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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이름을 위하여 (행 5: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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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위하여 (행 5:33~42)


15년 전에 신도시에서 개척해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신도시와 신도시 두 도시를 아우를 수 있는 지역에, 넓은 대지를 확보하고, 수 년 내에 큰 교회당 건축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어떤 목회하시나 싶어서, 여쭈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면서 목회하십니까?” 목사에게, 이 질문만큼 어려운 질문도 없습니다. 

목사님은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주저하지 않는 즉답을 하셨습니다. “저는, 교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교회 와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러시면서, 개척 15년 이야기를 죽 하셨습니다. 땅 산 이야기, 교세가 더 많이 늘어나면 학교도 하고 싶고, 병원, 복지시설, 문화교실 등을 하겠노라며 7,000여 평 규모의 건축을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교인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목회’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머릿속에는 주문처럼, “교인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목회?”는 어떤 목회일까 하는 물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제네시의 일기(The Geneses Diary)󰡕 등 많은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H. Nouwe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회사제이면서 심리학자였는데,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의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1996년도에 64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작고하신 분입니다. 작고하기 10년 전인 1986년도에 돌연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박약장애자 공동체인 라르슈 공동체(L'Arche Commmunity)'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인 Daybreak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10년 동안 정신지체장애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음식을 먹여주고, 목욕을 시켜주면서, 그들과 더불어 말씀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末年에 그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오직 꼭대기를 향해 오르막길만 걸어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늘 일등으로 달려 하버드대학 교수직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정신지체아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것은, 인간이란 내리막길을 갈 때, 더욱 성숙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는데,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평화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삶의 결단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도전해 보고 싶은 삶 아닙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충만했던 초기예루살렘교회가 가지고 있던 ‘교회의 原象’을 회복하자는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 33이하 말씀에서도 성령 충만했던 초기예루살렘교회가 가지고 있던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原象’을 증언해 줍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가지고 있던 교회의 원상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하여 凌辱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일입니다(40에 하나 감한 채찍,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함). 41절 말씀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산헤드린)공회 앞을 떠나니라.” 

♣ 신학자 Emil Brunner가 쓴 󰡔우리의 신앙, OUR FAITH󰡕라는 책에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28장 ‘교회(The Church)’라는 장에서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I believe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여기, 중요한 네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1) 교회는, 하나다(일치, 에큐메니칼 운동). (2) 교회는, 거룩하다. 구별된 공동체다(에클레시아). (3) 교회는, 우주적이다. 보편적이다(만유를 통일하시는 주님의 몸이다). 그리고 (4) 교회는 使徒的이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 하나의 단어, 모두 결코 간단하지 않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네 번째 교회는, ‘사도적’이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교회가 사도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 그 복음 위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가 사도적이라는 의미 속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도,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먼저 자신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했습니다. 또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복음적인 삶을 추종했던 인물들입니다. 복음의 원상에 대한 눈목격자들입니다. 만진 대로, 들은 대로, 체험한 대로 예수님의 복음, 십자가,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 原象을 회복하고자 하면,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살았던 그 삶, 곧 사도적인 삶을 추종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도적인 삶이, 󰡔예수, 그리스도󰡕 곧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삶입니다.

♣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요. 그건 사도들이니까? 합니다. 그렇잖습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인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이, 본래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자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우리와는 본래부터 성정이 다른, 奇人들이었을까요? 그렇잖습니다.

일제시대 임시정부 주석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白凡 金九 선생님아시지요. 선생님의 이름은 본래 아홉 ‘九’자가 아니고 거북 ‘龜’자였습니다. 이름을 아홉 九자로 바꾸신 이유가 뭘까요? 일본의 호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일본호적의 ‘龜’).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일본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일본호적에 있는 김구라는 사람이 아닌, 조선인 김구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지요. 호도 蓮下로 쓰고 계셨는데, 白凡으로 고치셨습니다. 

白凡할 때 ‘白’ 자는 白丁할 때, 白자입니다. ‘凡’자는 凡夫할 때 凡자입니다.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의 하등사회의 白丁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투옥되어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로 하여금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도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해 달라”고. 

그런가 하면, 일제시대에 친일하면서 그 대가로 편하게, 부하게, 권력을 누리고, 출세하면서 산 사람들도 많습니다. 역사인식이 달랐던 거지요. 삶의 자세가 달랐던 거지요.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라의 독립을 포기하지 않았던 거지요. 고난의 때,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일구는 선구자였던 겁니다. 

