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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가장 귀한 것으로 (삼하 2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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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귀한 것으로 (삼하 23:13~17)


*Move1: 만남의 축복 

우리 인생은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만남을 갖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과 질이 결정됩니다. 좋은 만남은 복된 삶이 되게 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만남은 인생을 불행으로, 파멸로 이끌고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저는 늘 좋은 만남을 위해서 기도하고는 합니다. 새로운 사역의 자리로 나아갈 때 만남의 축복을 간구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만남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하곤 합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 좋은 신앙의 선배, 좋은 배우자, 좋은 동료, 좋은 상사...를 만나는 축복을 주옵소서!” 어떤 만남을 갖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인생의 내용과 질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출세하여 정계에도 진출했습니다. 왕의 최측근이 되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아 그의 사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빨리 성공한 것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받고, 모함을 받아 대역 죄인까지 되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젊은 날의 대부분을 도망자로서 살아야 했습니다. 기가 막히는 것은 군대까지 동원해서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그의 장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들로 산으로 도망 다녀야 하는 삶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장래가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젊은 날에 이루었던 명예도, 부귀도, 자리도... 모든 것이 다 사라졌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싶어 하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딸을 주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곤고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축복만은 남겨놓으셨는데, 그것은 바로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미래가 없어 보이는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지혜자들”도 있었고, 의리가 있는 “신실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용맹한 장수들”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으로 소중한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Move2: 다윗의 강한 용사들 

오랜 도망 생활 때문에 다윗은 수년 동안 고향에 가지 못했습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베들레헴은 언제나 다윗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늘 그의 상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 정신이 아니었던 사울 왕이 나라 다스리는 일은 관심도 없었을 때 주변의 강대국인 블레셋이 침공해 와서 베들레헴과 그 주변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이제 고향 땅은 적군의 진영이 되었고 영영 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손꼽아 보니 고향에 간지가 벌써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소년기에 고향을 떠났기에 무엇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숙소로 쓰고 있던 동굴에서 장수 몇 사람과 회의를 마친 후 굴 밖에 나왔습니다. 그날따라 보름달이 유난히 밝습니다. “자네들도 고향에 한참 못 갔지? 나도 고향에 못간지가 벌써 10여년이 넘어가고 있네. 요즘에는 왜 고향 생각이 많이 나는지 모르겠어. 

어머니는 잘 계시는지... 우리 고향은 이제 갈 수도 없는 땅이 되었으니... 요즘에는 고향집 앞에 우물의 물이라도 한 모금 먹어 보았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런 대화를 나누다가 장수들은 자기들의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도 전, 부르는 소리에 다윗은 눈을 떴습니다. 나가보니 지난밤 늦게 돌아간 세 장수들이 밤이슬에 흠뻑 젖어서 돌아왔습니다. 무엇인가를 건네는데 그들 손에는 물 한 컵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지난밤에 무심코 던졌던 자신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지난밤 이 사람들이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우리 고향집에 가서 물을 떠왔다는 말인가?’ 

얼마나 무모한 사람들입니까? 베들레헴은 블레셋 군대의 총사령부가 있는 곳인데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물 한잔 떠오려고 거기에를 갔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물 한잔을 위해 생명을 걸고 적진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세 장수들을 가리켜 나의 “강한 용사”(mighty men)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다르몬 사람 요셉밧세벳,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서슴지 않으시고 그들을 향해 강한 용사였다고 소개합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섬긴 것입니까? 주님을 예배하는 우리를 향하여서 나의 강한 용사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주님을 섬기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강한 용사”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들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강한 용사였다고 말합니까? 실버 스텔론과 같이 근육질로 가득한 몸매를 가졌기 때문입니까? 

한때 작품성과는 별 상관없이 조폭 시리즈가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지요. 남자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패는 “엽기적인 자매님,” 날카로운 눈매와 막강한 권위로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조폭 사모님,” 그렇게 힘있는 여장부들을 강한 용사라고 말합니까? 전투에 나가면 반드시 이기고야 마는 승부근성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까? 그들에게는 남다른 무엇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장신대 신대원 학생들을 선발하는 입학시험을 치르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신대원 일반전형 250명 정도를 선발하는데, 1,400여명이 응시를 했습니다. 사람과 상관없이 무조건 1,000여명 이상이 떨어져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합격이 결정되는 마지막 관문인 심층면접과 인성검사를 했습니다. 자기 소개서와 신앙고백서 등을 꼼꼼하게 읽고 이것저것을 묻고 확인했습니다. 

참 좋은 직장과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온 분들도 있었습니다. 굉장한 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외모가 헌칠하고 잘생긴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어를 아주 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하다가 가슴이 뜨거워져서 공부를 접고 목사가 되겠다고 응시를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 좋아 보였습니다. 

