼마나 성격이 좋고, 운동도 잘하고, 친구도 많습니까? 저런 녀석이 나중에 더 잘 산대요. 난 저 녀석이 부러워요. 내가 동생과 잘 도우면서 살 테니 걱정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 그게 효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에게 서로를 받아 주라고 말씀합니다.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여기 <받는다>는 단어는 <친구로 삼다, 손을 잡다, 옆으로 오게 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온 분을 손을 잡아 우리 옆에 오게 해야 합니다. 친구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분들에게 더 친절해야 합니다. 

<왜 나처럼 하지 않느냐?>고 꾸중하지 마십시오. 아직 약해서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분들 입장에서 생각해 주십시오. <힘드실 텐데, 새벽에도 오셨네요. 성도님의 그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말해 드려야 합니다. 못 나오면 <요즘 몸이 불편하다면서요.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힘내세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 동안 좀 나오나 했더니, 그러면 그렇지. 새벽기도 할 거라고 큰소리치더니, 내 그럴 줄 알았어. 그 양반 언제 끝까지 하는 거 봤어? 다 작심삼일이야!> 이렇게 핀잔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에 대하여 잘 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새로 오신 분들을 잘 도와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첫 인상은 5분 안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용어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아직 교회에 오지 않는 분들을 <불신자, 버림받은 사람들,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입니다. 얼마든지 부드러운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는 알게 될 분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소망이 있어요. 또 새로 오신 분들을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들,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직은 강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보다 더 잘 믿을 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새 가족들을 잘 모셔야 합니다. 친절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교회의 경쟁 상대가 누구입니까? 이웃에 있는 다른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경쟁 상대는 세상입니다. 많은 분들을 잡아끌고 있는 세상과 경쟁하여 그 분들을 교회로 오시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백화점, 골프장, 놀이공원, 고급 레스토랑, 은행 등 무수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가 보세요. 얼마나 친절합니까? 전부 이름 끝에 <님>자를 붙여 줍니다. <고객님, 김운성 님> 이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인사를 얼마나 잘 합니까? <반갑습니다. 좋은 쇼핑 되십시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우리는 교회에 처음 오시는 분들이 세상에서 그런 대접을 받던 분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들은 교회에서도 그런 대접을 받길 원합니다. 더구나 어떤 책에 보니 <교회의 마지막 경쟁 상대는 침대>라고 했습니다. 주일 아침 침대에서 늦잠을 자는 사람들을 일찍 일어나게 해서 교회에 오게 하려면 적어도 침대가 주는 휴식보다는 더 좋은 선물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와 보니 의자도 딱딱하고, 대형 마트는 주차장도 넓은데 교회는 주차장도 부족하고, 노래방 노래는 재미있는데 찬송가는 재미도 없고, 코메디는 웃기기라도 하는데 목사 설교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그러니 교회에 오시는 게 쉽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런 것들과 경쟁하여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들에게 감동을 드려야 합니다. 미국에서 30년을 살고 있는 분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어느 미국인에게 뭘 물어 보았더니,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차로 가서 노트북 컴퓨터를 가져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오시는 분들에게 <적당한 수준을 넘어서 감동이 있는 대접>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시설 면에서 결코 호텔처럼 안락하지 못합니다. 휴양지처럼 아름답지도 못합니다. 전망 좋은 곳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무기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친절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진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이 다 교회로 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만 배려하길 원하신 게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은 이방인들, 역사와 전통과 혈통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끼리도 다 서로 받아 하나가 되길 원하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또 다른 많은 별칭을 가지길 원합니다. <사랑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친절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게 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자리에 들어오면 <너무 마음이 평안하여 행복한 졸음이 오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오면 또 오고 싶은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한 번 다니면 세상 떠나는 그 날까지 다니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서로를 배려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염려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상대방이 받아주기만 바라는 어린아이가 될까 하는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약할 때는 보살핌이 필요하고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 경험이 쌓이고 믿음이 자라면 이제는 남들이 받아주기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이젠 섬기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반 무리들에게는 많은 배려를 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매우 강력한 요구를 많이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과 함께 죽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은 일반 무리들에게 적용되는 기준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라면 제자에게 맞는 기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정도 되면 처음 믿는 교우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 믿음이, 섬김이, 헌신이, 봉사가, 희생이 달라야 합니다. 수십 년 믿고 중요한 직분을 받은 이들이 교회온 지 이제 일이 년 밖에 되지 않은 사람보다 못하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장로님은 장로님다워야 하고, 권사님은 권사님 답게 섬겨야 하고, 집사님은 집사님 다운 헌신을 해야 합니다. 새로 오신 분들처럼 불평하면 안 됩니다. 작은 일 하나를 하고 힘들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날마다 믿음이 자라시길 기원합니다. 교회 오는 게 힘들던 분들이 교회를 즐겁게 올 수 있길 원합니다. 교회에 대해 불평이 많던 분들이 그 불만스러운 부분을 자신이 메우고 해결해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되길 원합니다. <목사님, 저 이것보다 훨씬 힘든 일도 잘 할 수 있어요. 더 어려운 일들을 많이 맡겨 주세요>라고 할 수 있길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고, 그것이 열매 가득한 신앙생활로 연결되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