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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체의 남은 때 (벧전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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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남은 때 (벧전 4:1~11)


제가 요즘 즐겨 시청하는 '하우스(House)'라는 미국 텔레비전의 메디컬 드라마는, 성격은 정말 괴팍하지만 진단의학에 있어서는 거의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하우스라는 의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배역들의 독특한 개성들이 얽히면서 많은 갈등이 생기는 중에서도 원인 모를 병에 걸린 중환자들의 생명들을 결국 살려내는 에피소드들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그 '하우스'의 시즌이 바뀌면서 새로운 배역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레미 해들리'라는 여자 의사입니다.
  
저는 사실 그전 시즌에 나왔던 '앨리슨 캐머론'의 지적이면서도 또한 감성이 풍부한 캐릭터가 좋았기 때문에 그녀 대신에 새로 나오게 된 이 여의사에 대한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레미 해들리'가 '헌팅톤 무도병'이라는 불치의 유전병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남은 생을 무언가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어서 의사가 된'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물론 픽션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캐릭터에 대해서도 새로운 흥미를 가지고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음을 알게 된 사람은 아무래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남아 있는 생애란 그야말로 천금 같이 귀한 것이며 그 아까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라는 표현들이 바로 그처럼 촉박한 시간의 흐름, 남아 있는 짧은 인생의 아쉬움과 귀중함을 구구절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병이 없다 해도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한 사망'이라는 이 영적 불치병에서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육체의 남은 때' 역시 유한적일 뿐 아니라 점점 더 짧아지고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즉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고 있으니 그 '남아 있는 듯이 보이는' 시간조차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이 '육체의 남은 때'란 정말 귀중하기 짝이 없는, 정말 일분일초라도 낭비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까운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분명히 점점 더 짧아지고 있으며' 또한 '예상보다 훨씬 더 짧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인생을 과연 어떻게 가치 있게 살아야 마땅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육체의 남은 때는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좇는' 헛된 인생으로 낭비될 수 없습니다. 

본문 1절에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갑옷을 삼으라"는 말씀은 '단단히 무장(武裝)하라'는 뜻입니다.
무장할 때에는 입을 것, 채울 것, 잠글 것들 중에 하나도 빠짐없이 단단히 해서 그 어느 한 군데에도 빈틈이 없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자기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마음으로"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을 본받아서'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무슨 고행주의 따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서 베드로전서 3장 17절의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죄인 구원이라는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 때에 받게 되는 고난을 당연히 생각하고서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처럼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다"고 하는 말씀은 죄와 완전히 결별된 무흠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죄에 대하여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말입니다.
즉 성도가 선을 위하여 고난 받을 각오를 분명히 가지게 되면, 이전에 죄만 짓고 살던 생에 대하여 자동적으로 확실한 '제동'을 걸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처럼 '죄를 그치게' 되는 삶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3절 이하 6절의 말씀인데, 기록하기를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믿기 전에 불신자처럼 살 때의 생활을 가리켜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육체의 감각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행위이며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의 육체를 가장 저급하게 사용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탕한 육신생활은 "무법한 우상 숭배"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의 우상 종교들은 그처럼 육욕에 이끌리는 삶을 정죄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시키고 장려까지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상숭배자들은 사실 그 얼마나 쉬운 종교생활을 했겠습니까?
  
