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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선택(1) : 비전 (창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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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선택(1) : 비전 (창 15:1~7)


여러분은 세상에서 평균 연령이 가장 젊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지난 3년전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는 인구의 61가 30세 미만으로 형성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점점 더 고령화되는 것과 대조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근교에서 열린 선교사 대회를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베트남을 다녀오며 저에게 남겨진 가장 강렬한 두 가지 인상은 자동차들을 제끼고 도로 전체를 점유한 채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오토바이들의 물결과 생동하는 젊은 인구들의 역동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이상으로 제 마음을 부풀게 한 것은 제가 만난 선교사님들과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에서 자라나는 꿈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으로부터 30-40년전 한국인들이 가난했지만 꿈을 먹고 살던 그 시대의 젊은 한국인들을 연상시키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더 이상 국민들은 사회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찍 선교 학자인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가 2000년대의 가장 중요한 세계 변화의 한 특성으로 경제적 실용주의가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언한 현장을 저는 베트남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2000년대의 문턱에서 한때 전쟁 당사국들인 미국과 베트남은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고, 반국가적 범죄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종교 자유를 허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작년(2008년) 1월 베트남 내에서 개신교 대표 격으로 침례교회 선교를 공식으로 승인하여 미 남 침례교 국제 선교부 총재 랜킨(Rankin) 박사가 축하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선교사 대회도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 현지를 위시하여 인도, 말레이지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립핀, 라오스등지에서 모여온 우리들의 파송 혹은 교단 협력 선교사님들 200여명과 함께 선교의 꿈을 나누고 그들을 격려하는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될 때 우리의 비전의 하나가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 복음전도에 헌신한 지도자 3,000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었고, 그중에 십일조인 300여명은 타 문화권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그런 우리의 꿈의 현장을 확인하는 감격적인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늘 <아름다운 선택>이란 새로운 설교 시리즈를 시작하며 첫 주제로 <비전>을 선택했습니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은 어떤 꿈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꿈이 어떻게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우리의 욕심을 넘어선 하나님의 비전으로 실현되게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비전의 도구로 인생을 사는 비밀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비전의 도구로 인생을 사는 비밀-무엇일까요?


1.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비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이 경제 대 공황에 직면했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그의 유명한 대통령 취임사에서 두려움에 빠진 국민들에게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오직 두려움 자체뿐이다”(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비전을 주시기 전 먼저 그의 마음에 존재하는 두려움의 장애물을 다루셔야만 하셨던 것입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사실 본문의 배경을 형성하는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한 전투에서 일종의 기습공격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다시 전열을 정비해서 반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아직도 아브람은 후사를 갖지 못한 때문에 이대로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자식은 바로 자신의 미래였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없다는 말은 미래가 닫혀 있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자식이 주어질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세월은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아직 구체적인 약속도 약속 실현의 징조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너와 함께 하고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너를 보호한다면, 그리고 너의 상급이 되어 너에게 후사를 준다면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고 창조자 여호와가 말씀하십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백성들의 두려움은 상황을 잘 인식하지만 바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상실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내 인생의 마당에 임하거든 먼저 할 일, 하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아무리 내 인생이 사면초가이어도 열린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니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2. 구체적 비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아브람의 기도가 드려집니다. 2절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아마도 처음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이제나 약속하신 아들을 상속자로 주시려나 생각한 듯 싶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응답합니까? 2절 하반부에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자신의 하인 중에 지혜로운 종(아마도 아브람이 언약의 땅으로 오던 중 다메섹에서 만나 데려온 종)으로 이미 상속을 결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기른 자가 아니라 네가 낳은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붙잡고 살아 갈 비전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시청각 교훈을 베푸시지 않습니까? 어느 별이 빛나는 밤 그를 데리고 뜰에 나서게 하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별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들 나 둘, 별 셋 나 셋하나님 너무 많아 셀수 없어요” 그때 뭐라고 하십니까? “네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 이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비전은 곧 보이지 않는 미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비전의 창출은 “하나님, 무엇을 저에게 주시겠습니까?”라는 아브람의 기도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빌 하이블 목사는 “기도는 곧 비전의 모태라”고 말합니다. 기도에서 비전이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저는 비전과 야망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 야망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성경적 비전은 우리의 기도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꿈꾸지도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로 애급에서 억압받고 있는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출애굽의 비전을 잉태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에로의 귀국의 꿈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조국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성벽 재건의 비전으로 그 가슴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단순한 인간적 야망으로 인생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그러면 그냥 마음의 충동을 따라 가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인생 이상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창조주가 설계하신 최선의 인생을 갈망하십니까? 그러면 엎드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십시오. 막연히 미래를 설계하고 싶으시다면 막연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구제적 성경적 비전을 받고 싶으시다면 구체적인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하나님 내게 무엇을 주시겠느냐?”고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비전이 주어져도 비전이 보여도 그 비전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믿지 않으면 비전은 결국 몽상이 됩니다. 믿음이 비전을 잉태하는 첫 스텝인 것입니다. 하늘의 뭇 별처럼 자식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믿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 꾸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 꿈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쓰셔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펼치고자 하십니다. 이런 비전의 사람들을 비저나리(Visionary)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밤에만 아니라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낮에도 꿈을 꿉니다. 그리고 진정한 비저나리들은 비전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그 비전을 출산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이들이 바로 비전의 주인공이 되고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비전을 갖고 사는 사람과 생존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비전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생존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장수)을 목표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만 사는 것-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요 모델이 예수님이시라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오래 사신 분은 아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인생을 누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의 인생을 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 구원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는 일찍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열매를 위해 그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꺼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선택은 죽음의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비전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의 결과로 구원받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분의 삶의 성공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한 날 그분의 성공을 궁극적으로 선포하는 놀라운 축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부르는 비전 찬송의 내용이 된 계7:9-10입니다. “이 일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그 날의 축제에 우리도 가슴 설레는 증인으로 서기 위해 비전의 사람이 되는 꿈을 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선교사 대회의 마지막 저녁 설교에서 그 자리에 모인 선교사님들에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들의 선교지에서 12명의 현지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꿈을 꾸어보자고 도전했을 때 마침 그 자리에는 SK 건설의 베트남 책임자로 와 계신 우리 교회 한 집사님(김 영섭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그분이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는 사무실에 들러 잠시 기도하던 자리에서 그분의 이런 감동적인 고백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이 사무실에 정확하게 12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제가 그들을 예수님의 12제자로 키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다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비전의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생존의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선택-비전입니까? 생존입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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