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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겨운 모정 (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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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겨운 모정 (막 7:24~30)


돼지감자라는 이름의 유래는 옛날엔 사람은 못 먹고 돼지나 먹는 감자라 하여 돼지감자라 칭했으며 또한 뚱딴지처럼 이곳저곳에서 마구 돋아 나와서 밭을 버린다고 옛 어른들이 뚱딴지란 별명을 붙였다고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일반감자는 하얀색이나 자주색 꽃을 피우는 반면, 뚱딴지는 9월말 해바라기처럼 노란 꽃을 피우며 노란 국화 같기도 합니다.

돼지감자를 얼핏 보면 꼭 생강 비슷한 모양입니다. 번식력이 강하여 척박한 땅에서도 엄청나게 뿌리를 뻗습니다. 높이는 1.5m에서 3m에 이르고요.
‘이눌린’ 이라는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당뇨 등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어 ‘천연의 인슐린’ 이라고 하며 섬유질이 많아 변비예방, 칼로리가 적고 당 분해나 소화흡수 분해가 늦어 포만감이 있어 다이어트식품으로도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맛은 실제로 캐서 생으로 먹을 때 약간의 단맛이 있고, 별 맛은 없으며 주로 봄에 해동시 많이 캡니다. 과거에는 노인들에 따르면 배고픈 시절에 주식으로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생으로 먹으면 별미랍니다. 장기간 먹으려면 먹기 편하게 만들어서 액체로 보관해 먹으면 편리하다고 하며, 요리로는 돼지감자 샐러드, 돼지감자 스프, 돼지감자 조림, 돼지감자 볶음, 튀김, 찜, 무침, 절임 등으로 요리하는데 야채와 함께 넣어 먹거나, 양념을 넣어 먹는다고 하네요. 

이 뚱딴지야 말로 한 때는 쓸모는 없고 땅만 버린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오늘에 와서는 식량위기를 벗어나게 해 줄 훌륭한 대용식물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는데다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바 앞에서 이야기한 약효로 인해 지금은 귀한 몸이 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을 여기서도 또 한 번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줄 알았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정말 쓸모가 있는 것이었더라. 이는 비단 돼지감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기술자가 버린 돌을 성전의 모퉁잇돌로 삼으시는 주님이십니다. 혹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손아래서는 그런 내가 가장 존귀한 자로 바뀔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세상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고 합니다. 자식들도 10남매요 저들이 얼마나 화목한지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가정에 몰아닥친 슬픈 소식들은 가슴을 찢어놓고도 남을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우애가 좋던 10남매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하다가 돌풍에 무너져 내린 집에 깔려 한꺼번에 죽습니다. 

거기다가 그 많던 짐승 떼들을 가까이 살던 이웃들이 강도로 돌변해서 다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몹쓸 병까지 걸렸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가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조금만 속상한 일이 있어도 그를 견디지 못하고 심지어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조차도 쉽게 자살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그런 현실 가운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원망하는 거야 냉수 마시기보다 더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가서 죽으라고까지 하겠습니까? 아니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아내야 마음은 아파도 몸은 아프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남편에게 악담을 퍼부어대는 것은 그 마음도 그만큼 아프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악담이라도 퍼부어대니 속이라도 시원할는지 몰라도 그런 말을 듣고 있는 남자의 마음은 대체 어떻겠습니까? 