음주, 일부다처, 여사제들과의 간음 등을 아예 공인해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의 신들을 섬기는 우상종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가 된 자들은 이제 그처럼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즉 '불신 이방인들처럼 살았던' 생활은 정말이지 "지나간 때가 족한 줄"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처럼 신자들이 "극한 방탕"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해 버리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게 되는 사람이 바로 불신자들입니다.
"너희가 저희와 함께" 더 이상 그런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면서 "비방"하게 된다는 말씀처럼, '예수쟁이가 되더니 이제는 친구들하고 화통하게 술 한 잔도 같이 못하는 좀팽이가 되었다.'라는 식의 조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비방 정도는 듣게 될 수 있어야 분명히 변화된 중생인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만약에 신자가 되고 나서도 불신 친구들을 만날 때에 이전과 아무 다른 것이 없다면 그 자신의 신앙이라는 것에 무언가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5절은 그처럼 변화된 신자들을 비방하던 자들이야말로 오히려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이전에 자기네들이 신자들까지 끌어들이려 하면서 마음껏 즐겼던 그 '음행과 술 취함과 우상 숭배'의 죄악에 대하여 꼼짝없이 다 이실직고하고 유죄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날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복음을 받고 변화되어 성화의 삶을 살다가 죽은 성도들은 정반대의 처지가 됩니다.
본문에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는 말씀은 '죽은 후에 그 죽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생전에 전파된 복음을 받고 살다가 먼저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육체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사망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되는 부활을 이미 누리고 있으며 물론 마지막 날에는 그 육체의 부활 역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 과거에 잘못 살았던 것은 일단 회개만 하면 완전히 다 해결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죄악과 허물들이 아무리 더럽고 심각한 것이었다 해도 '눈 같이 희게 씻어 주신' 후에 아예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용서 받았다는 사람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전에 허랑방탕하며 보내었던 세월만 해도 정말 아깝기 짝이 없는데, 이제 신자가 되었다는 이후에도 자신의 '육체의 남은 때'를 여전히 옛날처럼 육욕만을 좇아 산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 자신이 불신자 시절에 지었던 그 어떤 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악의 더럽고 추악한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서 지적하는 대로, '개가 한번 토해 놓았던 것을 다시 먹는 모습', '돼지가 깨끗이 목욕을 하고 나서 곧바로 자신의 배설물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우리 바닥에 뒹구는 꼴'이란 정말 상상만 해 보아도 역겹지 않습니까?
신자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음란, 정욕, 술 취함, 방탕, 연락, 우상숭배'의 '죄를 그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 예수님의 눈에 바로 그처럼 역겹게 보이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악한 생활, 육신의 욕구대로 따라가던 생활, 불신자 식으로 생각하면서 살던 생활은 '지나간 때로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더러운 것들을 더 이상 내 인생에 갖다 붙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은' 자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면서도 옛날의 불신 친구들로부터 "너, 정말 많이 바뀌었구나."라고 '이상히 여기는 비방'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상 여전히 '오만한 자의 자리에 같이 앉아 있는' 저주의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개나 돼지보다도 더 못하고 더럽게 만드는 이런 죄의 악습에 대하여 정말 '브레이크'를 꽉 걸어야 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더 이상 방탕한 삶에, 불신앙적인 행위에 낭비해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고 아주 철저한 서원의 무장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신자가 된 이후의 '육체의 남은 때'만큼은 더 이상 낭비하지 않도록 '죄를 그치는 심령의 갑옷'을 단단히 입고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육체의 남은 때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명에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본문 2절을 보면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라는 말씀은 1절에 나왔던 '마음의 갑옷' 즉 '죄를 그치는 각오'를 확고부동하게 세운 이후를 가리킵니다.
정말 "육체의 남은 때"를 가치 있게 살고자 하는 성도는 그처럼 '죄를 짓지 않겠다.'는 삶에서 끝나지 않고 보다 더 적극적인 결단을 하나 더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정욕을 좇는' 대신에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정욕'이 자기 삶의 유일한 자극제요 동기가 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이 되고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7절부터 11절에서의 말씀이 바로 그런 변화된 삶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를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라는 말씀은 바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게 되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임박했음을 가리킵니다.
만물이 끝나게 되면 그 만물에 속한 인류 역시 다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만물을 통하여 나타나는 수많은 종말의 징조를 보면서 자기 '육체의 남은 때'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 깨달을 줄 아는 성도는 과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먼저 "정신을 차리고(keep sane) 근신하여(be sober)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멍청한 상태가 되지 말고 '맑은 영지'를 지켜야 하며 '음녀의 잔'에 취하지 말고 '깨어 있는 심령'을 늘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오직 하나 "기도"하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하겠다는 것은 발밑도 보지 않고 멍하니 길 가는 사람, 술 취한 상태로 운전대를 붙잡는 사람이나 같은 것입니다.
이 아까운 '육체의 남은 때'를 그런 식으로 비틀거리면서 위태롭게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월남전에서 에이스(ace)였으며 나중에 저 유명한 탑건(Top Gun)의 교관까지 되었던 어느 미공군 조종사의 실화입니다.
그가 적기 3대를 격추시키고 항공모함으로 귀환하려던 순간 적군의 샘 미사일의 파편에 맞아서 기체에 불이 붙었습니다.
  
