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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름 값 합시다! (사 6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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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값 합시다! (사 60:1~3) 
 

1. 이름값?

여러분, “봉식”씨를 아십니까? 대출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가 그 기록이 남게 되고, 또 그 기록이 공개되어 국제적으로 망신을 산 바로 그 광고에 나오는 “봉식”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에게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로 불려진 “봉식”이라는 이름이 그 상황에서는 어울려 보이지 않던가요? 또 다음과 같은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무단횡단이나 혹은 노상방뇨를 하다가 걸린 사람이 “춘삼”씨라면 웃고 넘어갈 만한데, 그 사람의 이름이 “이세종”씨나 “이순신”씨나 “이명박”이라고 해 보십시오. 정말 어울리지 않지요? 물론 웃자고 드리는 말씀이지만, 어떤 이름을 가진 존재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8월 26일자 <한겨레신문>에 “기아 서재응 모처럼 ‘이름값’”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 프로 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뛰다가 고액 연봉을 받고 국내 프로팀인 기아로 입단한 서재응 선수가 그동안 별로 성적이 좋지 못했으나, 그 날 한화를 만나 6이닝 동안 1실점을 하면서 승리 투수가 된 것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프로야구 최고의 무대에서 뛴 선수, 국가대표, 그리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로서의 그 이름값을 모처럼 제대로 했다는 평가였습니다.

오늘 설교를 이런 이름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우리 교회의 이름, 나아가 성도 여러분의 이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편

이사야서는 전체적으로 미래에 될 일에 대한 예언서입니다. 그 예언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제 1부인 1장부터 39장은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제 2부인 40장부터 66장까지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과 나아가 진정한 해방인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고통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와 기업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기업”, “제사장 나라”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역사상 그 이름대로 제대로 산 時期는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전반기뿐이었습니다. 그때 반짝 이스라엘이 그 이름값을 제대로 했을 뿐, 그때 이후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衰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쇠락의 정도가 最惡에 달한 것이 바로 선지자 이사야 시대였지요.

그렇다면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어떠했을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잃어버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타락해 있었습니다. 여러분, 범죄와 타락의 정도가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된다는 것은 가장 최악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소돔 고모라보다 더 나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있었지만, 그 예배 속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회개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율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이기적이어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그들의 財産과 人命을 강탈했으며, 따라서 정의와 공평은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의 말씀이 주어진 당시 유다의 상황은 最惡이었습니다. 유다 국내 사정과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국가적으로는 위기였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백성들은 塗炭에 빠져있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이러한 당시 형편은 한 마디로 ‘절망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기보다는 도리어 더 악화되었고,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그 모든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단연코 눈에 띄는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어두움과 절망 가운데 누워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길이 있다’는 것이죠. ‘그 짙은 어둠과 절망을 바꿀 방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말씀 아니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여러분과 이 나라와 민족에게 ‘살 길이 있다’, ‘活路가 있다’는 말씀이야말로 얼마나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오늘 본문은 아직도 힘들기만 한 우리 모두를 향하여 소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3. “일어나라!”

유다를 향한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예언은 한결같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에 맞아서 바벨론에게 치욕스럽게 멸망할 것이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 종살이를 하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에 의해 불타게 될 것이고, 성전의 거룩한 그릇과 도구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예언의 골자는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전무후무한 아픔과 고난과 멸망을 맛볼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이사야서 거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말씀은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이 “일어나라”는 말은 사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히브리어입니다. “쿰(!Wq)!”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하신 “달리다쿰”에서 “달리다”는 “소녀야”라는 말이고, “쿰”은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쿰”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아주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❶ 첫 번째 의미는 민수기 23장 18절에 사용된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일어나라’고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즉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일어나는 것,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 영적인 준비를 하고 들으려는 자세를 일컫는 말입니다. 

