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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해 가야 할 기도 (골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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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 가야 할 기도 (골 1:9~12) 
 
 
본문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옥중에서 쓴 편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수감 중입니다. 수감 생활 자체가 힘겹고 어렵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잘 모르는 교회에 보낸 편지라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로새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기에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런 특징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 사도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염려입니다. 비록 자신이 옥중에서 수감 생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그칠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 교회가 자기와 직접 관계가 없을 지라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기에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염려는 무엇이었을까요? 교회의 양적 부흥에 대한 관심과 염려였을까요?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염려였을까요? 교회가 안고 있는 갈등과 분쟁에 대한 관심과 염려였을까요?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염려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가 올바른 신앙 위에 굳건하게 서는 것에 대한 관심과 염려입니다. 교인들 개개인의 신앙 성장에 대한 관심과 염려입니다.

지난 여름 탐방 차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이 교회를 탐방하면서 최근 이 교회가 몸부림치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4년 동안 철저하게 조사 연구를 실시한 후에 2007년 [드러냄](Reveal: Where Are You?)이라는 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윌로우크릭 교회는 이 보고서에서 지금까지 큰 오류를 범해왔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서 철저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짐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 왔다는 것일까요? 이 보고서에서 오류의 핵심이 “How many”를 묻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인은 얼마나 많은가? 예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석했는가? 교회 내의 사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헌신적으로 참여하는가? 즉 목회자와 사역자들의 관심과 염려가 온통 이 “How many”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성패가 ‘수’에 좌우된다고 생각해 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책에서 결론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교회의 성패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향해서 그리고 보다 깊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보다 진정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향해서 이끌어 주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성패가 ‘질’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땅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How many”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How many”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How many” 때문에 염려합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를 잘못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가 가졌던 바로 그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올바른 믿음 가운데 굳게 서있는가?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로 신앙이 자라고 있는가? 이 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또 이 점 때문에 염려할 수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바울의 교회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를 위해 중보 기도한 내용입니다. 

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 날부터 중보기도를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기도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 계속해서 같은 제목으로 기도했습니다. 왜 계속해서 같은 제목으로 기도했을까요? 그 기도가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골로새 교회를 위한 가장 본질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 내용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교인들의 신앙성장에 관한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다른 기도보다 이 기도가 가장 필요한 기도이고 또한 본질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이 계속해 온 기도 내용은 무엇일까요? 교회를 위해 가장 필요한 기도요 또한 본질적 기도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 가야할 기도는 무엇일까요?

알게 하소서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 안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식의 변화”입니다.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전에 잘못 알았던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즉 새로운 “앎”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깊어지면서 그 앎은 폭이 넓어집니다. 즉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 앎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즉 더 깊이 있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의 변화는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앎의 문제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믿음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눅 23:34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말씀입니다.

우선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선동했습니다. 저들은 성경 말씀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셨고, 지금 성경에 예언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야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저들은 얼마 전만 해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의 말에 현혹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에게 십자가에 달릴 만한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예수님은 여느 죄인들과 분명히 다른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임을 몰랐기에 지금 메시야를 죽이는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의 공통점은 한 마디로 무지입니다. 영적인 무지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몰라서 하는 일이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지하면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미국에 이민 간지 40여년이 넘은 분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 이민을 와 보니 동네에 한국 사람은 자기가 처음이고 미국 생활에 익숙지 않고 영어도 잘 못하고 그래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답니다. 한 번은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사려고 돌아보니까 특별히 싼 물건이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 물건의 공통점은 개 그림이 그려있더랍니다. 자기 생각에 이 개 그림은 상표일거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이 개표는 특히 서민들을 위해서 싼 물건을 파는 회사 상표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처음에 워낙 가진 돈도 없고 해서 여러 해 이 개표를 애용했답니다. 몇 해가 지나고 보니 이 개표는 개 사료더랍니다. 그러니까 이민 와서 개같이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개 사료를 그런 마트에서 팔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생겼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지하면 사람인데도 개처럼 살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좋지 않는 풍조가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입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으려 하는 경향이 팽배해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무지가 한국교회에 먹구름처럼 드리우고 있습니다.

호 4: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무지 가운데 빠져있기 때문에 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고 점점 영적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호 6:3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기도해 가야합니다. “주여 알게 하소서”

행하게 하소서

본문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행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즉 실천하여 구체적인 열매를 맺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또 하나 변화가 생깁니다. 과거에 하지 않던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성경을 읽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이웃들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와 무관한 이웃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행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행함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점점 믿음의 실천을 더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많이 하나님을 위해 행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많이 이웃을 위해 행동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약 2:2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 사도는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만 그 믿음은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야고보 사도가 이 말씀을 했을까요? 신앙생활을 할수록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더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그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지독한 구두쇠여서 사람들 사이에 평판이 아주 안 좋았습니다. 하루는 이 부자가 마을의 성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전 재산을 불쌍한 이웃에게 나눠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왜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구두쇠라고 합니까?"

성인은 부자에게 뜬금없이 돼지와 암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돼지가 암소를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너는 고작 우유만 주는데도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고 나는 내 목숨을 바쳐 고기를 주고 심지어 다리까지 아주 좋은 요리가 되어 주는데 사람들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암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했습니다. "글쎄, 아마 나는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 해 주고, 너는 죽은 뒤에

해주기 때문일 거야."

그렇습니다. 믿음의 행함은 큰 마음 먹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창하게 계획을 세워 나중에 한 목에 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작은 것 하나씩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어렵습니다. 평소에 작은 일 하나씩 해 가는 것은 체질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습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여 행하게 하소서”

성숙하게 하소서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잘 참고 견디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신앙인격이 더욱 성숙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또 하나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참지 못하던 것들을 참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과거보다 더 온유해 집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신앙인격에 대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더욱 신앙인격이 성숙해 져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행 7:54 이하를 보면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54)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고 했습니다.(57) 그리고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다고 했습니다.(58) 스데반이 성 밖에서 내침을 당했고,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던져 돌로 맞아 순교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두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끝까지 믿음의 품위를 잘 지켰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59-6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호소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욕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마지막 발악하듯 몸부림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고통을 말없이 참았습니다. 그 두려운 순간을 잘 견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용서하며 죽음의 순간을 맞았습니다.

저는 보이차를 즐겨 마십니다. 중국선교하면서 보이차를 알게 됐고 꾸준히 마시면서 지금은 매니아 수준입니다. 보이차는 다른 모든 차들과 구별됩니다. 다른 모든 차들은 갓 나온 차가 제일 비싸고 맛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보이차는 그 반대입니다. 오래 될수록 비싸고 맛도 좋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차만이 후발효차이기 때문입니다. 차가 만들어진 직후부터 발효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오래 발효될 수록 제 향을 내고 제 맛이 납니다. 갓 나온 보이차는 향이 지푸라기 썩는 냄새와 같습니다. 맛도 강합니다. 그러나 오래 묵고 발효가 되면 잡냄새가 다 가시고 보이차 본연의 깊은 향이 나기 시작합니다. 맛도 부드럽고 뒤 끝이 단 맛이 납니다.

우리 신앙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신앙생활하면서 닦이고 연단되면서 품격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은연중에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성숙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성장해야 합니다. 특히 알아가야 합니다. 영적 무지를 벗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행해 가야 합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해 져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숙해 가야합니다. 신앙인격이 더욱 성숙해져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힘으로만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 가야 합니다. 그것도 계속 기도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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