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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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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막 1:1~8)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 전쟁 시기의 복음

주전 63년경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다인들은 이방의 압제를 벗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의 투쟁은 번번이 좌절되곤 했습니다. 헤롯대왕이 죽은 후 일어난 제1차 독립전쟁은 결국 수많은 인명이 살상으로 끝났습니다. 유다인들은 수천 명의 저항군들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장면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그들의 내면에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투쟁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이 로마의 지배에 항거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가혹한 세금과 강제 노역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로마의 ‘제국 신학’(imperial theology)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탄이었으니 말입니다. 

주전 31년 안토니우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분열되었던 로마를 재통일한 아우구스투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로마를 든든한 물적 토대 위에 세웠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위대한 자, 곧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에 대한 신화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아폴로 신과 인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신성한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뜻은 곧 신의 뜻이 되었고, 급기야 그는 신의 아들, 혹은 신이라고까지 높여지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에 등장한 로마 황제들도 모두 신의 아들을 참칭했습니다.

야훼 하나님 이외에 어떤 신도 인정할 수 없었던 유다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아주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고 동화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 체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제2차 유다 독립전쟁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던 것인데, 주후 70년 그들의 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던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정체성의 근거가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담고 있는 마가복음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마가복음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책이 ‘전쟁 시기의 복음’(wartime gospel)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이란 일차적으로는 로마와의 물리적이고 군사적인 충돌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야훼 신학과 제국 신학 사이의 충돌임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 예수,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을 여는 첫 문장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1)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진술입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여겨도 무방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말 한 마디는 마가복음서 전체를 요약하는 핵심 구절입니다. 마가는 예수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두 가지의 호칭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니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단어는 너무 자주 듣던 말이라 어떤 긴장감도, 감동도 일으키지 못하는 상투어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후 70년을 배경으로 하여 이 말을 들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메시야’의 그리스어 표현입니다. 메시야라는 단어는 제1성서(구약)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조치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도 적용된 적도 있습니다(“나 주가 기름 부어 세운 고레스에게 말한다”. 사45:1). 

하지만 이 단어는 후기 유대교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유다인들은 수 세기 동안 이방의 압제 아래 살고 있는 그들을 구원할 미래의 한 인물을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는 바로 그를 가리키는 배타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a messiah’가 ‘the Messiah’가 된 것입니다. 마가는 바로 예수님이야말로 그 메시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제1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단어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고(호11:1), 왕이나 신비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대로 이 단어는 로마의 제국주의 신학 안에서 황제들을 지칭하는 말로 전유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세상의 구원자라고 칭송받았습니다.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신학이 그것입니다. 이 단어는 이제 오직 그와 그의 뒤를 잇는 황제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나사렛에서 태어나 갈릴리에서 활동하다가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에게 그 단어를 과감하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로마 제국 신학에 대한 저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로마제국과 황제들이 가져온다고 말한 평화가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폭로하면서, 지배가 아니라 섬김에 바탕을 둔 참된 평화의 길을 온 세상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전쟁으로 처참하게 유린된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낙심하기는커녕,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야말로 세상의 구원자라는 선언은 참으로 장엄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주님의 길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마가는 주님의 삶과 가르침 전체를 ‘복음’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좋은 소식이 참 많습니다. 대학입학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이나 구직자들에게는 ‘합격’을 통지하는 문자메시지가 복음일 것이고, 회복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는 ‘완치’ 되었다는 의사의 통보가 복음일 것이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는 ‘사면 복권’ 되었다는 소식이 복음일 것입니다. 

그것은 개별적이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좋은 소식일까요? 마가는 ‘길’이라는 말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은 말라기 3장 1절과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길’입니다. ‘네 길’, ‘주님의 길’, ‘그의 길’. 초대 교회 성도들의 별명은 “그 ‘도’를 믿는 사람”(행9:2)이었습니다. 개역성경은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따른다는 말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음은 곧 예수 따름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러저러한 진술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길을 나의 길로 삼고 살아감입니다. 폭력과 힘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나눔과 돌봄이 사회의 핵심원리가 되는 세상의 꿈을 품고 걷는 길이 신앙생활입니다.

성경은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닦는 자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거침이 없는 들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듣기 좋은 소리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마11:7)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간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언자를 보러 나간 것입니다. 그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려 하지도 않고, 겁주기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천둥처럼 울리는 주님의 말씀을 외침으로 정신의 혼미 속에 빠진 이들을 깨울 뿐입니다. 

요한은 절망감과 허탈감에 빠진 영혼들, 그래서 숙명론의 노예가 되어 살려는 이들을 뒤흔들어 역사의 주체로 세우는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힘에 짓눌려 숨죽인 채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라고 그는 외쳤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힘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는 외쳤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그를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 성령 안에서의 삶

요한이 세례를 베푼 곳이 ‘요단강’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요단강은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의 경계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왔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도 요단강을 건너 귀환했습니다. 그렇기에 요단강은 예속에서 해방으로 가는 관문과도 같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며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요한은 새로운 인물을 가리킵니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7-8) 

요한은 문제를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는 불의한 현실을 고발하고, 무뎌진 사람들의 마음을 쇠북을 두드리듯 두드리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 새 삶을 향한 불꽃을 사르는 데 자신은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비판만과 꾸짖음은 오히려 우리를 위축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요한은 자기를 뛰어넘는 어떤 존재, 곧 사람들의 마음의 심지에 성령의 불꽃을 점화시켜줄 사람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마가는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주님은 꾸짖고 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에 내적인 힘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아무도 정죄하지 않고 받아주시는 넉넉한 사랑, 누구를 만나든 그들 속에 있는 보화를 보아내시는 그 사랑의 시선과 만난 사람들은 모두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당당한 영혼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절망의 자리, 망설임의 자리, 무기력의 자리, 비겁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직립(直立)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의한 현실에 협력하기를 거절하고, 새로운 세상의 꿈에 지펴 살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또한 공감의 사람입니다.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외로운 이들 곁에 다가섭니다. 강도 만난 이들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만난 향린교회의 조헌정 목사님은 목이 조금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에 참여했다가, 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그 아픔이 그대로 가슴에 들어와 견딜 수 없어서 소리를 좀 질렀다며 웃더군요.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이 불의한 현실 앞에서 눈을 감을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현실을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른다면 우리는 영적인 ‘바보’들입니다. 영어에서 바보 혹은 백치라는 뜻으로 쓰이는 낱말 idiot는 ‘idiotes'라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공공의 문제에 관심이 없이 오직 사사로운 문제에만 관심을 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런 바보들이 아닌지요?

주님의 길을 걷다가 지칠 때도 있고, 길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신앙이란 ‘집중된 경청’(focused listening)입니다. 저는 가끔 남의 차를 얻어 탑니다. 요즘은 차마다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주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잘 아는 분들은 가끔 내비게이션의 안내대로 가지 않고 자신이 아는 길로 가곤 합니다. 그러면 즉시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그리고는 별로 화내는 기색도 없이 새로운 길을 일러줍니다. 이게 꼭 하나님의 은총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디를 향해 가든, 주님은 가야 할 길을 일러주십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걸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길을 우리의 길로 삼아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과 맞서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려 했던 주님의 길, 그 길을 잘 걷고 계십니까? 이 가을 마음의 심지에 불이 붙어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땀 흘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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