❷ 둘째로 이 말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7장에서 이 말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❸ 셋째로 이 말은 신앙의 지도자(창37:7), 선지자(신34:10), 사사(삿10:1) 등의 ‘직분을 맡는다’는 뜻입니다. ‘네가 선지자로 일어서라’는 말은 ‘선지자의 직분을 맡으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❹ 넷째로 “일어나라”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계약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9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할 때 ‘세운다’는 말이 바로 이 ‘일어나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이 언약관계, 약속의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❺ 다섯 번째로 이 말은 전쟁 준비 혹 전쟁에 나간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사사기 7장 15절에 보면, 기드온이 자기 군사들에게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라고 하자, 이스라엘 군대가 미디안을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어나라’는 말은 ‘전쟁을 시작하라’, 즉 ‘돌격 앞으로!’라는 신호와도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이 “일어나라”는 말은 아주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일어나라.’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맡으라.’ ‘하나님과 약속하라.’ 그리고 주님의 일을 가슴에 품고 ‘앞으로 돌격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일어나라”는 말이 일목요연하게 논리적인 순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아주 놀랐습니다. ‘더 이상 한심하게 주저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비참한 생활을 일삼지 말고, 새롭게 결단하여 일어서라.’ ‘주님이 네 이름에 새겨 준 그 사명을 다시 받으라.’ 그리고 ‘그 사명을 향하여 전진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의 일터로 가서 열심히 일할 때 행복을 맛봅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사명 감당하는 시간에 누워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누워있으며, 병든 사람이 누워있고, 피곤한 사람이 눕기를 좋아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이 눕습니다. 그리고 게을러터진 사람들이 눕기를 좋아하겠지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누워있는 분은 없습니까? 털썩 주저앉아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대하여, 가정에 대하여, 직장에 대하여, 여러분의 미래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인하여, 아니면 안일과 나태와 자만으로 인하여 누워있는 분은 없는지요? 2009년의 하반기가 시작되었지만 ‘뭐 그렇게 유별나게 할 만한 것도 없고, 유난을 떤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 그래서 그저 그렇고 그렇게 하반기를 맞이하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성경은 이런 분들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안일, 일상의 무의미한 반복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향하여, 성도라는 여러분의 이름에 새겨놓은 그 일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봉사를 위하여 일어서십시오!

4. “빛을 발하라!”

그러면 일어나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빛을 발하라”고 합니다. 이 “빛을 발하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두 단어이지만 성경원어는 한 단어입니다. “오리”라는 말인데, 이것은 “오르(r/a)에서 온 것으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❶ 먼저 이 말은 ‘일출’과 관련하여 ‘새벽’, ‘동틈’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의 우선적인 의미는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빛을 비추신다는 뜻입니다. 1절,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 해 중의 해, 빛 중의 빛, 아니 해보다 더 밝은 빛이신 여호와께서(시84:12) 고통 받는 그의 백성에게 임하셨습니다. 그가 임하신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밝고 밝은 빛이 임한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찬란한 빛이 여러분 개인, 가정과 자녀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들이 임했습니다. 더 이상 어둠이나 그늘이나 방황이나 그 어떤 악한 것들이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환하게 밝히셔서 어떤 어두움이나 얽매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더 이상 어둡게 힘들게 고통스럽게 불안하게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여러분을 환하게 비추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❷ 두 번째로 “빛을 발하라”는 말의 의미는 빛을 받은 성도 역시 빛이라는 뜻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임하심으로서 성도 역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주님이 아니면 빛이라곤 전혀 없는 우주 공간의 이름 모를 별과도 같을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받아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어두움이었던 우리가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다 사람들은 이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열방을 비추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빛을 발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드러누워서 엄청난 치욕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빛을 잃음으로서 온 세계가 신음하고, 그러면서 자신들도 함께 신음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어두움 속에 있었고, 온 세상을 어둠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자신들이 고난 속에 있었고, 온 세상 사람들을 고난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자신들이 시련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온 세상을 그 눈물에 젖게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짓밟히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열방들을 서로 싸우고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의 죄와 악이 세상을 힘들게 했다면 나의 빛 역시 세상을 밝히고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이 빛을 비추기 위하여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일어나서 빛을 발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2절,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복음을 받지 못한 세계 여러 나라와 민족이 많기 때문이고, 우리 나라만해도 75% 가량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지 못한 상태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각 분야 마다 하나님 없는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상태이며, 무엇보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심령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전. 412~323년 경,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대낮에도 촛불을 켜 들고 다녔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세상이 어둡고 혼란해서”라고 답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의 어두움은 여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복음을 모르는 것이 어두움이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현실이 어두움입니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어두움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더욱 어둡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찬송가 510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는 무디의 부흥회에서 찬송을 인도하던 ‘필립 블리스’라는 분이 작사 작곡한 것입니다. 블리스가 이 곡을 지은 것은 무디의 설교 중 들은 사건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어느 호수를 항해하던 여객선이 선착장에 설치되어 있는 경계 신호등이 파손되어 선착장에 들어오지 못한 채 파도에 의해 끝내 파선되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착장에 불이 없어서 무턱대고 배를 들이댔다가는 부딪칠 것이 뻔 하기에 좀 기다린다는 것이 그만 큰 파도를 만나 파선되어 버린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의 빛을 받아 빛이 된 성도에게 주님은 그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5:14-16). 그런데 그 빛을 제대로 비추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크고 작은 암초들이 많은 뱃길을 지켜주던 등대가 있었습니다. 태풍이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날 밤, 등대지기는 실수로 등대 불을 켜지 않은 채 그 밤을 보내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강풍과 큰 파도가 치는 날 항해하는 배가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잠을 깬 등대지기는 등대 위에 올라가 등대 주위에 있는 무수한 배 조각과 시체를 보았고, 자신의 실수와 태만으로 인해 선원들이 죽어간 것을 알고는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을 발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生命에 관한 심각한 명령입니다. 이미 우리는 빛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여러분은 하나님의 빛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 어둠 속에서 빛인 여러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그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고, 그들의 생명이 ‘삶이냐 죽음이냐’로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의 빛,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빛을 비추어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이 땅을 살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성도가 빛을 발하면 …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은 성도가 일어나서 빛을 발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일어나서 빛을 발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❶ 2절 하반절, “일어나서 빛을 발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성도가 빛을 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되셔서 늘 임재하시고 동행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빛을 발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항상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❷ 두 번째로 성도가 일어나서 빛을 발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납니다.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즉 빛을 발하는 삶을 살면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다’,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 것이 된다’, ‘그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빛을 비추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아주 특별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❸ 세 번째로 성도가 일어나서 빛을 발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3, 4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세계 도처에 뿔뿔이 흩어져 비참하게 살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고, 이방인들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나아오는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열방 곧 모든 민족과 나라가 성도의 빛으로 나아올 것이며 세계의 왕들도 나아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빛을 비추기만 한다면, 주님의 살아계심과 그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이웃을 진심으로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여러분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행복해지고, 즐겁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과 우리 교회를 찾게 될 것입니다. 