♣ 열두 사도들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믿음의 초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따랐던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12 제자들, 그 外 수많은 제자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가만 깊이 뜯어보면,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피 눈물 나는 고민을 하면서, 󰡔예수, 그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안고 씨름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쉽게 알려고 하지 마세요.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도 서로 모르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쉽게 믿을 수 있는 분 아닙니다. 세상에, 쉬운 일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 제자들은 처음부터 다 믿음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시몬 베드로, 마리아, 도마, 수많은 인물들 가만 들여다보세요. 이들도, 우리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던 사람입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의 처음은 우리와 비슷했는데,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예수님을 알아가는 믿음이, 자라갔던 사람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 18).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먹고, 자고, 이적 기사를 보고, 예수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지만, 깨닫지 못해서, 헛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목적 중에는, 예수님이 세우시는 ‘메시아 왕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얻고자 했습니다. 때가 되었다 싶을 때, 누가 제일 크냐? 다투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들이었지만,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시자, 다 예수님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글로바’라는 제자와 또 다른 한 제자는, 너무 낙망이 되어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일 없던 일로 하고, 아예 고향 ‘엠마오’로 낙향하기도 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몇 차례씩이나 보고도, 열 두 제자 중 일곱 명은, 3년 전에 예수님 만나기 전의 자기들의 직업이었던, 고기잡이 어부생활이나 다시 해 볼까 하고, 디베랴 바다에 나가 그물 던졌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굽니까? 시몬 베드로, 디두모라 하던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또 다른 제자 둘, 모두 일곱 명이었습니다. 

♣ 한 마디로,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자기 삶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방향을 잃고 완전히 헤매고 있었습니다(요 21, 14; 세 번째 나타나신 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실성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 버리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린 제자들 일일이 찾아가서 다 만나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빠져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그들 가운데, 직접 찾아가셨습니다(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지냄, 부활소식을 듣고도 낙망해서 낙향하고 있던 두 제자들의 행로에도 찾아가셨습니다. 

도마가 빠진 다른 제자들이 다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평안을 선포하시고, 만나주셨습니다. 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主를 보았노라” 했지만, 도마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의 손에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 25). 

그런 도마를 위해서도, 예수님은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는 것을 아시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여전히 제자들이 두려움이 싸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찾아가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는, 도마를 지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요 20, 27). 주님의 긍휼하심, 자비하심, 사랑 끝이 없었습니다.

그 때 도마가, 다른 어떤 제자도 고백하지 못한 놀라운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 28). 여러분, 여기를 주목하십시오. 지금 제자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두 다 만났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물론, 도마는 처음 만난 셈이지만요), 제자들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 다 만났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제자들 중 몇 사람이, 그 만남 이후에도 디베랴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습니까? 그 일곱 사람 면면들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首弟子), 도마(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다나엘, 요한, 야고보, 또 다른 두 제자(이름 숨겨져 있음)입니다. 

도무지 제자들,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민스러웠으면 그랬을까요? 고기잡이하러 나갔던 그 일곱 제자들, 아무리 왕년에 유능한 어부였다지만, 고기가 잡힐 리가 있겠습니까? 저 같으면 “거 봐라. 너희들, 어찌 그럴 수 있니? 벼룩도 낯짝이 있지 해도 너무 한다….” 

♣ 그러나 예수님, 방황하는 제자들,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없이, 디베랴 바닷가에 또 찾아가셨습니다. 이번에는, 밤새 허탕 친 제자들을 위해서, 친히 숯불을 피워 생선도 구우셨습니다. 떡도 준비하셔서, 아침 조반에 그들을 조용하게 초대하셨습니다. 그날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일곱 제자들이 함께 조반을 먹었지만, 모두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 20, 12). 

조반 먹은 후, 침묵이 흐르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거듭 물으셨습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 하시는 주님 자신의 사랑고백 아닙니까? 그 사랑에 네가 이제는 응답할 수 있겠느냐? 물으신 것이지요.

♣ 그러면, 결론으로 돌아갑시다. 여러분, 여러분도 예수 믿으시지요? 예수님 사랑하시지요? 예수 안 믿고는 못 사시겠지요? 나는, 여차하면 언제든지 예수 얼마든지 버릴 수도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실 수 있는 분 계시다면, 한 번 손들어 보시겠습니까? …. 그만한 배짱도 없이, 예수 안 믿고 살겠다고 말씀하는 것, 적당히 믿고 살겠다 생각하시는 것 거짓말입니다. 다 예수 믿고 사시겠습니까? 다 예수 믿어야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외 없이 우리 모두, 한 가지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무얼 결단하셔야 할까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차례씩이나 만나도록, 제자들은 왜 그렇게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였을까요? 문 닫아 걸고, 두려워 떨어야만 했을까요? 엠마오로 내려가야만 했을까요? 고기 잡으러 또 디베랴 바다로 나가야 했을까요? 왜, 흔들리지 않는 자기 삶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을까요? 理由가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성령 받지 않고서는,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예수 믿고 사는 것,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으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지식으로도 안 됩니다. 연륜으로도 안 됩니다. 건강하다고 해서 예수 잘 믿는 것도 아닙니다. 의지가 강하다고 예수 잘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야만 가능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證人이 되리라.” 아멘.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우리의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삶의 방향이, 확고부동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눅 11, 13). 성령 충만 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간구하십시오.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도들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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