한사람이 나갈 때마다 같이 면접했던 교수들은 한결같이 “사람이 참 좋네요.”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저 친구 꼭 합격했으면 좋겠는데요...”를 연발했습니다. 그러나 면접을 계속 하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 어두워져가는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슴에 품고 사역하게 하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학벌를 가졌다고, 인물이 잘 생겼다고, 외국에서 Ph.D. 학위를 받아왔다고 해서,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목사가 되는 데에는 뭔가 남다른 것이 있습니다. 

*Move3: 다윗을 감동시켰던 사람들 

한국 남자들이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을 내는 이야기가 있지요. ‘군대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하는 이야기가 ‘축구 이야기’라고 하지요. 그런데 한국 여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바로 ‘축구 이야기''라고 하지요. 그런데 군대 이야기보다, 축구 이야기보다 더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있다지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그러나 요즘은 달라졌습니다. 특별히 지난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지나면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축구 이야기만 나오면 행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대회인 월드컵 대회를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표팀은 오래전부터 출전해 왔지만 월드컵대회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선수도 선발했습니다. 해외에서 유명 감독도 불러왔습니다. 한번만 이겨다오. 16강을 목표로 정하고 “16강! 16강!”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16강이 무엇입니까? 유럽 축구의 강호인 폴란드를 꺾어 월드컵 축구대회 진출 48년 만에 첫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더니, 강력한 우승후보의 하나인 FIFA 랭킹 5위인 포르투갈을 꺾고 강호 이탈리아도 꺾었습니다. 16강이 뭡니까? 8강에 이어 4강에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때 독일과의 4강전에서도 그 골만 막았으면 결승에까지 분명 진출했을 것입니다. 

지금 축구 이야기가 나오니까 여러분들의 얼굴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온 국민이 나서서 응원했습니다. 누가 응원하러 길거리로 나오라고 했습니까? 일당을 준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길거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50만, 100만, 270만, 750만, 나중에는 전국적으로 1,500만의 사람들이 길거리 응원에 나섰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감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처녀 출전한 한국 선수들은 첫 번 게임에서 0-7로 졌고, 다음 게임에서 0-9로 졌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공항 하나 없었고, 비행기 노선 하나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군 군용 비행기 얻어 타고 호놀룰루로, 알라스카로, 영국으로, 스위스로... 그렇게 해서 한 달 전에 출발해서 스위스에는 경기가 있던 바로 전날 밤 10시가 넘어서 도착해서 그 다음 날 바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 소식이 저 부산에, 목포에까지 전해지는 데는 2-3년이 걸렸습니다. 1954년도에 경기에 졌는데 부산에서는 1956년에야, 목포에서는 1957년에야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만큼 살게 되었습니다. 선진국 반열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세계 대회인 월드컵까지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3명의 태극전사들이 펄펄 나르는 것입니다. 계속 밀리다가 경기 1분 남겨놓고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까지 가서 결정골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온 국민을 감격하게 합니다. 

다윗의 세 용사들도 자신의 왕으로 감격하게 합니다. 그들이 들고 나온 것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가슴 맺힌 한과 응어리를 풀어줄 어떤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감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겼기 때문에 환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들고 나온 것은 ‘물 한잔’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받아들고 감격합니다. 성경은 그들을 향해 서슴지 않고 강한 용사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섬김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 그들의 섬김에, 뭔가 다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Move4: 남다른 용기와 충성심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섬기는 왕을 감동시킨 것입니까? 저명한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박사는 그의 책에서 이 장면을 주석 하면서 그렇게 밝힙니다: “그들에게 남다른 용기와 충성심, 사랑함이 있었다. 그들은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They are "the model of courage and loyalty).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충성심”이 있었고 사랑함이 있었습니다. 남다른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명도 내놓을 만큼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은 포기할 수 있었지만 왕이 기뻐하는 것은 결단코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위해 단잠을 자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왕을 위해 단잠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생명과 장래도 포기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델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이렇게 섬기라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충성하고, 이렇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어떻게 섬겼기에 우리의 모델로 제시하는 것입니까? 본문은 이들이 다윗 군대의 30명의 지휘관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용사들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공을 많이 세운 장군들이어서 강한 용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섬긴 것입니까? 