❹ 네 번째로 성도가 일어나서 빛을 발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5절부터 9절을 보면, 바다의 풍부함이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이스라엘로 오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 구속받은 이방인들도 특산품 예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수많은 무리의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젊고 건강한 낙타, 스바의 금과 유향, 게달의 양들과 느바욧의 수양들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를 찬송하고 예배할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마치 비둘기가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들은 온 세상 땅 끝에서부터 몰려와 그리스도의 빛을 받고 변화된 영혼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일어나서 빛을 발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사실 5절부터 9절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그 일의 파장과 영향력이 훨씬 크고 놀라운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빛의 사명을 제대로만 감당한다면, 제대로 그 빛을 비춘다면, 그 결과는 정말 엄청날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일들을 올 하반기 한 번 벌려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6. 이름 값 합시다!

과학의 발달로 세상은 날로 환해지고 있습니다. 밤이 되어도 얼마나 밝은지 밤에도 눈가리개, 안대를 해야만 잠을 잘 수 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양심의 빛, 도덕의 빛, 윤리의 빛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信 不信 할 것 없이 모두들 입을 모아 ‘이 시대가 어두워져가고 있으며,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 해가 시작되고 또 하반기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뭔가의 시작’이기보다는 반대로 ‘어둠과 종말로 향한 한 걸음’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시대가 점점 어두워진다는 것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빛이 약해져가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이 시대가 점점 어두워 가는 것은 빛인 성도들이 그 빛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어두워가고, 사람들이 고통 하는 이유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일어나”서 “빛을 발”해야 합니다. 빛의 자녀가 아니면 이 시대를 밝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주님께서 주신 빛을 발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과 같고 세상을 파멸로 몰아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 시대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빛인 교회와 성도 여러분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 이 어둠과 위기의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교회와 성도를 통한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새해가 되어 결심한 것을 하반기가 시작되는 오늘 다시 되새겨도, 年年歲歲 千年 萬年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사람들과 이 사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빛만이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2009년 하반기를 시작하는 첫 주를 맞아, 다시 한 번 여러분이 누구인지, 여러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빛”입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어두운 세상, 방황하고 헤매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빛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비추는 삶을 잘 살아 주님께 충성스러운 종이라 칭찬받는 여러분들의 하반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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