적어도 월맹군의 영공에서 벗어나 바다에까지 가서 비상사출을 해야 아군에게 구조 받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겠지. 나 자신에게 모든 것이 다 달려 있다."라고 마음을 다지고서는 조종간을 움켜잡았는데, 웬걸 바로 그 순간 비행기가 균형을 잃고 뒤집힌 자세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곧 튀어나온 말이 "어이쿠, 하나님, 조금 전에 했던 말 취소합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였다는 것입니다.

죽어라고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은 혹시 기도하는 것을 무슨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되면 불신자들조차 본능적으로 기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육체의 남은 때'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로 의식하고 있는 신자라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기도'는 '신앙생활의 대인관계'에서도 지극히 정상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데 그것이 바로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은 그저 사랑이 느껴지면 사랑하고 느껴지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되지만 우리 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면서 사랑하고, 자기가 사랑을 받고 싶은 대로 먼저 남을 사랑해아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본능적인 사랑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기 때문에 정말 "열심으로" 즉 '열정적인 노력과 정성을 동원해야만' 합니다.
물론 그런 노력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본받으려고 할 때에만 결실을 거둘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성도들이라 해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죄가 발생하는 줄 아십니까?
불신자들의 세계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미움, 질투, 시기, 경멸, 오해, 모함, 저주까지 똑같이 생길 수 있습니다.
  
평소에 좀 거리끼는 교인일수록, 상대방이 어떤 미운 일을 내게 행한 바로 그 순간일수록 더욱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서로 사랑하고자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허다한 죄"들, 정말 세속적인 드라마 한 편을 쓸 수 있을 만큼 온갖 저질스러운 일들이 바로 목사와 장로, 집사와 권사,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열심 있는 사랑'만이 서로의 허물을 미리 덮어버리고 그런 죄를 사전에 방지해 줄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면 좀 더 일찍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육체의 남은 때'가 얼마 남지 않을 것을 기억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더욱이 성도 간에는 정말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겉으로는 대접해 주는 것 같아도 '뒤로는 불평하고 욕을 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사람의 위선적인 면모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데도 왜 저 사람은 몰라줄까?'라든지 '나는 정말 잘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왜 저 교인은 내게 해코지를 할까?'라는 원망을 속에 품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우리 '육체의 남은 때'의 유한성을 상기해 본다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알고만 지내던 사이라 해도 갑자기 어디 멀리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헤어지기 전에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그래서 이사나 이민을 가게 되면 갑자기 여기저기서 식사초대가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너무 바빠서 오히려 거절해야 할 판이 되곤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같은 교회 안에서 매주일 얼굴을 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대접해 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다면 정말 부지런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 대접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를 늘 염두에 두고 사는 성도는, 기도생활과 성도교제 뿐 아니라, '대신관계'의 삶에 있어서도 역시 달라집니다.
그것이 곧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은사"를 쓸 수 있는 시간 역시 무한정이 아니라 점점 더 짧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각양 은혜" 즉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사명'들에 충성할 수 있는 시간 역시 더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지막을 향해서만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청지기의 임기'가 끝나고 주인 앞에 서게 되는 때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봉사하고 충성해야 할 뿐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주인께로부터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았던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서 재림주 앞에 서게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직분과 사명을 섬길 수 있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충성할 수 있는 힘도 전적으로 우리 '주인'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달란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말씀 전파를 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교회 봉사를 할 때에도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집을 돌보는 것은 '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인의 것'을 때를 따라 '그 종들과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받아서,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는 것만이 교회를 봉사하는 청지기의 마땅한 자세요 본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청지기가 될 때 비로소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내 속에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하려면 어렵기도 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돋보일 여지가 없게 됩니다.
  