제임스 본드가 전속 출연한 007 시리즈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장면은 있지만 언제나 결론은 007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결코 죽는 법이 없습니다. “007 Never Die”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지만 이 시리즈의 영화에서는 주인공 007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는 웬만한 전투와 적진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들러리들은 총 한방에 쓰러지지만 주인공은 일개 부대가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추격해 와도 총알이 다 피해갑니다. 혹, 총탄에 맞거나 부상을 당해도, 적의 손에 붙잡혀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꼭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서 구해줍니다. 아군 쪽에 없으면 본드를 좋아하는 적군 진영의 미모의 아가씨가 구해줍니다. 부상을 당해 인적이 없는 골짜기에 쓰러졌습니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꼭 나물 캐는 아가씨가 나타나서 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각본이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달립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잠입한 세 용사들에게 해피엔딩의 각본이나 보장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왕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충성하면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려갑니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용기와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자신들의 왕을 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강한 용사일 수 있었던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생명을 예배하는 사람들, 생명을 걸고 주님 섬기는 사람들, 생명을 걸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생명을 걸고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부의 토마스 트로거(Thomas Troeger)박사라는 설교학자가 있습니다. 언제가 그의 설교 신학에 대해 세미나 발제할 일이 있어서 그분의 설교 테이프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설교 가운데 20세기 가장 최고의 교회 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설교의 내용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산군이 한 마을 점령해 들어오면서 사람들을 다 마을의 교회당에 모이게 했습니다.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현장에서 처형하기 위해 신문하던 공산군은 사로잡혀온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엇하던 사람이야? 너희들 다 예수쟁이지?” 물음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자, 공산군 장교는 좋은 수가 생겼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교회당 뒤편으로 걸어갔습니다. 교회당 뒷벽에 걸려있는 예수님의 성화를 떼어 가지고 와서 땅에 팽개쳤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고 군화발로 짓밟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붙잡혀 온 모든 사람들과 그의 어린 아들에게까지 총을 겨누며 예수님의 성화를 짓밟도록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귀한 헌신, 그들의 눈물의 헌신, 그들의 목숨과 자식의 목숨까지도 드리는 피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습니다. 

부인하지 않고 주님을 섬긴다면 최소한 산다는 보장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설령 그렇게 죽더라도 내 자녀들은 축복해 주신다는 보장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섬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걸고 그렇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다는 트로거 박사의 분석은 옳았습니다. 몇 년 전 북미설교학회에 참석했다가 같은 토의그룹에서 활동하면서 쉬는 시간에 그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논리 정연한 ‘머리꾼’이 아닙니다. 교회의 행정을 잘 알고, 교회 정치를 잘 아는 ‘이론가’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는 어떻고, 교회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정확한 논리와 판단력으로 잣대질하는 ‘비평가’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그것을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 생명을 걸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봉사하고, 그렇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교회는 살아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더 이상 생명을 위협하는 총부리도, 핍박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우리 자녀들을 잃어버릴 그런 어려움도 더 이상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잘 섬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겼고, 생명을 걸고 예배했다면 우리는 더 잘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안하기 때문에, 넉넉하게 가졌기 때문에, 배부르기 때문에, 이제는 생명을 걸고 주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것입니까? 

“가진 것이 없으면 하늘을 자주 보게 된다/ 가진 것이 많은 개미는 하늘을 보지 않는다/ 머리를 땅에 박고 땅만 뒤지면 된다” 이생진 시인의 시 가운데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지면서, 평안해 지면서, 살만해 지면서 이제 더 이상 하늘을 보지 않고 머리를 땅에 박고 땅만 뒤진다는 이야기는 이것은 개미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입니다. 총부리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감동이 없고, 열망이 없고, 감격이 없고, 주님을 향한 뜨거움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섬길 때, 주님께 예배할 때, 생명을 걸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Move5: 그들이 가졌던 확신 

그러나 이러한 헌신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세 용사들이 생명을 걸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하 18:2-3에는 다윗이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군대를 편성하고 지휘관들을 세우고 작전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려운 전투에 임하는 군대를 격려하여 보내면서 그 격전의 현장에 자신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다윗 군대의 지휘관들이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왕은 나가시면 안 됩니다. 전쟁에서 우리들 절반이 죽어도 상관없지만 왕은 그렇지 않습니다.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요한 분이시니 성에 남아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스려 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 다윗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인간 다윗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의 인격과 비전, 용기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리더십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왕을 사랑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름 부으셔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사용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간적으로도 다윗을 좋아했지만 하나님이 오늘 그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다윗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귀한 분이었기에 그분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귀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섬기는 왕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를 알았을 때 그들은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왕 다윗은 생명보다 귀했습니다. 우리는 왕되신 예수님을 섬깁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 용사들에게 있어서 다윗은 생명을 드려도 아깝지 않을 귀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만이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내 생에 있어서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놀라운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저는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사람들의 눈에는 쓸모없는 연탄재만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불태운 후 아름다운 헌신의 화신으로 남아있는 연탄재가 보입니다. 

