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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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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빌 2:1~11)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의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이요,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것이 먼저이고, 본받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를 본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제자 빌립이 “주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만족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9-11)고 하셨습니다.

빌립은 육안으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고 하신 대로,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같고, 예수님을 본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계셨음을 말해 줍니다.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되는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분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던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본받으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며, 우리의 말과 행동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그 생각이 정직하고 아울러 말과 행동이 정직합니다. 반면에, 마음이 거짓된 사람은 그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다 거짓됩니다. 마음이 선량한 사람은 그 생각이 선량하고 자연히 말과 행동도 선량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악한 사람은 그 생각하는 것이 다 악하고, 아울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 악하고, 그 행동이 다 악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가 선하신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선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똑같이 선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한이 없으신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도 한이 없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분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의 종살이 하는 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풍속을 좇아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기의 소속을 망각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그 행위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올 때는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지만, 교회 밖을 나서면 그리스도인의 옷을 벗고 세상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본받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과 같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첫 번째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位)에 계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으나 제자 도마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자, 도마가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과 도마가 함께 집에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니, 도마가 대답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人性)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으시나, 단 하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그 분의 무한하신 겸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일국의 왕이 왕위를 버리고 서민이 된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입니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낮추신 분은 달리 없습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릇을 비우듯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와서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배우라는 것일까요? 그렇지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 때문에 다툼이 생길 수 없습니다. 다툼은 자기의 잘남을 내세우기 때문에 생겨나는데,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면 다툼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기만 하면 불화가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깔보고 무시하거나, 또는 아내가 남편을 깔보고 머리로서 대우하지 않기 때문에 가정불화가 생겨납니다. 구역에서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면 다툼이 사라지고 화목한 분위기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늘 분쟁하는 것도 정치가들이 겸손의 미덕을 갖추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만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주장하니까, 양보와 타협의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젊은이가 어거스틴을 찾아와서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자 하니 한 말씀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때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두 번째로 주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자, “겸손이라” 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 주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때에도 어거스틴은 “겸손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고 말씀합니다. 

천사장 루시퍼가 타락하여 마귀가 된 것은 감히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말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지음 받은 존재가 감히 창조주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한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처럼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분수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고 맙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고서는 화목한 인간관계를 절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도 겸손해야 하고, 화목한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겸손한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히 행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요한일서 4장을 보니,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시려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증언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이 세상에는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예가 더러 있습니다. 불타는 집안에 있는 아이를 구하려고 불속으로 뛰어든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성애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칭송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자기 희생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흉악한 죄를 저질러서 사형 선고를 받는 사람을 대신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한없이 고귀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해야 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에 이르기를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생명을 버리게 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무한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시간 후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당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절박한 때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화목한 교회, 은혜로운 교회가 되려면 성도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화목한 가정이 되려면 가족 구성원이 예수님을 닮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였고,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의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실수도 너그럽게 용납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려면, 고린도전서 13장에 언급된 사랑의 특성을 나의 언행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교만하지 아니합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아가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한편, 마귀는 사랑을 파괴하고 미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가리켜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하셨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3장 15절에 보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 대신에 미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살인과 폭력 사건들의 원인도 사람들의 마음속의 미움이 그 원인입니다. 미움을 없애려면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우리 마음에 사랑의 빛이 임하면 미움의 어둠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이해타산에 좌우되는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조건 없이 주신 아가페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이 가는 곳마다 미움에 의한 분열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이란 부드럽고 친절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을 보면 온유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요즘 사람들이 너무 마음에 여유가 없고 조급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도무지 양보를 할 줄 모르고 사납습니다. 사람들이 무정하고, 사납고, 조급한 것은 말세의 특징입니다(딤후 3:1-5). 이제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려면 물건을 사러 백화점을 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술로서의 친절, 부드러움은 진정한 온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온유한 마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사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아름다운 인격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존경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시는데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한 하셔도 얼마든지 문둥병자를 고칠 수 있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손수 병자의 몸에 손을 대어 고쳐주신 것은 주님이 얼마나 온유하신 분이신가를 보여줍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나음 받은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복귀하는데 필요한 절차를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일러주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온유해야 합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부드럽고 친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대할 때 서로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웃는 낯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가족에게도 온유하게 대해야 합니다. 가족이니까 아무렇게 대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와 장소와 대상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변함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걱정이 하나 생겼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얼굴 표정이 너그럽고 온유하게 바뀌어 나가야 하는데, 거꾸로 신경질적이고 사납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현대인들은 외모의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아서 피부 미용에 많은 공을 들입니다. 고급 화장품을 쓰고, 얼굴 팩도 자주하고, 성형수술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은 미용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을 가질 때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3)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사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무지한 백성들을 깔보고 멸시하였습니다. 특히, 세리들이나 하층민들을 죄인이라고 해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대화하시며 저들의 초대에 응하셔서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속에 긍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무지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죄 많은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까이 하시고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35)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 인생들을 대하십니다. 양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짐승인데, 목자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언제 이리나 늑대를 만나 잡혀 먹힐지, 양 도둑을 만나 끌려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같은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가리려고만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상대방의 허물과 실수가 하나 됨을 방해하는 이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화목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로서 그 분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 사랑의 마음, 온유한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품고, 주님을 본받아 살아감으로써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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