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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전의 사람 (사 19: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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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 (사 19:19~25)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부름받은 이사야는 4명의 왕위가 바뀌는 시대를 살며 예언한다. 그 날수는 약 60년이었다. 한 평생 사는 동안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길을 외친 이사야는 사명의 사람이면서 비전의 사람이었다. 이사야의 비전은 몇 가지가 된다. 
 
1.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시온 산에 대한 탁월함의 비전

사2:2에 기록된 이 비전은 만방이 시온 산으로 몰려오는 비전으로 하나님의 전에서 열국이 가르침을 받게 되는 시온의 탁월함을 전해준다.

2. 그루터기만 남아도 싹이 날 수 있다는 남은 자에 대한 소망의 비전

사6:13에 기록된 이 비전은 성읍이 황폐되고 주민이 없으며 토지가 황폐하게 되는 때에라도 거룩한 씨가 남아있어 이 땅의 거룩한 씨,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된다는 비전이다.  

3. 원수의 나라에도 하나님의 신앙이 세워진다는 비전

사19:16~25은 애굽에 대한 예언이다. 애굽은 수치를 당하고 애굽은 잔인한 주인의 손에 붙혀진다. 그런데 그런 심판의 날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그것은 애굽이라는 나라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집과 사람들이 생겨나고 애굽이 복을 받는다는 비전이다.   

이 세 가지 비전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뛴다. 환경과 여건을 뛰어넘는 천상의 메시지라는 점에 경외감이 생긴다. 이사야라는 선지자에게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찬미하게 된다. 사람의 생각일 수 없는 비전,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리시는 이 비전을 묵상하노라면 비전의 사람에서 더 나아가 비전 메이커로 살아가야 한다는 소명을 듣는다. 

1997년에 우리 교회에서 제시한 비전은 6가지이다. 그 중에 세 번째 비전은 삶의 비전과 희망을 주는 교회다. 왜 비전과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는가? 그것은 교회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성장해 가는데 성령은 비전을 주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행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을 부어주시면 분명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비전의 사람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리라.” 비전을 가지는 교회가 되면 달라진다. 꿈틀거리고 살아서 역사하는 활력이 들어온다. 비전이 들어오면 변화가 나타난다. 

나는 우리 교회 6대 비전을 만들고 선포식을 갖기 전 전도사 시절부터 적어놓은 비망록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런 기도 제목이 적혀 있었다.

“100개 교회를 세운다. 100개 교회를 지원한다.”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어이없는 비전이다. 전도사 시절, 1년에 교인 1~2명 전도하기도 어려운 시골 교회에서 받아 적은 비전이다. 나는 교회 하나 끌고 가는 것도 힘에 겨워 시골에서 시내로 나올 때마다 십자가만 붙어 있는 교회를 봐도 존경심이 생겼는데 십자가 달린 교회를 100개 짓는다는 것은 그 당시 형편으로 말도 안되는 선포였다. 아니, 선포해봐야 듣는 사람도 없는데 단지 노트에 작성한 메모들이었다.

그것이 가능할까? 지금에 와서 나는 그 가능성을 보게 된다. 선교지에 교회를 짓기 위해서는 보통 2~3천만원이면 짓는다. 농촌, 산촌, 오지에 40평 정도의 예배당을 짓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이미 케냐에, 과테말라에, 말레이시아에 교회가 지어졌고 지어지고 있다. 물론 베트남에 지어질 벤숙교회와 냉동학원, 한국냉동 공장은 약 2억 이상이 드는 프로젝트이지만 이 비전도 성취되어질 것이라는 가능성이 보인다. 그런데 무엇보다 비전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여건과 환경이 이루어져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늘 본문의 이사야의 말씀 때문이다. 원수의 나라에도 하나님의 신앙이 확립된다는 이사야 19장의 비전을 조금 더 살펴보자.
  
첫째, 애굽이 예배하는 자로 변화된다는 비전이다. (사19:21)

사19:21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그 날이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애굽이 예배하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경배하며 서원을 이행하게 된다. 이는 소경이 눈뜨고 술주정뱅이가 목사가 되고 곱추의 등이 펴지는 것보다 어려운 메시지다. 애굽은 본래 강대국이다. 강의 신, 태양의 신, 바다의 신, 도마뱀의 신 등 각양 각색의 신을 섬기는 나라다. 영혼의 불멸을 믿는 애굽의 장묘 문화는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미이라를 유산으로 남겼고 방부 기술이 특별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나라다. 그 애굽이 어떻게 히브리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자로 변화되는가? 사31: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애굽은 육체일 뿐이다. 그런데 그 육체요 사람인 애굽이 여호와를 아는 민족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불가능한 메시지다. 그럴 리가 없다는 메시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자기를 알게 하실 때 애굽은 변화된다는 것이다.   