시인은 그의 다른 시, “연탄 한 장”에서는 그렇게 노래하지요.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나는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신앙생활이란 이상이 아니라 삶입니다. 사변적인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으로 살아내는 실천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각처에서 왕 되신 주님을 섬기는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생명을 걸고 추구하십시오. 예배를 생명같이 여기십시오. 생명을 걸고 예배하십시오. 왕 되신 주님을 섬기는 가장 귀한 표현은 드림에서 나타납니다. 시간, 물질, 재능, 정성을 드림에서 나옵니다. 

주님을 정말 잘 섬기시기를 원하십니까? 교회 건축하는데 집 팔아서 바치세요. 펀드 다 찾고, 은행 구좌에 있는 돈 다 가져다 주님께 드리세요. 자녀는 신학교 보내서 주의 종으로 드리세요... 혹 그렇게 요구한다면 헌신의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단한 것을 주님께 들고 나와야 한다면 그렇게 순종하지 못할 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물 한잔의 헌신”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용사들은 자신들의 핏잔은 쏟아 부으며 예배하는데, 우리에게는 주님이 대신 핏잔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대신에 우리에게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예배하여라, 감격으로 예배하여라, 눈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성을 다해 드리는 물 한잔의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Move6: 우리의 가장 귀한 것으로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들의 삶 전부를 담은 핏잔이었습니다. 용사들이 그 핏잔을 가져왔을 때 다윗을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소중한 헌신을 누가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생명을 담은 핏잔을 누가 가로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한 헌신은 하나님이 받으셔야지 어느 누가 중간에서 가로챌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께 부어 드립니다. 

이른 새벽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슬 젖은 땅에 무릎 꿇고 세 용사와 함께 다윗은 그들이 들고 온 핏잔을 하나님께 부어드립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장소는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수천의 소떼와 양떼를 번제물로 드렸던 희생 제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드렸던 것은 물 한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다윗과 세 용사가 아둘람 굴 앞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드렸던 예배는 최고의 예배였습니다. 그들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피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거룩한 희생이었습니다. 

울면서 예배합니다. 감격하면서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는 되는대로 나와서도, 아무렇게나 앉아있다 가서도 안 됩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예배를 드리는 좋은 예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해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바로 사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마다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사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월드컵 경기에서,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한 다음에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뛴 사람들이 그라운드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듯 삶의 각처에서 이렇게 헌신하고, 주일이면 가장 귀한 것, 핏잔을 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모든 헌신은 이제 예배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좋은 예배자, 예배의 승리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진정한 예배의 승리가 없이는 결코 인생의 승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의 승리자들이 되십시오. 

그들은 도망자들이었습니다. 들과 산을 헤매이며 도망 다녀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한 헌신과 예배가 있었을 때 하나님은 도망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용사로 세우십니다.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십니다. 이슬에 젖은 땅에 무릎 꿇고, 돌 몇 개 세워 제단을 쌓고, 그 위에 기껏해야 물 한잔 올려드리는 초라한 예배였지만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예배가 있는 곳에서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계속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몇 년 전 미국 장로교회(PCUSA)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시는 오정현 목사님과 함께 강사로 청함을 받아 몇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가 없던 시간 오목사님은 자신의 목회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가면 돌아오는 주일에 새로 건축한 교회에 입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미국 LA 애너하임 시 한복판에 10.8에이커(약 13,000평)의 대지 위에, 약 1000만 달러(약 126억)의 건축비를 들여 교회를 건축하게 입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도 이민교회 사역을 해보았지만 이민교회에서는 1000만 달러라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러나 저도 그릇이 워낙 커서 그렇게 놀라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정도로 응수했습니다. 그때로부터 2년 전, 교회는 오랜 시간 기도하면서 1차 헌신 주일을 준비하여 지키게 되었답니다. 

교인 900여명이 한 주일에 드린 헌금이 537만 달러(약 80억원)였다고 했습니다. 여러 분도 전혀 놀래지 않으시지만 저도 워낙 그릇이 큰 사람이어서 그렇게 놀래지 않았습니다. 아 그랬군요... 그렇게 헌금을 드리고 건축 일정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기도가 끝이 나지 않습니다. 기도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교인들이 기도를 끝내기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맨 앞 자리에서 가슴을 찢으면서 기도하는 몇분 집사님들의 기도가 들려오더랍니다. “하나님, 더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요.” 그것을 전해 주시면서 그 목사님도 울었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전을 완공한 다음 그 건물의 이름을 Miracle Complex―“기적의 땅, 기적의 건물”이라고 명명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주신 자리라는 뜻에서 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헌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을 계속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기대하는 곳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생명을 걸고 예배하고, 가장 귀한 것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곳에서 기적의 역사를 계속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십시오. 그렇게 살다가 주님 품에 안기시는 그날, 그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빕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고마웠다. 정말 고마웠다. 내가 너 때문에 행복했느니라.” 
“늘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기 위해 힘차게 달려가던 새문안교회, 너희를 보고 참으로 기뻤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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