자식들 다 죽어나갔지 짐승 떼 다 강도당했지 그래 하루아침에 마치 알거지처럼 돼버린 데다가 이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온 몸에 몹쓸 병까지 생겨서 고통스러운데 거기다 대고 아내는 또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가 죽으라고까지 하는 데야 더 이상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도무지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아무리 속상하다 해도 그건 아닙니다. 나도 내 정신이 아니었다고요?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그는 이미 죽어버렸는데 아니 그의 마음은 이미 죽어버린 것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도무지 다시 일어설 수조차 없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는데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정신 나가게 만드는 가슴 아픈 일들이 종종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자리가 빈다고 하거나 그 자리가 비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힘든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결코 비어서는 안 되는 자리입니다. 마땅히 채워져 있어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피치 못할 사고를 당했다던가 아니면 중병에 걸려서 도무지 고칠 길이 없다고 한다면 그 가족의 슬픔이야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떠나 이웃나라 두로 지방으로 가셔서 한 집에 들어가 조용히 쉬고자 했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여정이 힘들었다는 뜻도 됩니다. 물론 보람된 일도 많았습니다. 잠시 쉬거나 심지어는 식사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강행군을 하며 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데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제자들이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고 시비를 겁니다. 어찌 보면 사소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제자들을 트집 잡고 있지만 이는 결국 “예수님 당신에게 불만 있소” 하는 표시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에게 도전하겠다는 의사 표시입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손도 안 씻고 식사를 했다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그럼 그게 죄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들 나름대로 세워놓은 규칙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통이든 관례이든 풍습이든 상관없습니다. 그 자체로 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인들 피곤하지 않겠고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쉬고 싶었습니다. 잠시 조용히 생각 좀 정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외국까지 나가서 한 집에 들어가 조용히 쉬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도 가슴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이 귀신들린 여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사랑스런 딸입니다. 그 딸이 귀신들려 미친 짓을 하는데 어찌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외국에서 그토록 떠들썩하게 소문이 난 바로 그분이 이웃 동네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여인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쫓아오겠죠. 그래요 내가 아프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숨이 목에 걸리도록 아파도 어떻게든지 혼자서 견뎌보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픈 건 자식입니다. 그것도 그냥 아픈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렸습니다. 그래 만나는 사람들마다 심지어 한 동네 사람들까지도 저거 미친년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가슴은 찢어지지만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 딸이 미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웃 사람들이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군거리는 소리를 왜 모르겠습니까? 근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거라사 군대 귀신들린 자는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이를 뿌리치고 무덤가를 뛰어다녔다고 안 합디까? 이 여인의 딸도 아마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도무지 감당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눈물로 지낼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네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니가 내 마음을 아냐고 합니다. “니가 내 마음을 알아?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 누가 내 마음을 알아?”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마음조차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런 내 마음조차 몰라줄 때는 정말 내가 죽든지 아니면 누구라도 죽여 버리고 싶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없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 주님, 내가 감당할 길이 없는 그런 가슴 아픈 일이 내게 있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간구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오직 감사할 일로만 가득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눈물겨운 모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눈물로 지새던 날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딸이 아픈데 마음 좋을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나을 수만 있다면 자기 심장이라도 꺼내주었을 것입니다. 그게 부모 아닙니까? 그런데 길이 없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귀가 번쩍 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예수라는 한 선지자가 나와서 많은 병자들을 고칠 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자도 고치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딸도 고칠 수 있겠네! 한데 문제는 자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대도 하지 않는 이방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철천지원수와 같은 사이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굴뚝같아도 어쩔 수 없어 애태우던 차에 바로 그분이 이웃 동네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여인에게는 눈에 뵈는 것도 없었습니다. 

무슨 생각이고 자시고도 없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냥 냅다 뛴 것입니다. 그래 예수를 만나 그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물론 쉽게 허락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문을 두드려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사실 예수께 달려갈 때만 해도 아무런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를 만나야 된다, 만나서 내 딸을 고쳐 달라고 해야 한다는 것 외에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의 말이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냥은 주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닙니까? 너는 개라는 겁니다. 내가 개까지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소리를 듣는 순간 어쩌면 속에서 욕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왜 왔는데 오죽하면 내가 왜 당신에게까지 와서 엎드렸는데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따지고 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지금은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닙니다. 자기가 예수를 찾아온 것은 예수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떡하든지 그 허락을 받아내 자기 딸이 고침을 받기만을 바라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가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라도 내 딸이 고침만 받을 수 있다면 이건 바가지가 아니라 항아리 채 욕을 먹는다고 한든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거야 말로 개 같은 사랑입니다. 자신을 개로 여기면서까지 라도 딸이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눈물겨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딸만 고침을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하는 이 어머니의 마음이 정말 가슴을 적십니다. 

처음 어떻게 해서 딸에게 귀신이 들렸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 설사 그로 인해서 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해도 딸만 고칠 수 있다면 기꺼이 내 목숨까지도 내 놓겠다는 어머니의 아름다운 사랑이 여기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쁘기만 했던 딸입니다. 그랬던 딸이 어느 날부턴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점점 야위어가는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어머니입니다. 

그것도 여자로서는 감당할 길이 없는 수치스러운 행동조차도 거리낌이 없는 그런 딸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져 내렸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지금 희망이 보입니다. 단지 그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무슨 욕인들 먹지 못하겠습니까? 설사 개가 된들 어떻습니까? 딸만 나을 수 있다면 무슨 욕을 먹는다고 한들 마다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귀신들린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점점 나빠져만 가지 않습니까? 정말 보기에도 흉측하게 변해가는 딸의 모습을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그 모습을 날마다 눈물로 지켜봤던 어머니입니다. 