무슨 '내가 가진 것'을 너그럽게 나누어 주는 자세로 봉사하려면 참 아깝기도 하겠지만 혹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이유 역시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베풀어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의 분량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시간과 힘과 물질'의 달란트를 가지고 섬길 때에만 비로소 모든 영광이 마땅히 가야할 하나님께로 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며, 이것이 진짜 '청지기의 유종지미'입니다.

언젠가 디스커버리(Discovery) 채널에서 저 북빙양의 차갑고 세찬 파도와 싸우면서 대게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모습을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어업은 1년 중 어획이 허용되는 일정한 기간이 정해져 있고 반드시 그 안에 작업을 끝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어부들은 그 한두 주간 동안 짬짬이 겨우 몇 시간만 눈을 붙이고 문자 그대로 낮밤을 계속해서 그 추운 갑판 위에서 대게잡이 통발을 부지런히 던지고 끌어올립니다.
그러다가 그 어획 허용 기간이 종료되는 신호가 울리면 모두가 일손을 놓고 기구를 정리한 후에 배가 항구에 도달할 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 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사명 종료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며 마음껏 열매를 거두어 단으로 묶고 많은 물고기들을 잡아서 배에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신 시간이 이제 곧 끝나게 되는, 그때 가서는 더 이상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작업종료 신호, 바로 '재림나팔'이 울리면 이제는 그때까지 일한 것을 계산하는 순서밖에 없습니다.
그물을 올려도 걸린 것이 없는 어부, 받았던 그대로 한 달란트만 달랑 주인에게 보이는 게으른 종, 집안 식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지 않았던 악한 청지기들이 등에 땀을 흘릴, 아니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시간이 되는 것이며, 오직 '일할 때 일하고 놀지 않았던' 성도들만이 주인께서 베풀어 주시는 즐거운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전에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허비해 버렸던 시간을 생각해 볼 때 정말 아까워서 분통이 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는 때'의 촉박함을 깨닫고, 이처럼 소중하게 남아 있는 시간을 오직 기도에 더욱 힘쓰며 성도끼리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칭찬 받게 될 충성과 봉사에만 부지런히 활용하는 선한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프로 바둑기사에게는 시간제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피차 공정한 시합이 되게 하기 위하여 사전에 각자 한 시간, 혹은 세 시간, 이런 식으로 제한시간을 정해 놓고, 바둑판 곁에 계시기라는 시간 재는 기계를 갖다 놓고 바둑을 둡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1분이 남게 되면 '초읽기'라는 것을 하는데, 그때 그 '남은 시간'이라는 것은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화장실조차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프로기사가 기지개를 해도, 물 한 잔을 마셔도 그 눈은 반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 재깍재깍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마르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자기에게 남은 시간의 일초까지 아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의 남은 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읽고 계시는 초읽기의 소리를 듣는 성도는 정말 일분일초라도 그것을 '자기 정욕을 좇아' 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서 기도하며, 열심히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 주며, 맡기신 선한 청지기의 사명에 충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만 전심전력을 투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 - '만물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신자가 어떻게 이런 불신자처럼 살 수가 있겠습니까?
'주 오늘에 다시 오신다 해도 부끄러움 없도록' '등 밝히고 깨어 있어' '주 예수님 맡겨 주신 일에 모두 충성 다함'으로써 '잘하였다 주님 칭찬하며 우리 맞아 주시는' 그 영광의 결승점에 다 함께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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