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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보다 더 나은 변화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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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다 더 좋은 변화 (요 2:1~11)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오늘 본문의 내용을 예수님의 첫번째 표적이라고 소개합니다. 갈릴리 가나는 나사렛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였으며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집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고 예수께 부탁을 한 것을 보면 그 집 주방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친척의 결혼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혼인 잔치집의 포도주가 떨어져 손님들을 대접할 수 없게 되었으니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객들이 예상보다 많이 와서 준비한 음식이 일찍 동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포도주가 떨어진 그날 혼인집에 가문의 명예와 체면과 관계되는 다급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어제 결혼식을 치른 조신구 집사님 댁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을 것...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으리라 상상을 해보면 주혼측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무안했겠습니까? 혼인 잔치집에 포도주가 동이 난 것은 말 그대로 위기상황입니다. 잔치의 흥은 곧 깨지게 될 것이고 손님들은 만족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갈 형편입니다. 손님을 청해놓고 이 무슨 무례한 대접인가, 경우가 없는 일이라고 하며 저마다 투덜거리고 수군거리며 돌아갈 상황입니다. 이보다 더 큰 망신,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딱한 사정을 먼저 알아차린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께 어떻게 좀 해결을 해주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며 냉담한 태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는 그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곁에 있는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집 상황이 급하긴 대단히 급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마침 그 집에 돌 항아리 여섯이 있는 것을 보시고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말을 들었던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 말 없이 순종하여 항아리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인들이 물을 채우자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십니다. 하인들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시키는대로 항아리의 물을 떠다 피로연을 주관하는 연회장에게 갖다주었습니다. 하인이 가져온 포도주 맛을 본 연회장은 기분이 좋아 신랑을 불러 크게 칭찬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대접하고 취한 후에는 낮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가 내놓았다’ 하며 칭찬합니다. 연회장이 맛본 것은 물이 아니라 극상품 포도주였습니다. 연회장이나 신랑 그리고 하객들은 이런 맛좋은 포도주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물을 떠온 하인들만은 그 진실을 알았습니다.

요한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이적을 예수님의 첫번째 표적으로 소개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혼인 잔치에 초청하면 물이 포도주 되게 하실 것이니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하객으로 꼭 초청하라는 말이 아님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이미 많이 들었고 그 의미에 대하여도 수 없이 들어서 알고 있지만 오늘 아침에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요한이 가나 혼인 잔치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을 예수님의 첫번째 이적으로 소개한 데는 좋은 의미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 앞에서 메시야로서 이적 행하신 일을 단 일곱 차례만 알리고 있습니다. 요20:30, 31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는 말로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무슨 예수님이 보이신 이적들을 소개하려는 것보다는 이런 몇 가지 이적들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이적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원이란 어떤 뜻입니까?  죄인을 의인되게 하고 죽을 사람을 살리며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질 사람들을 건져내어 천국백성으로 만드심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여 사람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며 신분을 전혀 다르게 바꾸는 변화, 그것이 구원입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변화시키셨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죄인이 변하여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소망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처음보다 나은 새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오늘 천국잔치가 벌어지는 이 아침에 초대받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의 기쁨을 얻고 맛좋은 인생, 처음보다 나은 인생을 사는 데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첫째, 예수로 말미암아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술집에서 취한 손님들을 속여 가짜 양주를 진짜처럼 비싸게 팔아 바가지 씌운다고 하지요? 앞서 포도주를 아무리 많이 마셔 취했을지라도 맹물을 가져다 주면 누구나 알아차리고 맙니다. 물은 물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입니다. 물이 절대로 포도주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 가나 혼인집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무슨 색소를 넣거나 화학 반응을 일으킬 물질을 첨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인들은 항아리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우라는 말씀과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는 말씀을 순종하고 갖다 주었을 뿐인데 그 물을 받아마신 연회장은 그 어떤 집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최상의 포도주를 맛보았습니다.

물은 물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인 것처럼  죄인은 죄인이고 의인은 의인입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물이 저절로 포도주가 될 수 없듯 죄인이 저절로 의인이 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게 하시니 이것이 예수께서 하시는 놀라운 표적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일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단 한 번 보이신 표적이지만 죽을 죄인이 의인으로 변하게 하심은 어제도 하셨고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시는 이적 중의 이적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변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됨은 세상 어떤 기적보다도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 물 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이 찬송에 아멘하십니까? 예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 계셨기 때문에 놀라운 이적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내 맘에 오셨기 때문에 나의 신분이 변하였고 나의 죄가 씻음 받았으며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변하여 새 사람으로 살아가십니까?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십니까?

사람이 산을 향하여  ‘산아 이리 오너라’ 했는데 산이 요지부동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네가 안 오면 내가 간다’ 하고 산에게 다가갑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저 사람은 평생 변하지 않고 저 모양으로 인생을 살다가 끝장이 날거야 하고 다른 사람의 형편을 걱정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이 변해야 함을 잊지 맙시다. 나는 절대로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변하기만 기다리지 맙시다. 내 고집, 내 신앙 스타일, 내 경험과 내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형제와 자매가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번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성령의 은혜로 녹아져 흐물흐물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으로 나를 마음껏 빚어가십니다. 전에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즐겨하고 형제와 자매를 무시하며 함부로 판단하던 교만한 마음이 변하여 이제는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으로 품어주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변화된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면 자식과 아내와 남편의 흠과 실수가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이 먼저  보입니다.    내가 먼저 고쳐지고 나서야 비로소 옆 사람이 변화되고 자식이 바뀌고 아내가 변하며 남편이 딴 사람으로 바뀝니다.

