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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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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0~69)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수를 가르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처음에 어떻게 가르칩니까? 대체로 손가락으로 수를 가르칩니다. 하나, 둘, 셋...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최대 수가 열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는 열 이상의 수를 가르치려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열 이상의 수를 가르치려면 할 수 없이 발가락까지 사용해야 합니다. 스물이 넘으면 더 이상 셀 수가 없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수의 한계가 바로 거기까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형이 물었습니다.
"다섯에서 둘을 빼면 얼마냐?"
자신있게 셋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이 그럼 둘에서 다섯을 빼면 얼마가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학교에서 마이너스에 대해서 배운 후 비로소 둘에서 다섯을 빼면 마이너스 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마이너스를 이해시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들뿐 아니라 누구나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도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배고픔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떡을 주셨고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 즉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인기는 최고로 치솟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이튿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가서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요 6:25)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열심히 찾았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배부르게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배부르게 먹고 싶어서 예수님을 그렇게 부지런히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먹고 사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에 그를 종신 대통령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27)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펼치실 구원 사역을 미리 보여 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표적은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떡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과 너무 달랐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썩을 양식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참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가?"
제자들은 처음으로 경험한 세계, 즉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그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여기서 그들이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결코 그 말씀이 난해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매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고 내가 곧 생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그 까닭은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 걸림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제자들로서는 따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매우 당혹스런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세력 중에서 이탈자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기대가 어긋나자 가룟 유다도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방식을 싫어했습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주어서 생명을 살리는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방식이 참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방식임을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물질의 복과 육체의 건강을 주세요! 자녀들이 아프지 않고 잘 자라게 하시고 대학 입시에 합격하게 하시고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육체의 건강, 물질, 자녀 양육 문제 등을 얼마든지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이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복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우상 숭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복을 통해서 하늘의 복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에 고무되어 나왔을지라도 거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뜻하는 것에 온전히 맞추어 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씁쓸하게 남은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예수님의 슬픔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매우 낙심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새로운 기대와 희망이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바로 설 수 있지 않느냐? 너희는 내 말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지 않느냐? 나는 너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세워가고 싶다."

그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가장 먼저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실수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기쁨을 가장 많이 안겨 준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귀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서 마음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거룩한 분으로 느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큰 기쁨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갑니까? 주님, 영생의 말씀인 주님이 여기 계시는데 내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신앙입니다.
영생의 말씀인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과 연합하려는 열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성경에서 많이 멀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계십니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나아갈 것을 분명히 지시하고 계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주님의 분명한 그 부르심 앞에서 나 혼자 바보가 되어도, 그 바보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에 걸림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직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세계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결코 거기 멈춰서는 안 됩니다. 가룟 유다처럼 물질의 세계에 머물 것 같으면 멸망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옛날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 속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찾고 그 길로 나아갈 때 영광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끝까지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 주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 영광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아 쓰는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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