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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문안 (고전 16: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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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문안 (고전 16:15~20)


저희 교회 창립 9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교회가 나이를 먹는 것은 여자가 나이를 먹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부끄럽습니다. 나이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별로 이룬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9주년을 맞아서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은 첫째는 내 교회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한 사람이 교회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내 것처럼 사랑하고 내 것처럼 정성껏 목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고 성도님들에게 있습니다. 결국은 성도님들이 교회를 책임져야 됩니다. 예컨대 교회가 빚이 있다면-실제는 없지만- 여러분이 그것을 갚아야 되고 만약에 소송에 걸린다면-그런 일이 없겠지만- 여러분이 나서서 처리를 해야 됩니다. 

목회자는 왔다가도 갑니다. 은퇴하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은 은퇴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은퇴하고 떠난 후에도 성도들은 그 교회에 남아서 그 교회를 지켜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이 목사보다도 더 오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난 9년 동안 무엇을 이루었느냐.

고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은 아들이 넷 있는 집의 막내아들이었지요. 그는 둘째 형인 존 F. 케네디와 같은 카리스마를 갖지 못했고 셋째 형인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저돌적이지도 못했지만 그러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오랜 세월동안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상원의원 임기를 여덟 번 했습니다. 모두 사십팔 년, 거의 반세기동안 상원의원의 자리를 지키고 그 가문의 어른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은 존 F. 케네디도 못하고 로버트 케네디도 하지 못한 것인데 막내인 에드워드 케네디가 해낸 것입니다. 형들도 하지 못한 것을 막내가 했습니다. 

자리만 지켜도 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이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까. 또 제가 여전히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 해도 감사한 것입니다 

신앙은 지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끝나지 않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겼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부분적인 승리일 뿐이지 최종적인 승리는 아니에요. 끝까지 가봐야 됩니다. 끝까지 가봐야 열매가 무엇이고 결과가 무엇이고 승패를 알고 그리고 이 이익이 얼마 남았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판단을 주님의 날까지는 보류해야 됩니다. 