하루 종일 밖에서 수고하고 밤 늦게 지쳐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가 ‘여보 수고했어요.   오늘도 많이 힘들었지요? 손 씻고 오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된장찌개 끓여놓고 기다렸어요.” 아내의 이 따뜻한 한 마디에 남편은 하루의 피로가 풀리고 얼굴에 생기가 돋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화답합니다. ‘응, 좀 힘들긴 했는데 뭐 괜찮아. 당신도 오늘 하루 종일 집안 일 하고 아이들 돌보느라 쉴틈이 없었지? 좀 더 일찍 돌아와 아이들하고 저녁식사 함께 하고 싶었지만 일이 밀려 빨리 퇴근할 수 없었어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내일은 좀 더 일찍 귀가하도록 노력할게요.’   이 한 마디 말에 서로를 향한 섭섭함이 봄 눈 녹듯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무르익어갑니다.    

가정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쉬워보이는데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것은 요지부동 변할 줄 모르는 내 고집과 자존심 때문입니다. 부부가 팽팽하게 자존심 겨루기 하면서 상대방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기를 기다립니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물을 채우라 그리고 떠서 갖다 주라고 하실 때 묵묵히 순종한 그날 그 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는 가정에 진정한 변화가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그 곳에 예수께서 변화의 주인공으로 계시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날마다 새로워지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주 예수께서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전에 내가 주인이었던 시절에는 입만 열면 자식 자랑, 물질 자랑, 지식 자랑, 가문 자랑, 옷 자랑, 몸매 자랑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더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합니다.     

기독교는 변화를 목표로 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설교의 목적이 사람의 변화를 위함이고, 성경공부와 기도생활 등 모든 경건훈련은 변화된 삶을 목표로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하였고,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 변하였으며, 세리장 삭개오가 변하여 영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보리 언덕 예수님 곁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한 강도가 변하여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 삶에 모셔들이고 주인으로 영접하면 그의 인격이 달라지고 거칠었던 입술이 사랑의 입술이 되며, 부정적 언어가 감사와 소망의 말로 바뀝니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미움과 폭력이 변하여 평화와 화목을 이루는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이런 것들은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소망 없는 죄인을 의인되게 하심이요, 이 세상에 속한 자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이시는 변화에는 끝이 없습니다. 전보다 조금 나아진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조금 변한 것을 완전히 변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맛을 보면 그 진가를 알게 됩니다. 진정한 변화는 맛을 보고 긴가민가하여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맛을 본 즉시 무릎을 치게 만드는 확실한 변화입니다. 연회장은 하인이 나중에 내온 포도주가 정말 좋은 포도주인지 낮은 포도주인지 맛을 보고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변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중에는 변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가짜 포도주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변한 것도 없으면서 자기 혼자 변한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 혼자 변화되었다고 생각하고 혹 참맛을 잘 모르는 몇 사람들이 그런 것 같다고 동의해 줄지라도 결국에는 천국 잔치의 연회장이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날 예수님의 명을 순종하여 물을 떠다 준 하인들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확실한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변하기는 했는데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처음 뜨거웠던 순간에 멈춰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로부터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이 끓는듯 하다가 어느새 옛습관으로 돌아가버린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두아디라교회는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계2:19)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을 갖지 못하면 여전히 영적 어린아이로 머물고 맙니다.    어린 아기들이 그러하듯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체험과 자기 느낌만 중요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합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다 이룬 것처럼 자만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고합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갈6:3)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물로 만드신 포도주는 속임수도 없고 색소를 푼 것도 아니었습니다. 맛과 색과 질이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잘 익은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땡볕 여름과 태풍을 견디며 속이 꽉차게 여문 곡식은 늦가을 추수할 즈음에는 무거운 고개를 숙이고 곡간에 들어갈 날을 기다립니다. 본래 빈 수레가 요란하고 빈 깡통이 시끄럽게 소리를 냅니다. 가득 찬 두레박은 묵직한 느낌으로 따라 올라오지만 헛 두레박질을 하여 물이 조금밖에 담기지 않은 빈 두레박은 우물벽 여기저기 부딪힐 때마다 깡깡 소리만 내고 가볍게 올라오고 한창 목말랐던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맙니다. 쭉정이, 빈수레, 빈 깡통, 빈 두레박 되지 말고 물과 성령으로 아구까지 가득 찬 묵직한 그리스도인으로 날마다 변화되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으면 우리의 상황이 전적으로 달라집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혼인 잔치가 흐지부지, 떨떠름하게 끝장 날 위기 국면에 등장한 극상품 포도주는 그날 잔치를 멋진 축제로 만들었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포도주,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절망의 상황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주 안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객들이 새로운 포도주를 맛보도록 했던 하인들의 믿음과 헌신은 다소 생략된 듯 하지만 사실은 이런 일군들이 말없이 수고하고 있기에  어두운 상황이 축제로 변하였습니다. 하인이 떠다 준 물을 맛본 연회장은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어디서 났을까 궁금하여 신랑을 불러 극찬을 했고 신랑은 영문도 모르고 그날 칭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이렇게 즐겁고 기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 한 사람이 새롭게 변화되면 많은 사람이 즐거움을 얻고 세상에 맛을 내는 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천국잔치의 연회장 하나님께로부터 ‘그대는 처음보다 나중에 더 좋은 것을 내는도다’는 칭찬을 듣는 성도들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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