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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예수 그리스도 (행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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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 (행 2:1~36) 
 
 
오늘은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사건(1-13)과 이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증언한 첫 메시지의 내용(14-36)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누가 복음이 성령님을 가장 많이 언급합니다(마태 19번, 마가 23번, 누가 36번, 요한 24번).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두 배 정도를 언급하기 때문에(70번), 성령님의 강림과 관련해서 많은 기록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지요. 하지만 성령님의 강림에 대한 묘사는 1-4절이 전부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강림 때 발생한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짧게 묘사합니다. 반면에 그 현상들을 서론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베드로의 메시지와 그 메시지의 결과로 생겨난 신약 교회의 탄생에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읽는 사람도 드러나는 기이한 현상들보다는 메시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때 듣고 보고 말하는 증인의 사역과 관련된 3가지 표징들이 나타났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동반되었던 현상들인데 성령님께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현상들 각각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같이 한 곳에” “온 집에 가득하며”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라는 말씀들을 통해서 약속을 기다리고 있던 모두가 빠짐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소리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모여들도록 하는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6-11).

베드로의 설교에 잘 나타나듯이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님의 강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 이어지는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구속사적인 사건들의 독특한 특징은 성경에 미리 계시되었다가 성취된다는 점과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과 현상들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그분이 거하시는 성전,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결코 떠나시지 않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당신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상태에 따라 들락날락하시는 분처럼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아직도 성령님께서 임하시지 않으신 것처럼 간구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본문의 120명은 후세의 성도들이 본보기로 삼을 수 없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육체적으로 교제하며 알아갈 수 있었던 독특한 역사적 상황에 살았다는 점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죄 사함을 받고 중생한 상태에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성령으로 세례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후로 그들처럼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3,000명도 중생치 못한 불신자의 상태에서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습니다. 120명처럼 이미 성도인 상태에서 성령 세례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 이후 모든 성도는 3,000명처럼 성령 세례를 경험합니다.

본문의 120명은 성령 세례와 함께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는 달리 단회적(once for all)이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늘 넘어지는 사람이나 슬쩍 슬쩍 죄에 타협하는 사람과 유혹을 이기며 자기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는 사람은 성령 충만의 정도가 다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성령 세례를 받도록 명하진 않지만 성령 충만을 받도록 명합니다(엡 5:18).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나타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그분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은 개인의 유익이나 자아 완성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언제나 교회의 증인 사역을 목적으로 합니다.

베드로는 술 취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조롱을 한 마디로 반박한 후에(14-15), 청중들의 관심이 집중된 기이한 현상들이 요엘서 예언의 성취라고 밝히면서 성경으로 관심을 돌립니다(욜 2:28-32; 16-21). 구약에서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예언”과 “환상”과 “꿈”은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요엘은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주심으로 하나님 백성 모두가 선지자처럼 예언할 날이 이른다고 예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예언을 인용하면서 ‘이후에’라고 된 것을 “말세에”로 고치고 18절에 “저희가 예언할 것”이라고 첨가했습니다. 요엘서의 예언이 성령님의 강림과 함께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유대교에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 선지자들이 사라지자 예언의 영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차 메시아의 시대인 말세가 도래하면 에스겔 37장의 예언이 성취되기 위하여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있을 것이며 예언이 성행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복음의 비밀을 훨씬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약속된 메시아와 그분의 나라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특정한 선지자들만 할 수 있었던 예언 사역을 신약의 성도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베드로의 설교는 신약의 교회가 최초로 선포한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첫째로, 철저하게 성경 의존적입니다. 구약 예언에 근거했고 조금도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적재적소에 성경을 인용하며 바르게 해석합니다. 베드로는 내가 만난 메시아를 주관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객관적인 예수님을 증언할 충분한 내용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둘째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도 성령님이 누구시며 성령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 설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속사역이 무엇이며 그분이 누구신지 증언합니다. 셋째로, 철저하게 청중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증거하셨습니다(22). 만일 누구든지 편견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주목했다면 그분이 누구신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의 메시아를 못 마땅히 여겨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23).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그분의 정하신 뜻에 대항했지요. 하지만 죄인들의 악행이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악행까지도 섭리하셨고 죄 없이 죄인들의 죽음을 대속하신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셨습니다(24).

25-28절은 메시아의 부활에 대해 이미 구약이 예언했다는 증빙구절(시 16:8-11)의 인용이고, 29-32절은 그 구절에 대한 해석입니다. 다윗은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고 시편에 기록했는데, 다윗 본인은 죽어서 그의 무덤이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언은 다윗 자신에 관한 예언이 될 수 없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라라고 예언되었던 메시아께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합니다. 베드로의 말씀 인용과 해석은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언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3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세우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셨다고 증언했습니다(33). 그리고 34-35절은 이 증언에 대한 증빙구절(시편 110:1)입니다. 구경꾼들이 경험한 성령님 강림의 표징들은 어느날 갑자기 발생한 신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그분의 섭리에 따라 구속역사가 완성됨으로서 나타난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아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사실입니다(36).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유일한 메시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도 유대인들의 때처럼 죄로부터 구원하는 메시아는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들먹이는 메시아보다 경제적 윤택함과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 줄 수 있는 메시아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하던 자기들이 원치 않는 메시아는 거부합니다. 자기들이 원치 않는 하나님은 반대합니다. 나름대로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과 메시아를 만들어내어 섬깁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주로 세우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입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우리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요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한 그분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인 줄 모르는 사람은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 그분께 합당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의 어느 날에 하나님께서 ‘주’가 되게 하신 분께서 공의로운 심판관으로 다시 오십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이 역사의 어느 한 날에 성취된 것처럼, 재림에 관한 예언과 영원 형벌에 대한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교회는 참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부단히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과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말씀의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깨달고 증인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미 들은 바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하시는데 들은 말씀이 빈약하면 깨달음도 빈약하고 인도받음도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증인인 교회는 예수님에 관한 내용만큼은 빈약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지체들도 예수님에 관해서만큼은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하고 풍성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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