때가 되기 이전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지요. 애초에 교회를 개척할 때에도 내가 뭘 해야 되겠다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정해져 있습니다. 갈빗집은 계속해서 갈비를 만들어서 팔고 파스타 집은 계속해서 파스타를 만들어서 팝니다. 도중에 메뉴를 새로 개발할 수도 있고 기존 메뉴가 잘 안 팔린다고 접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주 메뉴는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것은 굉장히 단순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Feed my sheep-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당부하신 한 가지 말씀이었습니다. 목사는 목자와도 같습니다. 양을 먹이는 것. 목자의 책임은 양을 먹이고 양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그 이외의 일은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양을 낳는 것은 양이지 목자가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낳았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양이 양을 낳습니다. 목자가 양을 잘 치면 양들이 건강해져서 새끼를 많이 낳고 양무리가 불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건 양들이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하는 게 아니에요. 부흥하는 교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설교시간에 졸지 않고 둘째는 다음 주일에 또 오고 셋째는 혼자 오지 않고 친구를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데리고 오는 것도 한 두주지 어떻게 일 년 내내 데리고 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교회가 부흥회를 하더라도 하루 이틀이지 만일 일 년 내내 부흥회를 한다면 그건 부흥회가 아니고 정기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단기적인 성과가 아니고 장기적으로 한결같이 변하지 않고 줄기차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것이 있고 부흥이든 뭐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반짝하는 것으로 부흥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은 끝까지 가봐야 되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야 승패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바울이 쓴 서신은 전부 다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이고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교회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바울이 교회의 안부를 물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How are you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처럼 How is the church 교회는 어떠냐 교회의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선교전략은 교회 중심적이었고 도시 중심적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와 선교의 일을 하게 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사도바울의 선교전략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요즘의 선교단체들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교회론 입니다. 교회관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신세를 지면서 교회에 얼마나 기여해야 되는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교회관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예수 믿게 한 다음에 그 사람을 교회에 정착시키지 않으면 그건 전도에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마치 애를 낳은 다음에 그 애를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전도한 다음에는 교회에 연결시켜서 교회에 정착해야 됩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과거에 전도 집회를 할 때 설교 마지막 부분에 늘 하는 말이 ‘다음 주일에는 교회를 가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아무리 집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다녀야 정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 교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 19절에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집에 있는 교회가’ 그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목회하는 교회는 그 집에서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집에서 모였다면 아무리 집이 크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모일 수 있는 사람의 숫자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집은 ㄷ자 식으로 있었다고 봅니다. 건물이 ㄷ자 형식으로 있었고 안뜰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집에 교회가 모일 때는 안뜰에 모이고 그리고 발코니에 사람들이 서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크기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했을 때가 주후 55년경이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22년이 경과했습니다. 22년이 경과한 동안에 이미 그리스 고린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교회가 이미, 기독교 신앙이 이미 뿌리를 내렸다는 얘기이고 그러나 그 규모는 집에서 교회가 모일 규모 정도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이즈와 숫자만으로 교회의 여력을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뿐만이 아니고 모든 목회자들이 앓고 있는 병이 있는데 그것은 소위 대교회 병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들이 대형교회를 이루고 싶어 하고 대형교회가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교 과정과 목회학 박사 과정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과목이 교회성장학입니다. 교회성장학이라는 이름 자체에 어패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하는 목적은 양들을 잘 목회하는 것이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결과뿐이지 그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는 그것은 일반 사업을 하는 것과 장사를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성장이 최종적인 목표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이것은 현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하고 과소평가하고 그것을 멸시하고 불신하고 부족하게 생각하는 그런 영적인 심각한 질병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들은 사무실 벽에 차트를 붙여놓고 그 주에 교회학교 각 부서에 몇 명이 출석했는지를 통계를 붙여놓는 교회도 있는데 무슨 보험설계사 사무실입니까. 그게 무슨 목적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너무 세상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제대로 하면 교회가 건강하면 성장합니다. 아이들이 건강하면 쑥쑥 자라는 것처럼 교회가 건강하고 교인들이 건강하면 신앙이 성장하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게 목적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길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잘 될 줄 믿고 잘 자라날 줄 믿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줄 믿는다면 당연히 교회가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만약에 교회에 대해서 염려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교회요 주님의 일이요 주님의 양무리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내 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너의 양을 먹이라고 한 게 아니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이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실 것입니다.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걸 믿는 것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요 올바른 목회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교회 문안을 안부를 물었다고 하지 않고 교회가 안부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김포공항에 가면 볼 수 있는 광경이 사람들이 둥그렇게 서서 기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누가 이민 갈 때 교인들이 다 나와서 목사님까지 나와서 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어요. 

요즘에는 그런 거 보기 어려워요. 옛날에는 교회 가서 누가 둥그렇게 서있으면 저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다 찬송가까지 불러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왜냐하면 한번가면 언제 볼지 모르니까. 교인들이 그만큼 정이 있고 교회가 정이 있었어요. 누가 병원에 입원하면 제일 먼저 달려와서 기도해 주고 또 관심을 갖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제가 옛날에 한번 교통사고로 입원한 적이 있는데 청년들이 당번을 정해서 돌아가면서 저를 간호하더라구요. 제가 그렇게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얼마나 고맙습니까. 교회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해 주겠습니까. 교회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저력과 능력을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고 ‘네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먼저 매고 그리고 땅에서 매이는 게 아니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주신 권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개의 죄를 용서하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가 있어요. 만일 교회가 아무개의 죄를 그대로 두면 그 죄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있고 저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안부를 묻는 것은 예수님이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교회가 축복하는 것은 예수님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요 예수님이 교회의 신랑이요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다시 오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까지 교회와 성령이 이 땅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초기단계부터 고백한 것이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 예수님의 교회가 결코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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