둘째, 심판 이후에 고침받는다는 비전이다. (사19:22)

사19: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원수의 나라, 위기만 일어나면 도움을 청하러 간 나라, 그 애굽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깨어진다. 그러나 그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애굽이 나아온다. 하나님은 이방의 나라, 애굽의 간구를 듣는다. 이사야가 전하는 이 비전은 사람의 말일 수 없다. 하나님께 받은 하늘의 메시지가 분명하기에 애굽이 기도하는 나라가 된다고 외친다. 이 비전을 읽으면 나의 받은 비전도 그 가능성이 보인다. 열방의 나라, 불교의 나라, 무슬림의 나라라도 고침받는 나라가 될 수 있음이 보여진다. 두려워할 것 없다. 의심할 것도 없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  

셋째, 열방들 간에 서로 서로 길이 열리는 소통의 비전이다. (사19:23)

사19: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함께 경배하는 믿음을 지닌 나라는 길이 열린다. 말과 신념의 차이가 있어도 열방 사이에 통하는 대로가 있게 되고 서로 왕래하는 사이가 된다. 서로가 견제하고 으르렁 거리며 공격하고 방어하는 적대의 관계가 함께 하는 관계로 되는 비전이 제시된다. 우리는 남북이 한 동족이면서 오고가는 길이 열릴 듯 말 듯 한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함께 예배하는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길이 열려 있는 소통의 비전은 꿈 같은 얘기다. 하지만 이사야의 비전 앞에 우리는 설레는 마음, 새로운 도전과 일어섬의 마음을 소유하게 된다. 이 민족도 반드시 소통되고 연합된다.

넷째, 온 열방 중에 복이 되는 복 덩어리 애굽의 비전이다. (사19:24~25)

사19:24~25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이사야의 예언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온 세계 중심의 복이 되는 나라가 앗수르, 애굽, 이스라엘이다. 열국의 나라가 선택받은 이스라엘과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래서 이 세 나라에 속한 애굽은 복덩어리가 된다. 온 세계에 하나님의 주신 복을 나누어주는 나라가 된다. 미워해야 할 나라가 복덩어리 나라가 된다. 포기하고 외면하는 나라가 복의 중심이 된다. 이 비전을 볼 때 우리는 꿈을 다시 꿀 수 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에 주신 꿈이라고 버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마음의 계획일진대 다시 붙잡고 나아갈 수 있다. 

오늘날 애굽에는 아프리카 최대의 교회인 모카감교회가 있다. 말레이시아 무슬림 나라에도 쿠알라룸푸르 갈보리교회, 불교의 나라 태국에도 크리엥삭 목사가 시무하는 소망교회가 있다. 싱가포르에도 CHC교회가 청년들의 가슴에 예배의 불을 붙이고 있다. 

부흥이 지난 50년 동안에 일어났다. 이렇게 성경의 비전이 성취되 듯 예배할 수 없는 지역, 예배하기 어렵고 하나되기 어려운 지역에서도 복의 근원이 되는 예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이사야의 비전을 볼 때 우리는 회복과 부흥을 꿈꿀 수 있다. 우리 교회도 꿈꿀 수 있다. 성령의 일하심이 시작되었다. 주님을 전혀 모르는 남편, 술 밖에 모르는 친척들 모두 구원 받을 수 있다. 절망의 환경, 교회의 채무가 커도, 나의 여건이 형편 없어도 꿈을 품을 수 있다.

오늘은 특별히 건축 헌금 드리는 날이다. ‘드리느냐 드리지 못하느냐’ 이전에 나는 부르짖고 싶다. 비전의 가치를 외치고 싶다. 수원시 끝자락에 있어 작고 작았던 교회, 세계의 중심에 서리라는 비전이 여러분의 가슴에 떨어져 가정 구원은 물론이고 열방을 선교하는 자가 되라. 오늘은 수원, 내일은 한국, 모레는 세계로 뻗어나갈 2015년까지 이제 6년 남았다. 교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 이 6년이란 기간 동안에 우리는 도전을 외치고 싶다. 

① 해외 교회 세우기를 도전한다.
② 교회의 비전 센터 세우기를 도전한다.
③ 교회의 채무를 절반 이하로 줄이기를 도전한다.
④ 인재 양성- 제자 양육, 중보기도 사역자, 교사 3,000명 세우기를 도전한다.
⑤ CM을 중심으로 한 건강한 교회로 회복과 부흥의 모델이 되기를 도전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앞에 복음이 희망이라는 기를 들고 싶다. 우리 모두 꿈꾸는 자들이 되자. 꿈이 없으면 방황하고 흔들리고 헌신의 열정이 사라진다.   

지금까지 너무도 불가능한 꿈이라서 내려놓았는가? 다시 도전하라. 청소년 시절에 청소년 센터를 짓는다는 꿈, 대학 시절에 연극인 되겠다는 꿈, 기업인이 되어 교회를 섬기는 물질 후원자가 되겠다는 꿈, 방송인의 꿈 등 꿈꾸는 자가 되자. 꿈이 없었던 자들은 꿈을 달라고 부르짖자. 삶이 너무도 힘들어서, 세상 살이에 꿈을 팔았던 자들도 이제 꿈을 다시 사들이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에서만 망령된 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먹고 사는 삶의 현실 앞에 내버린 꿈을 잃은 삶이 망령된 것이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셔서 다시 비상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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