그런 딸에게 온전한 삶을 다시 선물할 수 있다면 그 딸이 다시 온전해질 수만 있다면 무언들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개 같은 년이라고 욕을 먹은들 어떻습니까? 그저 딸만 온전해질 수 있다면 더 심한 욕인들 듣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억만금을 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좀 심하다 싶은 욕을 들을 뿐입니다. 

한데 그 심하다는 욕도 흔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국인들을 향해서 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건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입니다. 더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한데 거기에 발끈할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상아래 있는 개도 주인 아이들이 먹다가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데 그런 부스러기 은혜라도 허락해 달라고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자존심 상하게 못 살겠네. 내 딸이 고침을 받지는 못할망정 이런 망신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그러겠습니까? 세상에 그럴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확실히 고칠 수만 있다면 무슨 소리를 듣던 매달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미친년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일단 매달려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네 식으로 말한다면 쪽발이 아니면 되놈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을 뿐인데 거기에 뭐 발끈할 것도 없습니다. 

아니 일본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조센징이 뭐 어쩌고저쩌고 한다고 우리가 속상해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같잖아서 속으로 웃을 뿐이지요. 뭐 우리가 조센징이면 지들은 쪽발이 내지는 게다짝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고 웃고 지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 이건 다릅니다. 이건 딸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입니다. 저렇게 미쳐 돌아가다 보면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건 그냥 한가하게 자존심을 이야기할 것도 아닙니다. 뭐 창피 당했다 뭐다 할 것도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그것도 목숨이 달려 있는데 창피 좀 당하면 또 어떻습니까? 그러니 이 여인이 하는 말은 “그저 무슨 말을 하셔도 좋습니다. 내 딸만 좀 고쳐 주십시오.”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들어보니 어머니의 말이 기가 막힙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이 기가 막힙니다. 정말 눈물겨운 어머니의 사랑이 뭉클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래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이 여인은 아니라고 주님이 가셔서 고쳐주셔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고 돌아갑니다.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워 있는데 귀신은 나갔습니다. 여인의 간구가 응답이 된 것입니다. 그 믿음대로 딸이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아마 여인은 어린 딸을 얼싸안고 한참을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야말로 지금까지 담아왔던 서러움이 다 씻겨 내려가는 그런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었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마음 아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딸이 건강한 모습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해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다음 이 여인이 다시 돌아와 예수님께 사실을 알리고 감사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워 있는데 귀신은 나갔다는 말은 어떤 방법으로든 여인이 자기 딸이 고침을 받은 사실을 예수님께 알렸다는 뜻입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딸이 고침받기를 그렇게도 원했기에 그 망신을 그대로 감당했습니다. 오히려 조금도 망신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딸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온전해졌습니다. 어머니의 망신도 마다하지 않는 뜨거운 사랑이 딸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딸은 더 이상 귀신에 매여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견디지 못하고 귀신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딸의 정신이 온전해졌습니다. 더 이상 미친년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이 가져온 기적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 놓을 수 있는 그 사랑, 아프기에 더욱 간절했던 사랑입니다. 아마도 아픈 딸을 보면서 그 속이 다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기쁨은 더 컸습니다. 이런 기쁨과 감사가 우리들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누가 있겠습니까? 자식이 잘못 된다던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게 다 자기 책임인 것처럼 느껴져서 못난 부모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아서 더욱 힘들어하는 것이 부모들 아닙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탄식만 하고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슬퍼만 하고 있겠고 힘들어만 하고 있겠습니까? 그 해결의 열쇠는 바로 우리 주님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듯 그렇게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랑 위에 주님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가정과 자녀들의 형통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업의 번성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가족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과 총명을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학원을 못 보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그 길이 더욱 아름답게 열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신종 풀루로 인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악질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신경 쓰이는 일들이 있습니까? 더 이상 염려하고만 있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 무엇보다도 주님에 대한 신뢰를 배우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또 믿어 주십시오. 그럴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쁨이 오늘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으로 말미암는 감사와 간구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던 것조차도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소중한 것으로 바뀌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안 된다고 하지 마시고 주님을 붙드십시오. 힘들다고 괴롭다고 이젠 나도 지쳤다고 하지 마시고 그럴 시간에 한 번 더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결코 세상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믿고 간구하는 믿음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 답의 주인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입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내 생각에는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마세요. 그냥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면 됩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 끝까지 희생하는 사랑 비록 남들은 개 같은 사랑이라고 욕한들 어떻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눈물겨운 모정과 부정을 통해 우리 자녀들을 구원하고 우리 남편과 아내를 구원하고 우리 이웃들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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